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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스토리-텔링]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신형철 2013-07-03

<러스트 앤 본>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다시 보게 하고 사랑의 논리학을 생각하게 하다

<러스트 앤 본>

잭 스나이더 감독의 <맨 오브 스틸>에서 영웅과 악당은 끊임없이 싸우고 부수고 절규하지만 거기에서는 아무런 심리적/육체적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특히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의 액션을 구경하는 일은 마치 무성영화에 나오는 수다쟁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길고 긴 클라이맥스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가 저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본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러스트 앤 본>을 다시 떠올렸고, ‘영화와 육체’가 중요한 주제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미 발표된 남다은의 좋은 글(<씨네21> 907호)이 있는데, 남다은은 <러스트 앤 본>이 경험하게 한 “육체적 전이” 현상이 이 영화의 서사구조에 힘입은 것은 아니라고 했고 그의 말은 옳아 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다른 각도에서라면 더 이야기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이 영화는 평생 한번도 특정한 어떤 말을 해본 적이 없어 보이는 남자가 바로 그 말을 하게 되면서 끝나는데 그 말은 바로 “사랑해”이다.

결여의 발견으로서의 응답

문제는 이것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드물다는 것. 대개는 먼저 사랑을 시작하는 한 사람이 있고, 그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를 요구받는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사랑(넓은 의미에서 관계의 논리학)을 탐구하려면 두개의 물음을 따로 물어야 한다. 도대체 어떤 구조 속에서 A는 B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그리고 어떤 조건이 갖춰질 때 B는 A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이 두 물음 중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후자다. 왜냐하면 내가 어쩌다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라는 물음은, 내가 너와 ‘이미’ 사랑에 빠진 이후에 던져지는 한에서는, 물음으로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근본적으로 동어반복에 가까워지고 말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은 네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놀라운 것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상황 혹은 조건 속에서만 타인의 사랑에 기꺼이 응답하는가?’

신선한 인용은 못되겠지만 역시 스피노자가 유용할 것이다. <에티카> 3부의 ‘정리 41’과 ‘주석’을 (편의상) 합쳐 정리하면 이렇다.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고, 또 그가 자신이 그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만한 타당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부심을 느끼며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되, 그가 그 사랑에 어떤 원인도 제공한 바가 없다고 믿는 경우, 그는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Ethics, Penguin, 1996, p.92) 스피노자는 ‘나는 너를 사랑해’가 상대방에게서 끌어낼 수 있을 두 가지 결과를 말한다. 사랑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 자신은 확실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응, 나도 나를 사랑해.” 과연 그럴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 역시 옳은가? 타인의 과분한 호의에는 나 역시 호의로 응답하게 된다는 정도의 얘기라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그가 필연적으로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될 거라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스피노자의 두 번째 설명은 언뜻 논리의 비약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지금 결과를 확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한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본다면 받아들일 여지가 생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이 너의 “자부심”만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응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조건’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복잡할 것이고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은 우리의 몫이다. 나는 <러스트 앤 본>이 스피노자의 문장에 적절한 주석을 달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자주인공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사랑해”는 사실상 스테파니(마리온 코티아르)의 사랑에 대한 그의 응답이었다. 도무지 응답할 것 같지 않던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는 영화의 끝에 이르러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어쩌면 알리 자신의 예상마저 뒤엎고) 스테파니에게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의 설명에 빠져 있는 고리 하나를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당겨 말하면, 그 고리는 ‘나’라는 존재 내부의 ‘결여’와 관련돼 있다.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사랑은 질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 질문과 더불어 내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서서히, 어떤 일이 벌어진다. 그 일은 스피노자가 말한 두 가지 방향을 따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커지거나 작아진다. 내 안에 비어 있다 생각한 부분이 채워지면서 커지거나, 채워져 있다 생각한 부분이 사실은 비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작아지거나. 후자의 변화,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아래에서 <러스트 앤 본>을 통해 알게 되겠지만, 내가 내부의 결여를 인지하는 데에는 나를 둘러싼 외적 조건들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외적 조건들의 퍼즐이 때마침 어떤 조합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는 거의 우연에 속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랑의 논리학도 결과를 확언할 수 있는 정도로까지 정교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우연을 다 통제할 수는 없으므로.

츠네오와 조제의 경우

<러스트 앤 본>을 보고 위와 같은 궁리들을 하다가 10년 전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하 <조제>, 2003)을 떠올렸다. 두 영화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는데, 여자의 다리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어디 하나 건강하지 않은 데라고는 없어 보이는 츠네오(쓰마부키 사토시)가 몸이 불편하고 성격이 내성적인 조제(이케와키 지즈루)에게 다가갈 때 그가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은 호기심과 동정과 사랑 사이에서 애매해 보이는데, 이 애매함을 견딜 수 없게 된 조제는 츠네오에게 출입금지를 선언하고 둘의 관계는 일단락되지만, 조제의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츠네오는 다시 조제를 찾아간다. 이때도 츠네오의 감정이 분명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츠네오는 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고뇌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이 ‘타인의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총 세명의 여자와 육체적 접촉을 할 때 그의 표정에는 의미있는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진단이 츠네오에 대한 비난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발로인지 혹은 타인의 마음을 상대로 한 분별없는 유희인지는, 츠네오라는 ‘기쁨의 원인’과 관계를 맺고 모종의 변화를 경험한 당사자들만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조제는 어떤 변화를 겪었나. 츠네오와 재회한 이후 첫 번째 외출에서 조제는 호랑이를 보러가자고 말한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것을 보고 싶었어.” 그녀는 이제 세상(호랑이)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행복한 시간이 흐른 뒤 둘은 불안한 여행을 떠난다. 둘 사이에 생겨나기 시작한 파열을 봉합하려던 것이었으나 상황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통과했다고 느낀 두 사람은 이것이 이별여행이 될 것임을 예감한다. ‘물고기 여관’에서 제의와도 같은 마지막 섹스를 하고 조제는 자신이 해저에서 헤엄쳐 나온 (다리가 없는) 물고기와 같으며 츠네오가 떠나더라도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다독인다. 호랑이와 물고기 사이에서, 둘의 짧은 관계는 끝난다.

냉정하게 말해야 하리라. 츠네오는 한번도 조제를 사랑한 적이 없을 것이다(최소한 지금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의미의 ‘사랑’은 아니었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므로 츠네오에게 버려진 카나에(우에노 주리)가 조제를 찾아가 했던 말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다. “너를 혼자 둘 수 없다고, 지켜줄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츠네오가 말하는데 웃기더라. 당연하지. 걔는 그렇게 착한 애가 아니거든. 솔직히 네 무기가 부럽다.” 카나에는 부정하고 싶었겠지만 츠네오의 말은 진심이다. 카나에가 경쟁자인 조제를 이길 수 없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츠네오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제는 어떤가. 츠네오의 감정을 사랑이라 믿고 싶어 하지만 그녀 역시도 카나에의 독설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조제는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더 독한 진실을 내뱉고 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 조제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의 무기가 더이상 무기가 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예컨대 츠네오가, 이제는 휠체어를 사는 게 어때, 라고 말하는 상황 같은 것. 실제로 그런 상황이 오자 조제는 단호히 거절하면서 점점 더 어린아이가 되어간다.

요점은 이 영화에서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츠네오가 아니라 조제라는 것이고, 츠네오가 어떤 답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서사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 뒤로 우린 몇달을 더 살았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 단 하나의 이유만이 있었을 뿐이다. 내가, 도망쳤다.” 츠네오의 대답은 결국 ‘나도 나를 사랑해’가 되고 말았다. 츠네오가 조제를 사랑하는 데 성공할 수 있으려면 조제의 결여(다리)만큼의 결여를 제 안에서 발견했어야 했다. 그러나 츠네오는 실패했다. 예나 지금이나 츠네오에게는 ‘없음’이 너무 없는 것이다. 조제의 집을 떠나며 츠네오가 한발 늦게 오열하는 장면이 그토록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것이 죄지은 자의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실패한 자의 통한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죄가 아닌 실패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조제가 츠네오를 비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를 비난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는 비난하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더 분명해지는 것이지만, 그녀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였기 때문이다. 조제는 성공했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아름다운 힘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알리와 스테파니의 경우

혹자는 조제가 장애인이므로 이 영화가 사랑의 일반논리학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같은 논리가 <러스트 앤 본>에도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반대라고 말해야 한다. 이 특수한 상황이 오히려 사랑의 일반 논리를 더 또렷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장애’라는 요소는 사랑의 논리학에서 결정적인 요소인 ‘결여’의 은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영화에서 여자의 육체적 장애는, 여자쪽에 있는 너무도 명백한 결여 때문에 남자가 자신에게는 결여가 없다고 믿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딱히 둘 중 어느 한 사람에게 육체적 장애가 있지 않은 경우에도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결여의 불균형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더 명백히 보여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여주인공의 다리에만 있지 않다. <조제>가 츠네오의 눈물로 끝이 났듯이 <러스트 앤 본>의 종장(終章)을 쓰는 것도 남자주인공 알리의 눈물이다. 그러나 이 공통점은 사실 차이점이다. 츠네오의 눈물과 알리의 눈물은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알리는 먹고 섹스하고 싸우고 잔다. 그에게는 ‘자기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는 대체로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한 일에 대해서는 생각 자체를 포기해 버리는 종류의 사내이므로 어느 날 갑자기 다리가 잘린 채 나타난 스테파니 앞에서도 그의 태도는 여일하다. 비극적 사건을 겪은 스테파니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모두가 그녀의 눈치를 볼 때, 알리는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스테파니에게도 그 일을 하기를 권한다. “난 물에 들어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리에게 스테파니와의 섹스는 그녀와 함께한 수영과 특별히 다른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스테파니가 그 섹스에 부여하는 의미가 얼마나 크건, 알리는 기본적으로 육체적 행위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생각나면 ‘출장’ 오라고 해요.” 그의 말마따나 “출장”에 무슨 정신적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할 수 있기 때문에, 한다. 놀라운 아이러니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의 이런 태도가 스테파니를 구원하기 시작한다. 기본적인 신뢰가 갖춰져 있는 조건하에서라면, 타인의 결여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테파니의 오해는 불가피하다. 그녀는 알리의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그다운 방식으로 섬세하게 계산된 사랑일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리는, 스테파니가 처음으로 ‘나는 너를 사랑해’를 뜻하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발신했을 때, ‘지금 출장 가능!’ 운운하며 스테파니를 좌절에 빠뜨린다. 심지어 그가 사쪽의 부당한 노동자 감시 활동에 애매하게 가담한 것이 발각되면서 아들마저 남겨두고 도망치듯 떠나야 했을 때 그는 스테파니에게조차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내가 불과 15분 뒤에 그녀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려면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하는가. 아들 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자신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얼음이 깨지면서 샘이 물에 빠져야 하고, 샘을 구하기 위해 얼음을 깨느라 그의 주먹의 뼈가 다 바스러져야 하며, 혼수상태의 아들이 깨어나기를 세 시간 동안 기다리면서 그동안 자신에게 한번도 구체적인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절감해야 하고, 그리하여 강철 주먹 같다고 여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스테파니의 다리가 잘리면서 시작되고 알리의 주먹이 박살나면서 끝나는 영화다. 츠네오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알리에게는 일어난 이 극적인 사건 때문에, 츠네오가 흘린 눈물과는 다른 종류의 눈물을 흘리면서, 알리는 비로소 스테파니에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랑해.” 그는 그저 “사랑해”라고 말했을 뿐이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 말은 “나도 너를 사랑해”를 줄인 말이다. 츠네오가 실패한 지점에서 알리는 성공했다. 츠네오가 끝내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결여를 알리는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발견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영화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손가락뼈는 몸의 다른 뼈와는 달리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그의 손은 앞으로도 계속 그에게 통증을 느끼게 할 것이고, 더 거대한 결여의 가능성을 상기하게 할 것이고, 스테파니에게 매번 다시 응답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없음은 없어질 수 없으므로

사랑에 대한 글은 이제는 읽기도 쓰기도 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이 실은 본능, 충동, 욕망 등의 변장일 뿐이라고 단정하며 짐짓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성숙하다고 믿는 미성숙한 소년들을 뿌듯하게 만들기는 하겠으나, 그것은 사랑에 대한 온갖 미신과 기만을 재생산하는 담론들 속에서 달콤하게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태도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이 지면에서 이미 “사랑은 전칭명제로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개별적인 사례로(만) 존재한다”(‘죽일 만큼 사랑해’, <씨네21> 887호)라고 말한 처지에, 다시 사랑에 대해 말해버렸다. 이제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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