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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그게 할리우드 현실이니까
오정연 2014-12-31

<맵 투 더 스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12월25일 국내개봉을 앞둔 <맵 투 더 스타>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21번째 장편영화이자, 그가 미국에서 촬영하는 첫 영화다. 야간 버스를 타고 할리우드에 입성한 소녀(미아 바시코프스카)는 작가 혹은 배우 지망생인 리무진 운전기사(로버트 패틴슨)에게 스타들의 집을 지도에 표시한 스타맵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묻는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을 포함하여 한물간 여배우(줄리언 무어), 최연소 약물중독 셀러브리티, 처세술 혹은 자기계발서 저자이자 강연자인 그의 아버지(존 쿠색) 등 과잉된 욕망 속에서 길을 잃은 등장인물 모두는 자신만의 지도가 필요하다. 할리우드에 첫발을 내딛었다는 면에서 소녀와 다르지 않은 크로넨버그는 별들이 그리는 추락의 궤적을 서늘한 차분함으로 그려냈다. 그가 지닌 빛나는 지도를 엿보고 싶어, 눈 오는 토론토로 화상 대화를 청했다.

-시나리오를 쓴 브루스 와그너와는 첫 작업이다. 원래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 함께 작업하게 된 계기는.

=이건 그가 20년 전 쓴 시나리오다. 1992년에 브루스의 소설을 읽고 친구가 됐는데 10년 전 어느 날 자기가 쓴 시나리오라면서 보여주었고 매우 마음에 들었지만 제작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가장 큰 장애물이 뭐였나.

=그간 주로 캐나다-유럽 공동제작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럴 경우 미국 작가를 고용할 수 없고, 미국 배우는 한명만 쓸 수 있고, 제 3국에서 제작비를 일정 규모 이상 사용해도 안 되는 등 제약 규정이 많다. 그간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많이 만들었지만 모두 캐나다에서 촬영했는데 이번에는 할리우드의 상징적인 장소인 할리우드 대로 등을 반드시 찍어야 했기 때문에 그런 규정을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결국 독일과도 공동제작을 진행하면서 제3국 작가를 고용하고 미국 촬영에 비용을 약간 더 지출할 수 있었다.

-20년 된 시나리오를 영화로 옮길 땐 어떤 식으로든 수정작업이 필요했을 텐데. 특히 할리우드나 셀러브리티문화도 많이 변했고.

=조금 다듬고 업데이트하는 정도였다. 주로 테크놀로지 부분이었는데 20년 전에는 휴대폰도, SNS도 없었으니까. 브루스 와그너가 LA에서 리무진 운전기사로 일한 경험이 많이 반영됐다던데. 그의 첫 소설 <불가항력>의 주인공이 할리우드의 리무진 운전기사다. <맵 투 더 스타>에서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인물 역시 모델은 브루스 자신이다. 그의 소설 대부분의 배경이 할리우드이며 그곳에서의 삶과 인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긴 하다.

-영화에 실존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빈번하게, 때론 민감한 스캔들까지 언급된다는 점이 놀라웠다. 실제 인물들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나.

=그런 것들 역시 우리가 20년의 시차와 관련해 업데이트했던 내용 중 하나였고,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명예를 훼손하거나 허위 사실을 말하거나 비방하는 것만 아니라면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브루스의 소설 <데드 스타즈>는 아예 등장인물 중 한명이 마이클 더글러스다. 그런 면에서 브루스는 배짱이 좋은 편이다.

-폴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가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된다.

=1992년에 출간된 <불가항력>에도 이 시가 나오는 걸 보면 이 시가 브루스의 머릿속에 늘 자리했던 것 같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 당시 쓰인 저항시로 그 시에서 말하는 자유란 나치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을 의미하지만 영화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 왜 그 시를 염두에 뒀는지는 직접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지만 시나리오에 시의 용법에 대해서는 언급해놓았다. (기자가 앉아 있는 뒤편에 걸린 포스터를 가리키며) 한국판 포스터에 등장하는 바로 저 장면, 애거서가 할리우드 대로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 직접 그 시를 읊지 않나.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는 설정인데 내가 집어넣었다. 여배우의 별을 내려다보면서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았는데,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자유를 갈망하면서 자신만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기를 쓴다는 면에서 의미가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특히 배우들이 저마다 그 시를 읊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영화 속 영화로 하바나의 엄마가 출연했던 영화 <스톨른워터> 속 장면들이 보여진다. 어떤 영화로 설정한 건가.

=브루스는 워런 비티와 진 세버그 주연의 <릴리스>같은 영화라고 시나리오에 밝혔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여자에게 그곳에서 일하던 한 청년이 매료되지만 여자는 정신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예쁘고 잘생긴 남녀 배우가 나오는 흑백 고전영화.

-시나리오를 읽은 뒤 배우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여러가지 이유로 배우들이 겁낼 수 있는 시나리오다. 특히 하바나는 캐스팅이 쉽지 않았다. 줄리언 무어보다 먼저 시나리오를 접한 배우도 있었지만 모두 두려워했다. 특히 화장실 장면 같은 건 무척 당혹스럽겠지. 하지만 줄리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아예 그 장면에 대한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

-예전 기사에서는 줄리언 무어와 존 쿠색이 연기한 하바나와 샌포드 역으로 비고 모르텐슨과 레이첼 바이즈가 언급되던데.

=그들이 물망에 올랐던 건 사실이다. 특히 비고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는데, 크랭크인 시점에서 비고가 다른 작품에 캐스팅되면서 존쿠색이 합류했다. 줄리언 무어한테도 8년 전에 뉴욕에 가서 직접 출연 제의를 했고 흔쾌히 승낙했었다. 8년 후에 전화로 ‘그 시나리오에 아직도 관심있나? 이제야 찍을 것 같다’고 했더니 여전히 하고 싶다고 했다.

-로버트 패틴슨와 두편의 영화에서 연달아 함께 작업하고 있다. 패틴슨이 비고 모르텐슨처럼 크로넨버그의 새 페르소나로 등극한 게 아니냐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착실하고 배려심 깊고 진실하고 재미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배역으로 캐스팅하지는 않는다. 단지 <코스모폴리스>에서 혼자서 많은 걸 짊어져야 하는 주인공이라 부담스러워 다음에는 많은 배우가 균등한 비중을 차지하는 앙상블 영화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고 기꺼이 참여하게 된 거다.

-할리우드를 어떻게 생각하나.

=이 영화에 관한 <르몽드>의 기사 헤드라인이 ‘나는 할리우드를 싫어하지 않는다’였다. 할리우드를 싫어해서 할리우드를 공격할 영화를 만들고 싶었냐고 묻는 프랑스 평론가도 있었다. 하지만 난 할리우드를 싫어하지 않는다. 할리우드에 살지도 않고 할리우드가 내게 잘못한 것도 없는걸. 스튜디오를 방문하거나 제작자들하고 여러 번 만나서 캐스팅이나 재정적인 문제에 관해 얘기를 해봤기 때문에 브루스의 시나리오가 상당히 정확하다는 걸 잘 안다. 브루스와 나는 이번 영화가 그저 현실을 다룰 뿐, 풍자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게 할리우드의 현실이니까. 영화에서 할리우드에 대한 분노나 비판이 느껴졌다면 전적으로 브루스한테서 나온 거다. 난 원래 영화에 관한 영화는 찍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브루스의 시나리오는 영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야망, 좌절, 자포자기, 돈, 광기 등 현실에 관한 얘기다. 월가나 실리콘밸리처럼 돈과 명예를 좇는 치열한 업계가 배경이라면 같은 얘기를 쓸 수 있을거다. 할리우드가 훨씬 더 극적이긴 하겠지만. 할리우드를 공격한 건 아니라는 말이다.

-할리우드 입성을 생각해본 적 없나.

=MGM에서 덴젤 워싱턴과 톰 크루즈가 내정된 영화를 만들자고 한 적이 있다. 두 배우를 만나기도 했고 각본도 썼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파이영화였고 촬영 자체는 유럽 등지에서 이뤄질 예정이었다. 스타도 출연하고 큰 예산의 영화였으니 첨단 장비도 많이 지원받을 수 있고 욕심이 났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장점은 또한 다른 걸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립영화를 만들 때는 내가 다 통제할 수가 있지 않나. 로버트 패틴슨이 <코스모폴리스>를 찍을 때 그러더라, 이런 건 처음 본다고.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감독이 모든 결정을 혼자서 다 내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거나 허락받는 일도 없는게 신기하다더라. 그래서 말했다. “이건 우리 영화니까. 우리가 만드는 거고 다른 사람은 없어. 이건 스튜디오영화가 아니야.” 많은 배우들이 나오고 예산 문제로 머리도 아프고 스튜디오 정책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그런 영화들이 아니란 뜻이다. 내 영화 중에 그런 영화에 가장 근접한 건 아마 뉴라인에서 제작한 스튜디오영화 <폭력의 역사>일 거다. 토론토에서 거의 독립영화처럼 촬영하긴 했지만.

-주류 할리우드영화를 만들지 않은 것은 본인의 스타일에 맞지 않아서라는 뜻인가.

=첫 영화를 찍기 전에는 영화를 찍으려면 할리우드에 가야 한다고 믿었다. 1970년대 캐나다는 영화산업이 빈곤했고 이반 라이트먼 등 토론토 출신 친구 중 몇은 할리우드에 가서 자리를 잡기도 했다. 만약 할리우드에서 감독일을 시작했다면 어떤 영화가 나왔을지 모르지만 지금과는 많이 달랐겠지. 이반 라이트먼과는 아직도 친한데 할리우드에 사는 걸 행복해한다. 그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가 할리우드 스타일이었고 금세 길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단지 나와는 맞지 않을뿐이다.

-지난 10년 동안 비교적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젠 영화를 만드는 게 조금은 쉬워졌다고 느끼나.

=절대 그렇지 않다. 항상 첫 영화를 찍는 것 같다. 물론 이쯤되면 표현 방법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를테면 단순한 스타일을 지향해서 카메라는 대부분 고정돼서 정적이다. 촬영할 때 이미 머릿속으로 편집을 해두기 때문에 편집에는 이틀밖에 안 걸렸다. 항상 함께 일하는 스탭들과 작업을 하다보니 서로 이해가 빠르고 함께 만들었던 영화가 많은 참고가 되기도 한다. 촬영은 1988년부터 함께한 피터 서스키츠키와, 편집은 35년간 내 영화를 편집한 사람과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쉬워졌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영화는 찍을 때마다 매번 힘들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재정적인 부분.

-그래도 잘 알려졌고 고정 팬이 있는 당신 같은 감독이라면 예산을 마련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덜 힘들지 않을까.

=심지어 마틴 스코시즈도 그러더라, 절대 쉽지 않다고. 당연히 무명 감독보다 쉽기야 하겠지. 내가 어떤 감독인지 알고 내 말에 일단 귀를 기울이긴 하니까. 하지만 요즘처럼 유가 파동이 한번 일어나면 다들 몸을 사리고 투자를 하지 않는 등 세계 경제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그뿐인가. 작은 영화들은 미국 배급사를 잡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다. <맵 투 더 스타>는 예술영화로 분류되는데 한때 미국에서 예술영화 붐이 인 시기가 있지만 지금은 보다시피 전혀 아니다. 수백만달러의 자본을 들인 블록버스터 <엑스맨> <슈퍼맨> 등 온갖 종류의 ‘맨’들만이 있을 뿐이다. <맵 투 더 스타> 같은 영화가 끼어들 틈이 없다. 감독의 이름은 그런 상황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소리다.

-2013년 말쯤의 인터뷰에서 첫 소설을 탈고 중이라고 했다. 무슨 소설인지 말해줄 수 있나.

=물론이다. (갑자기 자신의 뒤편 책장으로 향하며) 지금 보여줄 수도 있다. 제목은 <컨숨드>. (하드커버 책 표지를 카메라에 가까이 보여주면서 의기양양하게) 한번 펼쳐볼까? 봐라, 여기 작가 사진도 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모델로 한 프랑스 철학자 커플과 젊은 미국 기자 커플이 등장한다. 미국 커플이 살인 사건을 조사하면서 프랑스 커플과 엮인다. 독자 리뷰도 좋고 <뉴욕타임스>에서도 좋은 평을 들었다. 원래 어렸을 땐 소설가가 꿈이었다. 첫 소설이 나오기까지 50년이 흐른 셈이다. 첫 번째 소설은 21살쯤 내고 싶었는데 지금 71살이니. 현재 두 번째 소설을 집필 중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나 소설가를 꼽는다면.

=훌륭한 소설가들은 너무 많다. 어렸을 땐 윌리엄 버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뒤에 보이는 책들이 바로 윌리엄 버로스의 컬렉션이다. 비트 제너레이션 작가 잭 케루악과 앨런 긴즈버그도 좋아하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소설을 쓸 때는 역시 작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 처음 집필을 시작했을 때는 내 목소리가 어떨지 나도 몰랐는데 작업을 해나가면서 찾을 수 있었다.

-소설가로서 본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드나.

=그렇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새 소설은 또 약간 다를 거다. 소설마다 각각의 목소리가 있으니까. 그걸 발견하는 게 흥미진진하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처음 크로넨버그의 화상 인터뷰 기회를 놓고 짧은 시간 동안 고민이 무척 많았다. 그런 기이하고 음험하며 서늘한 세계를 무심하게 펼쳐내는 사람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라니, 놓치고 싶지 않았으나 동시에, 그가 까다롭고 괴팍하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두려움은 구체적인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현지시각 밤 9시. 길고 혹독한 겨울밤에 청한 대화에 반갑게 응한 그는, 그가 앉아 있는 아늑한 서재처럼 상대방을 편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인터뷰는 45년간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 크로넨버그의 차분한 답변으로 시작하여 첫 소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신인 소설가 크로넨버그의 들뜬 고백으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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