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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현실을 모방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지요”

극단편을 만드는 젊은 독립영화감독들에게 보내는 편지

<파수꾼>

요즘도 가끔 질문을 받곤 합니다. 당신의 글은 누구를 향한 것입니까. 누군가는 단 한명의 감독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고 하고, 누군가는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다고 대답합니다. 언제나 그 질문 앞에서 망설이는 저는 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는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 그러니까 영화라는 세상을 경유해서 결국은 그 세상을 살고 있는 나의 변화를 보기 위해 글을 씁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기적인 태도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가 제게 중요한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2013년 봄,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글을 써야겠다는 긴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지면에서 단 한번도 써본 적 없는 편지의 형식이 이번만큼은 저의 근심을 나누는 유일한 방식이 될 것 같았습니다. 지금 저는 학교에서, 현장에서, 혹은 일터에서, 오직 영화 한편을 찍기 위해 힘겨운 삶의 조건과 싸우며 밤잠을 뒤척이다 우연히 <씨네21>을 뒤적일 젊은 감독님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

올해 극단편들의 경향을 돌아보게 된 까닭

영화평론을 시작한 이래, 거의 매년 이런저런 영화제 심사를 하며 그해의 신작들을 볼 기회를 갖습니다. 선정의 변을 쓰는 건 언제나 평론가의 몫이라 매해 ‘올해의 경향’에 대해 써야 하는데, 생생한 개별 작품들을 딱딱한 범주로 묶는 일은 늘 내키지 않고, 무엇보다 전년과 다른 올해의 새로운 경향이라는 것이 없을 때가 대부분이어서 선정의 변은 쓰는 입장에서도, 읽는 입장에서도 죽은 글처럼 느껴졌습니다. 올해 역시 수백편의 작품들을 보고 나서 선정의 변을 써야 했고, 기억을 돌이켜볼 겸 지난 글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매해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문구들, 이를테면 상투적이거나 작위적이다, 새롭거나 도전적이지 않다는 말을 올해 또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낙담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이번에는 좀 다른 생각이 함께 들었습니다. 영화들의 경향을 지적하며 기껏해야 상투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얼마나 상투적인가, 매해 선정의 변에 출품작 수와 선정작 수만 고쳐 써넣어도 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건 물론 작품들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작품들에게 말을 거는 비평의 방식 역시 안이함에 빠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지난 한달간, 수백편의 영화들을 보면서 이제 더 미루어서는 안될 시점 앞에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해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만 비슷하게 한자리를 맴도는 수많은 젊은 영화들과 그들을 그저 같은 자리에서 쳐다보며 비슷하게 한자리를 맴도는 언어로 평가하는 비평 사이에 뭔가 다른 방식의 다른 질문들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물론 한 사람의 평자로서 저는 답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영화를 사이에 두고 질문을 발견하고 그것을 나누고자 하는 열망과 능력이 아직은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영화들의 소재와 그걸 다루는 방식이 천편일률적이기는 했지만, 왜 하필이면 올해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심사를 하면서 이렇게까지 심신이 지친 적은 없었던 것 같고, 이렇게 하나같이 뭔가에 지쳐 있는 영화들을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최근 영화들, 특히 올해 본 극단편들의 특정한 경향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은 다양한 결들을 지닌 영화들 전체를 결코 포괄하지 못할 것이므로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그저 이 편지가 우리 사이에 가능한 여러 질문들 중 어느 평자의 마음에 가장 다급하게 다가온 질문 하나로 읽히길 바랍니다.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만, 심사를 하는 자리에서 편의를 위해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을 묶어서 통칭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해당연도의 경향이 잡힙니다. 이를테면 올해는 탈북자 영화, 연애 영화, 영화에 대한 영화, 백수 영화가 많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장르적 구분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현재 20대 감독의 관심사,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그들이 모방하고 싶어 하는 영화적 궤적 등에 대해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일종의 통계 같은 것이라고 해두겠습니다. 최근에는 고등학생 감독들도 활발하게 출품을 하고 있고, 영화제가 나이에 제한을 두며 영화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출품한 감독들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령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막 발을 내딛거나, 영화과에 진학한, 아직 장편은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 20대입니다. 그러니까 영화를 심사할 때마다 저는 20대 영화감독들의 현실, 영화적 취향, 세계관 등을 경험하고 매해 미세하게나마 거기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는 셈이지요. 물론 범주화를 통해 특정 세대를 알 수 있다고 믿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며,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범주화를 거부하며 묘한 당혹감과 희열을 안겨주는 영화들보다 스스로를 범주화하는 영화들이 압도적인 현실에서 그런 범주들이 영화가 만들어진 현실에 대해서건 감독에 대해서건 분명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왕따 영화’와 ‘편의점 영화’

그런데 좀 의아한 변화가 있습니다. 범주화되는 것에 저항하는 독창적인 영화들은 드물었어도 어찌되었든 다양한 범주들이 공존했던 예년에 비해 최근으로 올수록 그 범주의 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는 겁니다. 올해는 그 변화를 극단적으로 목격한 해였습니다. 얼마 전 심사를 하면서 우리는 수백편 중 절반이 훨씬 넘는 영화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왕따 영화’와 ‘편의점 영화’가 그들입니다. 말 그대로 전자는 중고등학교에서 왕따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다루고, 후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들의 가난을 다룹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가 그런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그걸 영화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은 둘을 겹쳐두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유사합니다.

우선 어른이 부재합니다. 부모는 폭력적이거나 무력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고, 이들은 홀로 버티거나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삶의 조건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 시스템으로도, 가족제도로도, 심지어는 또래 집단과의 관계로도 보호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혼자 신문을 돌리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막노동을 하며 생존하기 위해 애쓰지만 그 노력은 결코 경제적으로 보상받지 못합니다.

2008년에 저는 <씨네21>에 서울독립영화제를 앞두고 그해 독립영화의 경향에 대해 쓴 적이 있습니다. 청춘의 경제적 무력감이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의 핵이 되었는데, 그 무력감의 정체가 수상하다는 논지였습니다. 이를테면 당시 저는 독립적인 삶은 원해도 독립적인 경제력에는 관심이 없으며 경제적인 무력감이라는 신종 심급으로 연대하는 세대의 초상을 몇몇 영화들에서 보았습니다. 이 영화들에는 백수로서의 자기 조롱이 깃들어 있었고, 이들의 무노동은 기성질서에 대한 저항도 반감도 아니며, 한마디로 계급적인 성격을 띤다고 단정할 수 없는 조금은 희극적이고 유희적인 무엇이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본 영화들에서 목격한 경제적 무력감은 성질이 다릅니다. 여기, 더이상 자기 조롱의 유머가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골방에서 게으르게 빈둥거리는 백수의 초상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일자리를 찾아 헤매지만 악랄하고 위선적인 기성세대의 이해관계에 매번 당하고 마는 약자의 초상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그들은 저항하지 않으며 계급적 정체성으로 연대하는 대신,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대신, 그야말로 기약없이 피폐한 심신으로 권력관계를 버팁니다. 삶을 전환할 어떤 에너지도 없으며, 살아낸다는 인상보다는 자포자기하며 숨쉰다는 인상이 더 강합니다. 그들이 그저 살덩어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임을 알려주는 인간적인 감정은 분노, 그리고 불안입니다.

그 짧은 몇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언젠가 지난 몇 십년간 20대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변화를 체감해온 어느 교수로부터 ‘요즘 20대는 부모가 IMF를 지나며 무너지는 걸 직접 겪으며 십대를 보낸 경험이 있다. 이들은 지금 자기들이 당면한 궁지를 부모세대와의 단절이나 반발로 대면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성세대의 불안과 자신들의 불안을 동일시하며 부모세대의 희생에 대한 책임감과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 같다’는 요지의 말을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게 맞는 분석인지 잘 모르겠고, 그런 사회적 원인을 규명할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이미 수없이 나온 20대론에 의견 하나를 덧붙이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근래의 청년 감독들이 자신들의 10대를 불러오거나(왕따 영화), 현재를 반영(편의점 영화)할 때, 스스로를 언어화하는 방식, 의존하는 영화적 틀, 즉 이들이 과거와 현재를 대면하는 방식에 대해서만큼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다소 짓궂지만, 이런 질문도 하고 싶습니다. 이 두 부류의 영화를 만든 감독들은 모두 학교폭력을 경험한 걸까요? 혹은 모두 아르바이트를 하며 착취당한 적이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삶의 소재들 중 유독 이 두 부류에 이들이 매료되는 이유, 혹은 매달리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영화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이 두 부류의 소재를 다룬 수많은 영화들을 보고 난 다음, 마치 똑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달리 말해 같은 소재에서 출발했으나 서로 다른 이야기들로 만들어주는 구체적인 결들, 쉽게 말하자면 그 영화만의 눈, 현실에 대한 해석, 멈추고 바라보는 시선을 발견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소재가 있고, 그 소재가 야기하는 유사한 사건이 있고, 사건을 작동하는 유사한 틀이 있는데, 그 틀이 가동되는 순간, 자동기계처럼 흐르게 내버려두는 영화들을 보며 저는 과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대체 누구의 이야기인가, 되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우려스러웠던 건, 그 틀이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대는 데 아무런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왕따 영화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편의점 영화에는 악덕업주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구도가 전제되고, 여기서 이 구도가 서 있는 구조적인 맥락은 물론 최소한의 서사적 맥락을 읽어내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이 영화들은 대체로 이상한 순서로 이야기를 쌓아올리고 있었습니다. 가해자의 맥락없는 가학이 있어야 희생자, 피해자의 고통과 불안이 극대화되고, 그 고통과 불안이 참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해야 죽음이든 복수든 더 약한 타자에 대한 착취든 사건의 폭력이나 분노의 폭발로 분출할 수 있게 된다는, 어딘지 거꾸로 굴러가는 도식이 영화들을 지탱하는 것 같았습니다. 숏, 신, 나아가 전체 이야기는 이 도식에 근거해서 필연성을 획득하고 있었습니다. 조금의 과장을 보태,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저 분노의 현현을 위해 복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영화 속 조악한 도식 안에서 존립근거를 부여받는 저 분노의 실체는 실은 영화 안에서 설명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 분노의 덩어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혹시 그것은 그저 장르적 욕망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애니멀 타운>

여기 구경꾼만 남았다

약간의 우회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장편영화들이기는 합니다만, 최근 우리가 본 독립영화들에는 간과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사실주의라는 용어의 쓰임새가 넓고 애매하기는 하지만, 이 용어의 관습적 의미를 따르자면 이 영화들이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은 내러티브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사실주의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인물의 현실에 개입할 수 없다는 듯, 한곳에 고정된 카메라를 통해 롱테이크로 관찰하거나 인물의 동선을 앞서 이끌지 않고 뒤쫓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듯 핸드헬드를 적극 활용하며, 고시원, 쪽방, 철거촌 등 이미 사회적인 특질이 부여된 공간의 리얼리티에 천착하는 건 전형적인 방식의 예들일 것입니다. <똥파리> <사람을 찾습니다> <빗자루, 금붕어 되다> <애니멀 타운> <무산일기> 등부터 최근의 개봉작들까지, 우리는 그런 태도를 접해왔습니다. 이들은 그런 방식을 고수하며 사회 주변부 인물들의 반복되는 일상을 집요하게 따라갑니다. 그 삶은 우리의 보잘것없는 일상이 그러하듯, 아무런 사건도, 출구도 찾을 수 없는 썩은 물처럼 그 자리에 고여 있는 무기력한 삶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 영화들이 타자의 삶을 형상화하기 위해 선택한 태도의 윤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주목할 부분은 이들 중 대다수가 그 호흡과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는 데 실패한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타자를 주체의 시선으로 쉽게 재현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타자를 어떤 식으로든 영화적 활동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영화적 야심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이들은 사회의 구석으로 내몰린 타자를 분노로 활동하게 할 영화적 사건, 즉 폭력이 연루된 상투적이고 작위적인 사건들을 개입시키는 타협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사실주의적 태도를 고수하던 영화에 불쑥 장르적 클라이맥스가 침입한 것처럼 보였던 이유일 것입니다. 영화가 끝내 접근할 수 없는 타자라는 현실의 구멍을 어쩔 수 없이 장르적으로 메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위의 단편들이 도식적인 구도 속에서 불안과 분노에 사로잡힐 때, 제가 장르적 욕망을 엿보았다면, 그건 앞에서 말한 독립장편영화들이 어느 순간 장르적 폭발을 용인하는 것과는 좀 다른 맥락에 있는 것 같습니다. 위의 단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 이들에게 애초 그것은 장르입니다. 리얼리티에 대면하는 이들의 영화적 태도는 장르입니다. 물론 장르적 욕망 자체가 쟁점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장르적 틀과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을 충돌시키며 영화 안에서 스스로를 부수고 세워가는 과정을 통해 구조와 형식을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장르적 틀을 세워두고 영화 밖으로 나온 다음, 그 틀을 비집고 나온 모호하고 돌출된 현실의 부분들을 쳐낸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장르적 쾌감에 반응하는 관객의 시선을 취해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쳐다보며 모양새를 다듬어가는 것 같습니다. 구체에서 시작해서 틀을 만들어가는 방향이 아니라, 추상에서 시작해서 구체를 삭제해가는 방향이라고 할까요? 사정이 그러하니 당연히 자신만의 영화적 리듬이 생길 리 없고, 왕따 영화 열편을 보면 열편 모두 동일한 전개방식과 캐릭터가 반복되는 겁니다.

매해 출품작들을 보다보면, 특정 영화의 문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화들 무리,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아류작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장르에 대한 매혹과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시선을 접합하려는 시도는 나홍진의 <추격자>가 성공을 거둔 뒤, 지금까지도 계속 쏟아지고 있습니다. 윤성현의 <파수꾼>이 이슈를 몰고 온 뒤에는 고등학교 남학생들의 성장담(물론 학교 폭력과 왕따 문제, 자살과 같은 소재들을 포함합니다)에 대한 영화가 유독 많이 보입니다. 단지 소재적인 차원이 아니라, 특정 장면의 구도, 서사의 진행방식, 캐릭터의 구성 등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왜 그런 앵글과 롱테이크와 핸드헬드를 써야 하는지, 왜 그런 플래시백이, 왜 그런 숏의 배치가 필요한지 고민한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그건 결국 자신이 다루는 대상의 심정과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로, 궁극에는 왜 이 영화를 만드는가, 라는 질문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고민일 텐데 말이지요. 포스트 <추격자>와 포스트 <파수꾼>을 꿈꾸는, 아니 어쩌면 포스트 나홍진과 윤성현을 동경하는 영화들 무리를 보면서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이 영화들의 무엇이 20대 청년 감독들을 매료하는 걸까요, 충무로 중심으로의 성공적인 입성일까요, 아니, 이들의 장르적 욕망은 앞서 성공한 장르에 대한 모방의 욕망,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이런 암울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저를 근심에 빠뜨린 경향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영화들이 폭력을 다룰 때, 스스로를 어느 위치에 놓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컨대 극단적 가학과 피학을 형상화하는 가운데, 정작 영화 자신이 그 폭력의 작동과정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무심하다는 겁니다. 이때, 문제는 영화가 그 폭력의 메커니즘을 객관적인 3인칭의 시점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스스로를 구경꾼의 위치에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경꾼의 시선은 타자의 고통받는 육체와 타자로부터 되돌아오는 응시에 의해 흔들리거나 균열되는 대신, 그 타자로부터 거리를 둔, 좀 과장하자면, 그 광경을 그저 ‘영화’로 보는 시선입니다. 영화가 영화 속 인물들과 실은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는 건 앞서도 말했듯, 이들의 장르적 틀이 실은 중층적인 현실의 침입을 가로막는 환상의 울타리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럴 때, 가해자와 피해자는 전형적이고 이미 완성된 이미지로 덩그러니 놓여 무의미한 폭력의 연쇄 안에 게임의 말처럼 존재하게 됩니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비극적인 현실을 다룬 대다수의 영화들은 죽음이라는 파국으로 끝을 맺곤 했습니다. 그 죽음은 현실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서사를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마무리짓기 위한 무책임하고 퇴행적인 선택이거나 세계에 대한 무기력한 비관으로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이와 비교해, 올해 본 영화들의 결말은 좀 달라 보입니다. 선택을 미루거나 선택의 불가능성을 호소하는 결말들이 눈에 띕니다. 왜 여기서 끝내는 걸까, 반문하게 만드는 결말들 말입니다. 이 결말들은 더 나빠지고 있는 자신과 더 나빠지고 있는 현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악순환의 한가운데서 미련없이 정지해버리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죽음보다는 긍정적인 결론일까요? 그래도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호소일까요? 안타깝게도 저는 그렇게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미 클라이맥스의 장르적 쾌감, 갈등의 고조를 맞본 구경꾼들에게 이야기가 어디서 끝나는지의 문제는 부차적인 관심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성급하게 끝내버리는 영화만큼이나 멈춰도 되는 순간, 혹은 멈춰야만 하는 순간을 찾는 데 고심하지 않는 영화를 저는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규정 아닌 이해를, 판단 아닌 노력을

물론 이 편지를 읽으며 이런 반문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현실이 이토록 힘에 겨운데, 영화가 그 현실보다 어떻게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게 떠오른 두분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영화는 꼭 삶과 같은 게 아니에요. 그럴 거면 영화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을 모방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지요”라고 장률 감독은 정성일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단호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황폐한 현실을 예민하게 응시하는 감독의 이러한 대답은 세계를 복제하지 말고 감각하라는 호소로 들렸습니다. “세계의 어떤 부재가 세계의 이미지들의 현존을 훗날 요청하는 것일까?”라고 영화평론가 세르주 다네는 물었고 저는 그의 비평적 궤적이 결국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와 세계, 이미지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이 말들이 저에게도 여전히 쉽게 풀리지 않는 질문으로 남아 있지만, 지금으로서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우리에게는 피폐한 현실이 있겠죠, 그리고 그 현실에 대한 꿈으로서, 욕망으로서, 기억으로서, 마음으로서의 영화, 그러니까 또 하나의 현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두 현실이 겹쳐지고 서로를 밀어내는 과정에서 ‘나’의 변화를 보는 것,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을 보고 그 세계의 마음을 짐작하기 위해 애쓰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영화와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라고 말입니다. 추상적인 이야기로 들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앞서도 말했듯, 평론가로서 저에게는 미리 상정된 답 같은 건 없습니다. 감독님들이 만드는 구체적인 영화적 순간들만이 제게는 또 다른 질문으로 나아가게 하는 답이 될 테니까요.

올해 수백편의 작품들을 보고, 또 이 편지를 쓰면서 저는 결국 영화가 중요한 건 인간을 규정하는 판단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 때문이라는 근본적인 깨달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영화로 분노하는 일보다 영화로 분노의 틈에서 삶의 생기를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껴안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도 새삼 느낍니다. 우리의 세계에 카메라가 들어서는 순간, 우리가 함께 보지 못한 것과 본 것, 당신은 보았는데 저는 보지 못한 것, 저는 보았는데 당신이 보지 못한 것을 나누는 과정이 결국 감독과 평론가, 나아가 영화와 비평의 관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디 이 긴 글이 결국은 그 관계를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는 어느 평론가의 편지로 읽혔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비평을 읽지 않는다거나 자본의 공세 속에서 독립영화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세간의 호들갑은 어제도 우리를 흔들었고, 오늘도 우리 곁에 있으며, 내일도 들려올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의 시기를 살면서 그 위기를 몸소 겪지 않는 예술을 과연 우리가 원하는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요? 그러니 저는 내년에도 이 편지에 대한 영화적 답장을 다시 한번 기다리겠다고,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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