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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이상한 에덴의 엘리스
신형철 2014-01-03

어째서 <머드>는 <테이크 쉘터>의 속편인가?

최근 1~2년 동안 본 영화의 감독들 중에서 차기작을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를 셋 꼽으라면 <케빈에 대하여>(2011)의 린 램지, <셰임>(2011)의 스티브 맥퀸, <테이크 쉘터>(2011)의 제프 니콜스라고 대답하고 싶다. 이중 제프 니콜스의 신작 <머드>를 보았다. (린 램지는 신작을 찍으려다 만 것 같고, 스티브 맥퀸의 신작 <12 Years a Slave>는 내년 봄에 개봉 예정인 모양이다.) 언뜻 <머드>는 전작과는 꽤 다른 영화처럼 보인다. 전작이 삼십대 남성의 불안 망상을 다룬 일종의 심리스릴러라면, 이번 영화는 소년의 모험을 그린 고전적 성장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보면 <머드>는 곱씹어볼 대목이 많지 않은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텍스트에는 표층주제와 심층주제가 있을 수 있는데, <머드>의 심층주제라고 할 만한 것은 <테이크 쉘터>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며, 그런 의미에서 전자는 후자의 은밀한 속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머드>가 머리가 멍해지는 걸작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두 영화를 다 본 분들과 이 점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서다.

위대한 유산, 2013 - 성장의 서사로서의 <머드>

일단은 성장담으로서의 <머드>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제프 니콜스 감독은 <머드>의 이야기에 영감을 준 작가로 <톰 소여의 모험>(1876)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의 저자 마크 트웨인을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지만, <머드>의 기본 설정은 사실상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의 그것을 요령 있게 재활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대한 유산>의 도입부(1~6장)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의 집에 얹혀사는 ‘핍’은 누나의 거센 구박을 천진하게 참아내며 살아가는 소년이다. 핍은 어느 날 교회 묘지를 배회하다가 선상(船上) 감옥에서 막 탈출해 육지에 상륙한 죄수(‘매그위치’)를 만난다. 그는 어린아이에게 먹힐 만한 전형적인 어법으로 핍을 위협해 줄칼과 음식을 몰래 갖다 주길 요구하는데, 핍은 공포에 질리기도 했거니와 그가 아무리 죄인이라 해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는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아서 그를 돕는다. 결국 탈옥수는 발각되어 다시 끌려가지만 이 사건은 장차 핍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에피소드가 된다.

이상의 설정에는 청소년 성장담의 기본 문법이 내장돼 있다. 첫째, 가족의 불화. 어린아이에게는 세계의 전부나 마찬가지일 가족 내부에 불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이가 외부 세계(공간적으로는 낯선 지역, 시간적으로는 성인의 삶)의 다양한 가능성에 눈길을 돌릴 만한 동력으로 작동한다. 둘째, 강이라는 배경. 육지 교통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강은 지역 공동체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타자가 유입될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셋째, 타자의 출현. 외부 세계의 낯선 가능성을 표상하는 존재(이를테면 다른 곳에서 온 도망자들)와의 갑작스런 만남이 소년을 모험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넷째, 모험. 타자의 유혹 혹은 강요로 소년은 가족이나 이웃과의 협의 없이 독자적인 판단과 행동을 감행한다. 이와 같은 모험이 아이를 실제로 낯선 시공간에 내던질 수도 있지만, 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하면서 아이가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죄의식을 느끼게 되면 그것 자체가 이미 아이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일(이를테면 ‘내면의 발견’이라 부를 만한 사건)이기도 할 것이다.

<머드>는 위에서 정리한 <위대한 유산>의 도입부 설정들을 취해 이를 장편 시나리오의 골격으로 확대하면서 거기에 고유한 디테일을 부여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열네 살 소년 엘리스(Ellis)가 살고 있는 동네는 강 인근에 형성돼 있는 수상(水上) 가옥 촌이다. 엘리스의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은데 특히 최근 들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소년의 마음은 어지럽다. 엘리스에게는 의리 있는 단짝 친구 넥본이 있고 그 소년은 강 깊은 곳에서 해산물을 캐는 삼촌과 단둘이 살고 있다. 어느 날 두 소년이 배를 타고 가야 도착할 수 있는 무인도에 용감히 상륙한 것은, 태풍에 휩쓸려 날아와 나무 꼭대기에 꽂혀 버린, 임자 없는 보트를 접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섬은 무인도가 아니었고 소년들은 거기서 한 사내를 만난다. 거지꼴을 하고 있는데다가 거동이 수상한 그 사내를 넥본은 꺼림칙해 하지만 엘리스는 다르다. 자신을 머드(Mud)라 불러달라고 말하는 그 사내가 자신이 이곳에 숨어 있는 이유는 사랑하는 여자 주니퍼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괴롭힌 악당을 살해했기 때문이라고 밝히자 엘리스는 그에게 매혹되기 시작한다.

<위대한 유산>의 탈옥수가 그러했듯이 <머드>의 도망자도 소년들에게 은밀한 도움을 요청한다. (물론 전자는 일방적인 관계였고 후자는 상호 신뢰의 관계라는 점이 엄연히 다르지만, 이 차이는, 타자와의 조우가 소년(들)을 어딘가로 데려간다는 공통점에 비하면 덜 중요하다.) 머드가 요청한 것은 두 가지다. 자신과 주니퍼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해줄 것, 그리고 주니퍼와 함께 떠나기 위해서는 무인도에 버려진 보트를 수리해야 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부품들을 조달해줄 것. 이 일은 <위대한 유산>의 경우보다 훨씬 더 위험한데, 머드가 살해한 악당의 아비와 그가 고용한 전문 킬러들이 머드를 잡기 위해 근처에 진을 치고 있는 터라 자칫 두 소년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악조건은 엘리스의 기를 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돋운다. 그는 머드의 영웅적인 사랑이 행복한 결말을 성취해야만 엘리스 자신의 문제들이 해결되기라도 할 듯이 그 일에 몰두한다. 그리고 엘리스의 그와 같은 헌신은 (<위대한 유산>의 경우와는 달리) 불과 며칠 만에 그에게 ‘성숙’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선사할 것이었다.

해독된 사랑의 미소 - 불안의 서사로서의 <머드>

엘리스는 왜 그토록 머드에게 집착하는가. 이 소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감독의 전작 <테이크 쉘터>의 주인공 ‘커티스’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테이크 쉘터>에 대해 쓰면서 나는 종말에 대한 망상에 시달리며 방공호를 만드는 사내의 이야기인 이 영화를 ‘금융 대란 이후 미국 중산층의 불안’을 그린 영화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다고 했었다. 이 영화가 무엇보다도 유년기에 겪었던 가족 해체의 비극이 성인이 되어 자신이 꾸린 가정에서 반복될까봐 불안해하는 어느 가장의 이야기라는 것 말이다. 커티스가 유년 시절에 겪은 일을 지금 엘리스가 겪으려는 참이다. 엘리스의 엄마는 지긋지긋한 삶을 바꾸고 싶어 하며 그러기 위해서 엘리스의 아빠에게 이혼을 요구한 상태다. 그들이 이혼하면 엄마의 명의로 돼 있는 수상가옥은 강 관리국에 의해 철거된다. <테이크 쉘터>에서 토네이도가 집을 날려버릴 수도 있었던 것처럼 <머드>에서는 엘리스의 집이 강물 속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상황이다. 요컨대 제프 니콜스 감독은 이 두 영화에서 ‘가족 해체에 대한 불안’이라는 심층주제를 반복한다.

자, 문제는 ‘집’을 지키는 것이다. <테이크 쉘터>가 house를 지켜야 home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머드>의 경우는 home을 지켜야 house를 지킬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home을 지키기 위해서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지켜야 한다. 결국 문제는 사랑이다. 엘리스는 아빠를 떠나려 하는 엄마가 원망스럽고 엄마를 곁에 두는 데 무능력한 아빠가 답답하다. 그들은 사랑의 실패자들이다. 그러니 엘리스에게 머드가 단숨에 위대한 사랑의 영웅으로 옹립된 것은 자연스럽다. 넥본이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도 몰라”라고 힐난하듯 말하자 엘리스는 간명하게 답한다. “그는 주니퍼를 사랑해.” 엘리스에게 머드는 여자를 (더 나아가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남자다. 이것은 엘리스가 제 아빠에게서 기대하는 모습이고 엘리스 스스로 되고 싶어 하는 남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엘리스는 ‘머드와 주니퍼의 서사’를 가장 바람직한 사랑의 서사로 격상시켜서 그것을 기준으로 ‘아빠와 엄마의 서사’와 ‘자신과 여자친구(‘펄’)의 서사’를 평가한다. 머드-주니퍼의 사랑은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속성을 갖는 일종의 판타지가 되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요인이 보조를 맞추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바로 머드라는 사내가 갖고 있는 대책 없는 ‘소년성’이다. 이 영화는 머드의 소년성을 그가 신봉하고 또 떠벌리기 좋아하는 갖가지 미신들(문신, 셔츠, 구두 밑창 십자가, 액땜 용 캠프파이어 등등)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머드가 어렸을 적 뱀에 물린 자신을 구해준 주니퍼에게 성인이 될 때까지 사랑을 바치고 있다는 것은, 엘리스에게는 숭고한 순애보로 보일 일이겠으나, 유년 시절 이래로 머드가 정신적으로는 거의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엘리스를 사로잡은 머드의 이 소년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엘리스가 머드에게 결국 환멸을 느끼는 요인이 된다. 머드의 소년성을 견디지 못한 주니퍼가 사랑의 서사에서 이탈하고 머드 역시 이를 무기력하게 수락해 버리자 엘리스는 극도의 배신감을 느끼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고 급기야 뱀에 물려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를 통해 이 영화의 세 남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은 곳(엘리스의 집)에 모이면서 동시다발적인 해결에 이른다.

어째서 ‘해결’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영화의 세 남자(머드, 엘리스의 아빠, 그리고 엘리스)는 결국 모두 사랑에 관한 한 미숙한 소년이라고 할 만한 여지가 있는데 이들이 모두 일정한 자기 결론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머드는 주니퍼를 향한 맹목적인 애착에서 벗어나 드넓은 삶의 ‘바다’로 나아갔고, 아빠는 엄마의 욕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녀를 시내로 떠나보낼 수 있게 됐다. 엘리스는? 온몸에 독이 퍼져 있다가 깨어난 그에게 머드가 말한다. “넌 멋진 남자야, 엘리스.” 머드는 영화의 초반부에서와는 달리 엘리스를 ‘꼬마’(boy)가 아니라 ‘남자’(man)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엘리스의 해독(解毒)은 그의 통과의례였던 셈이다. 그에게 침투했다가 빠져나간 독은 무엇인가. 소년은 이제 사랑에 대한 판타지(독)에서 벗어난 것일 터다. 어떤 감정의 순수한 원형 혹은 완벽한 전형이 존재한다는 생각이야말로 판타지의 핵심이다. 판타지는 현실을 혐오하게 만든다. 사랑의 판타지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사랑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엘리스의 한결 가벼워진 미소를 ‘해독된 사랑의 미소’라고 부르면 어떨까.

에덴에서 보낸 며칠 - <머드>의 상징체계

이와 같이 요약될 이 영화의 서사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품고 있는 입체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아쉬움을 메우는 것이 이 영화의 몇몇 상징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소년의 성장통을 외면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서사와 이미지들이 늘 너무 거창하거나 거창하려 해서 앙상해지고 만 영화가 됐다.”(이후경, 씨네21, 931호)는 부정적인 견해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런 반응이 나올만한 여지는 분명히 있다. ‘거창하되 앙상하다’는 것은 심오한 상징을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이 소년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모든 장소에 엘리스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엘리스가 나오지 않는 장면도 마치 엘리스의 머릿속에서 상영 중인 장면처럼 보이도록 찍은 것은 아닌가 싶다는 뜻이다. 예컨대 머드를 처치하기 위해 마을에 모여 있는 킬러들의 회합 장면 같은 것이 그렇다. 그들이 모여 앉아 기도를 하는 모습은 무섭다기보다는 우스꽝스럽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엘리스의 눈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 장면을 마크 트웨인이나 찰스 디킨스가 글로 썼다면 어린아이 관찰자의 시점으로 과장되고 익살맞게 쓰지 않았을까.

아이의 상상이 심각해질수록 어른에게는 귀여워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영화의 상징들이 ‘거창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엘리스 자체가 사물들을 필요 이상으로 ‘거창하게’ 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상징들을 지나치게 심각한 방식으로 해석하면 역효과가 발생할 테지만 적당한 선을 지킨다면 해석의 재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상징은 배(보트)일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를 사로잡고 있는 정서는 집(가정)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인데 그런 맥락에서 ‘배’는 ‘집’과 가까이 있는 상징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본다면, 엘리스가 살고 있는 ‘물 위에 떠 있는, 배 같은 집’과 머드가 살고 있는 ‘나무 위에 걸려 있는, 집 같은 배’ 사이에 거울 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서사는 ‘물 위에 떠 있는, 배 같은 집’이 철거되기 전에(즉,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기 전에) ‘나무 위에 걸려 있는, 집 같은 배’가 바다를 향해 나가야 한다는(즉, 머드가 주니퍼를 구출해야 한다는) 상징적 요청 위에 구축돼 있다.

한편 머드가 살고 있는 섬에 상륙하는 순간 엘리스(Ellis)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비슷한 이름의 소녀 앨리스(Alice) 못지않게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 섬은 마치 불완전한 에덴처럼 보인다. 톰의 증언에 따르면 머드는 어렸을 때 그 섬에서 자랐다. 이상하게도 머드의 신상 정보는 더 이상 제시되지 않는다. 그의 친부모는 누구인지, 그가 왜 외딴 섬에서 자랐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마치 그가 진흙(Mud)에서 빚어진 아담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섬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 중에서 머드를 제외하면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웅덩이에서 무리지어 살고 있는 뱀들뿐이다. 알다시피 창세기에서 뱀은 결과적으로 부부 관계를 위기 상황에 빠뜨린 동물이다. 요컨대 이 섬은 아담과 뱀만 있고 이브는 없는, 그런 의미에서 불완전한 에덴이다. 그렇다면 이 상징체계들은, 진실은 엘리스가 믿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누설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스는 머드와 주니퍼에게서 사랑의 숭고한 원형을 보고 있지만(태초의 에덴), 실제로 이 섬은 아담과 이브의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섬이니까 말이다(타락한 에덴). 그러니까 어린 엘리스의 문제는 에덴 이래로 세상의 모든 사랑의 관계에는 언제나 뱀이라는 제3자가 있다는 사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뱀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는 ‘완벽한’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뱀을 다스리는 ‘성숙한’ 사랑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데 있다. 그런 그가 에덴의 타락상을 뒤늦게 깨닫고 지독한 환멸에 빠지는 순간 뱀에 물리고 마는 것은 상징의 논리로 볼 때 필연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머드를 놓고 대결하는 두 노인도 흥미롭다. 머드를 죽이기 위해 죽음의 사자를 풀어놓은 ‘킹’은 극중에서 “살아 있는 사탄”이라 불린다. 한편 머드의 허풍을 (아담의 일탈을 못마땅해 하는 하느님처럼) 못마땅해 하면서도 끝내 머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드는 머드의 유사-아버지 톰이 있다. 이 두 노인의 싸움은 에덴을 놓고 벌이는 야훼와 사탄의 싸움처럼 보이기도 한다. 야훼와 사탄이라니, 너무 심각하지 않은가. 그러나 아이는, 선에도 악이 있고 악에도 선이 있다는 것, 그래서 선과 악이 언제나 명쾌하게 분별되지 않는 것이 어른들의 세계라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싸움은 언제나 순수한 선과 자명한 악의 싸움이며 그 결말은 언제나 선의 승리여야만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세상의 모든 싸움은 언제나 야훼와 사탄의 대리자들이 벌이는 싸움처럼 느껴지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에는 마크 트웨인과 찰스 디킨스가 아이들을 초점화자로 설정하고 글을 써나갈 때 생겨나는 어린아이다운 심각함이 있으며, 엘리스의 눈높이로 그 ‘심각한’ 상징들을 해석해 보는 것은 이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일 것이라는 얘기다.

건져야 할 것과 보내야 할 것 - <테이크 쉘터>가 <머드>에게

글을 마무리 하면서 한 마디. 제프 니콜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양적으로 비중이 높지 않지만 꽤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풍기는 ‘넥본의 삼촌’ 역할을 <테이크 쉘터>에서 주인공을 연기했던 마이클 섀넌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재미있는 선택이다. 앞에서 나는 <머드>의 엘리스가 <테이크 쉘터>의 커티스의 유년 시절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는데, 이 발상을 계속 밀고 나간다면, 넥본의 삼촌이 엘리스에게 들려주는 다음 대사는 어쩌면 미래의 가장(커티스)이 과거의 소년(엘리스)에게 건네는 충고로 읽히기도 한다. “강에는 많은 것들이 떠내려 오지. 떠나보내야 할 것과 건져내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해.” 중반부에 나오는 이 대사는, 영화 도입부에 그와 사랑을 나누다 말고 집을 뛰쳐나가는 여성을 그가 느긋하게 ‘떠나보내는’ 장면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또 영화 말미에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머드를 그가 강에서 ‘건져내는’ 장면을 미리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지혜로도 유용해 보인다. 사랑의 강에서 떠내려 오는 것들 중에서도 건져야 할 것과 흘려보내야 할 것들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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