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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벼룩시장에서 태어나다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3-03-08

마티스부터 미셸 네자르까지

유학 시절 일요일마다 열리는 벼룩시장을 구경하는 것은 각별한 즐거움이었다. 아직 쓸 만한 물건을 헐값에 건지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호기심을 자극하는 진기한 물건을 발견하기도 한다. 원래 그것들도 한때는 아주 평범했으나, 그것이 사용되던 시절과의 시간적 거리가 그것들을 ‘진기한’ 것으로 만들어준 것이리라. 현역에서 은퇴한 고물들은 때 묻고 흠집 난 표면을 통해 시간의 ‘아우라’를 뿜어낸다. 도대체 용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물건들의 형태를 보면, 왜 수많은 예술가들이 벼룩시장을 찾았는지 저절로 이해가 된다.

물신으로서 조각

내가 아는 한, 벼룩시장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은 최초의 화가 중 하나는 마티스다. 피카소에게 아프리카 조각의 두상을 보여준 것이 그였기 때문이다. 그 조각상은 물론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것이다. 피카소의 회고에 따르면, 마티스는 그 조각상을 피카소에게 보여주며 ‘이집트의 조각’에 대해 얘기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보아, 마티스는 그 조각상을 그저 비(非)서구적 조형의 예로 이해한 듯하다. 피카소에 따르면, 마티스는 주로 아프리카 조각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피카소와 브라크 역시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입체주의가 현대 미술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파리의 벼룩시장이 회화적 현대성의 산실이 된 셈이다. 브라크와 달리 피카소는 자신이 아프리카 조각에서 받은 영향은 ‘형태’와는 전혀 관계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찾아간 트로카데로 근처의 벼룩시장은 역겨운 냄새가 나서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기에 머물기로 했고, 결국 그곳을 둘러보다가 문득 자신에게 뭔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음을 깨닫는다.

“그 가면들은 다른 종류의 조각 같지 않았다. 전혀 안 그랬다. 그것들은 주술적 사물이었다. (…) 나는 그 물신들을 계속 지켜봤다. 모든 물신의 목적은 하나다. 그것들은 무기다. 사람들이 영혼에 지배당하지 않게 도와주는 도구다. 영혼에 형태를 주면,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영혼, 무의식, 감정은 같은 것이다. 나는 내가 왜 화가인지 깨달았다. (…) <아비뇽의 처녀들>은 그날 내게 그렇게 왔다. 하지만 전혀 형태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엑소시즘을 행한 나의 첫 번째 캔버스다.”

우리는 ‘아비뇽의 처녀’의 각진 신체에서 입체주의라는 예술언어의 출발을 보나, 피카소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그 캔버스는 아프리카 조각의 ‘형태’보다는 그것의 ‘기능’, 즉 엑소시즘과 관련이 있는 셈이다.

다다와 초현실주의자들은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에서 벼룩시장을 찾았다. 야수주의나 입체주의의 화가들이 벼룩시장에서 그저 ‘영감’을 얻어왔다면, 다다와 초현실주의자들은 거기서 아예 ‘작품’을 발견하려 했기 때문이다. 가령 다다이스트들은 산업적 산물을 작품으로 둔갑시키는 ‘레디메이드’의 전략을 사용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우연히 마주친 사물을 작품으로 축성하는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é) 전략을 사용했다. 그들에게 벼룩시장은 당연히 새로운 작품의 보고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뒤샹의 경우에는 벼룩시장보다는 잡화점이나 건재상을 선호했다고 한다. 레디메이드에는 대량 생산된 산업의 산물이 더 어울리나, 벼룩시장에서 나온 물건들은 대부분 수공 혹은 수공의 느낌이 나는 오래된 골동품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전시 직후 내다버린 원본(?)을 대체하기 위해 나중에 제작된 <샘>(1917)의 복제는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큐레이터가 벼룩시장에서 사온 사용된 소변기에 새로 사인을 하고, 그것을 제 작품으로 승인해주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즐겨 생투앵의 벼룩시장으로 발견 여행을 떠나곤 했다. “나는 종종 거기에 가서,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물건들, 즉 유행이 지나고, 산산이 조각나고, 쓸모없고, 뭔지 거의 알아보기 힘들고, 내가 의미하고 좋아하는 의미에서 변태적인 물건들을 찾는다.” 그에게 오브제 트루베는 아직 명확히 분절되지 않은 어떤 모호한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발견된 대상이 자신의 운명과 결합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것을 그는 ‘객관적 우연’이라 불렀다.

물론 입체주의자들도 ‘오브제 트루베’를 사용하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발견한 객체를 자신들의 입체주의적 구성에 포섭시켰다. 그들의 작품에서 발견된 오브제는 철저하게 그들의 능동적 구성을 위한 조형적 재료 혹은 요소로 사용될 뿐이다. 반면, 초현실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발견된 객체 그 자체가 암시하는 연상적 이미지를 작품으로 간주했다. 거기에는 당연히 짙은 성적 뉘앙스(“변태적인”)가 깔려 있다. 평론가 할 포스터는 그것을 죽음의 충동과 연결된 ‘언캐니’의 취향으로 읽는다.

물질학,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

브르통은 자코메티와 함께 벼룩시장을 방문한 얘기를 들려준다. 거기서 자코메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마스크를, 자신은 이상한 손잡이가 달린 스푼을 산다. 자코메티는 그 마스크에서 영감을 받아 미완으로 남아 있던 조각상의 두부(頭部)를 완성한다(그 물건은 나중에 펜싱 마스크로 드러난다). 반면, 브르통은 그 스푼에서 슬리퍼를 떠올렸고, 거기서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성적 상징을, 즉 신데렐라의 구두처럼 자신이 막연히 찾아 헤매는 여성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을 읽었다. 형태에서 영감을 얻든 암시를 얻든 이들에게서 오브제 트루베의 효과는 기이한 ‘형태’(form)에서 나온다.

하지만 뒤뷔페는 이들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 벼룩시장을 찾았다. 그를 벼룩시장으로 데려간 것은 무정형(l’informe)의 물질, 재료, 질료에 대한 관심에서였다. 그는 이 관심을 ‘물질학’(materiology) 혹은 ‘질감학’(texturalogy)이라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취향은 브르통과 정면으로 대립했던 바타유의 것에 접근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탈승화, 즉 죽음의 충동으로 나아간 바타유와 달리 뒤뷔페가 물질로 돌아간 것은 거기서 꿈틀거리는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물질 자체가 이미 언어라 믿었고, 그 언어의 승화를 추구했다.

이보다 복잡한 것은 미셸 네자르의 작업이다. 뒤뷔페가 그저 벼룩시장의 방문자에 불과했다면, 네자르에게 벼룩시장은 생업의 장소였다. 그는 일주일에 며칠은 클리냥쿠르의 벼룩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그의 외할머니는 넝마주이였고, 아버지는 재단사였다. 그의 작업에서 이 외할머니와 아버지의 직업은 하나가 된다. 그는 벼룩시장에서 사온 넝마(‘schmate’)를 바늘로 꿰매어 인형을 만들었다. “그것(=넝마)은 이미 죽음에 가깝다.” 빈사의 물질에 그는 생명을 되돌려준다. “나의 작업을 통한 낡은 넝마의 재탄생.”

‘진흙’과 ‘넝마’라는 차이가 있을 뿐, 네자르의 작업은 뒤뷔페가 물질이라는 죽음의 상태에서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 역시 바타유가 주장하는 ‘탈승화’(desublimation) 혹은 ‘기저화’(debasement)와는 뚜렷이 구별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승화’의 활동에 속한다. 문제는 그 승화의 결과로 “재탄생”한 인형의 기괴한 모습이다. 그것은 한스 벨머의 구체관철인형 못지않게 섬뜩한 느낌을 준다. 물질의 차원에서는 분명히 ‘승화’했지만, 형태의 차원에서는 명백히 ‘탈승화’를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