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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세밀한 예행연습의 힘

동작과 동선으로 <내일을 위한 시간>을 읽다

<내일을 위한 시간>

얼마 전 사석에서 독립영화나 학생 실습 작품에서 남용되고 있는 들고 찍기 촬영 스타일에 관해 지인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찍은 화면들은 아무렇게 붙여도 다음 컷과 연결되는 데다 화면 내의 운동감도 잘 느껴지지 않아서 젊은 감독들이 남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내가 말했다. 갑론을박이 오가는 사이 누군가가 다르덴 형제 감독의 <아들>을 예로 들었다. 시종일관 주인공의 가슴팍이나 뒤통수를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그 영화가 6개월 가량 리허설한 영화인 걸 알고 있느냐고 그는 물었다. 저명한 배우인 그는 매우 사실적으로 연출된 그 영화도 아마 기계처럼 반복하는 가운데 감독이나 배우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걸 현장에서 건져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다르덴 형제의 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뛰어나게 연기한 마리옹 코티야르의 스크린 형체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씨네21>에 실린 인터뷰에 따르면 마리옹 코티야르는 한달여간 실제 촬영장소에서 촬영용 의상을 입고 리허설을 했다고 한다. 육체적으로 힘든 그 과정을 겪은 후 본 촬영 시에 마리옹 코티야르와 감독들은 오로지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제작 과정은 관전자의 입장에서 매우 흥미롭다. 지난 수년간 한국의 독립영화 진영에서 다르덴 형제 영화들의 레퍼런스가 없으면 도대체 어떻게 영화를 찍었을까 궁금할 만큼 수많은 감독들이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을 의식적으로 추종해왔다. 소재와 소재를 구조화한 시나리오 질의 차이도 있겠지만 다르덴 형제 영화의 스타일과 추종자들의 스타일 사이에 놓인 수준의 격차는 크다. 그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충분히 합을 맞춘 카메라와 배우들의 동선, 거기서 만들어진 운동감과 리듬감의 차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리허설 과정에서 숙지되고 현장에서 조금씩 변형되는 세밀한 육체노동의 힘이 기계가 하듯이 정확한 흐름을 만들어내어 화면의 힘을 구현했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 인상적인 몸짓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마리옹 코티야르가 연기하는 여주인공 산드라는 공장의 동료 노동자들을 만나러 주말 이틀 동안 돌아다닌다. 아파서 휴직했던 그녀가 복직하는 대신 반대급부로 그녀의 공장 노동자 동료들은 보너스 1천 유로를 받을 것을 투표로 택했기 때문이다. 사장이나 반장은 그녀가 복직하면 누군가가 퇴직해야 한다는 암묵적 위협을 통해 그녀 동료들의 투표를 유도했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에게 보너스를 포기하고 자신의 복직을 위해 재투표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산드라의 입장은 참담하다. 스스로 거지같이 여겨진다고 그녀는 남편에게 하소연한다. 남편은 정당한 명분을 내세우며 산드라의 참담한 고통을 무시하거나 격려한다. 그들 부부에게는 어린 딸과 아들이 있고 갚아야 할 집 대출금이 있으며 그걸 내지 못하면 다시 임대아파트로 돌아가야 한다.

산드라는 버스를 타고, 또는 남편이 태워주는 승용차를 타고 동료들의 집을 찾아간다. 집 근처에 내린 그녀는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들고 동료들의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 더운 여름날에 산드라는 민소매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휘적휘적 걸어간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 산드라의 걸음걸이였다. 약간 팔자로 벌어지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동료들에게 정당한 투표를 요구한다기보다는 동정을 애걸해야 한다는 자격지심에 가득 찬,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게 마뜩지 않지만 그래도 힘을 내어 걷는 가운데 쥐어짜는 활기를 느끼게 하는 몸의 상태를 보여준다. 걸음걸이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산드라의 모든 행동들, 툭하면 약을 입에 털어넣는 그녀의 지치고 예민한 심신 상태를 드러내는 사소한 눈짓과 숨소리 하나마저도 그녀의 불편함을 연민이나 동정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느끼게 해준다.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에서도 바르트식으로 말한다면, 푼크툼으로 꽂히는 것은 말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개별적 행동이 주는 감흥이었다. <자전거를 탄 소년>에서 오래 기억되는 건 주인공 소년이 자전거를 타는 동작이다. 그 아이는 아주 세차게 자전거를 몰고 다닌다. 작은 자전거를 레이싱 선수처럼 자그마한 몸집으로 일어서서 타다시피 하는 아이의 날래고 힘찬 페달 밟기 동작은 아빠에게 버림받고 의탁할 곳 없어 어디다 정을 줘야 할지 모르는 소년의 결핍을 상기시킨다. 그 영화의 후반부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소년을 부모 대신 양육하는 미용실 여주인과 소년이 강변으로 소풍을 나갔을 때 두 사람은 서로 상대의 자전거를 바꿔 타고 즐거워한다. 이는 감정과잉의 말들이 오가는 어떤 멜로드라마의 극적 절정부보다 더 극적이다.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자전거를 바꿔 타는 그 상황을 통해 이미 마음을 충분히 나눈 것이다. 별스럽지도 않은 이런 상황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동의 감흥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선 예기치 않은 지점에서 폭발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반복되는 것은 동료들에게 자신의 복직을 재투표해줄 것을 비슷하게 되풀이하는 산드라의 말이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나는 상황의 극적 문맥은 점점 고조되는 것이 아니라 상승과 하강을 오간다. 그녀는 동료의 호의에 감동했다가 동료의 거절에 좌절한다. 똑같은 상황이 재연되지만 그 상황들의 개별성은 당연히 서로 다르다. 이걸 보여주는 영화의 방식은 산드라가 얼마나 걷느냐, 동료 앞에서 서서 얘기하느냐, 돌아서느냐, 돌아섰다가 다시 뒤돌아서느냐, 동료의 집 앞에서 얘기하느냐, 아니면 동료의 집 근처에서 만나 얘기하느냐 등으로 다양하게 나뉜다. 이런 정황들 속에서 여하튼 산드라는 걸을 수밖에 없지만 그녀의 걸음걸이가 주는 감흥은 그녀가 상대의 반응에 따라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역시 다양하게 펼쳐진다.

다르덴 형제는 주말 이틀 동안으로 제한된 시간 속에서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나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서스펜스를 준다고 했지만, 나는 서스펜스보다는 점증하는 불안과 사람에 대한 신뢰 사이의 이중감정을 느꼈다. 이는 산드라가 체감하는 반응이기도 한데, 그녀는 불안과 위로의 감정이 교차하는 방문 여정이 주는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신경안정제 한통을 다 먹어버리기도 한다. 상대방이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그걸 당당히 받아들이는 걸 스스로 연출하는 산드라의 부담감도 크지만 산드라의 요구를 미안해하면서 거절하는 동료들의 부담감도 크다. 그 동료들의 마음에 깔린 것도 불안감이다. 이는 산드라에게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표출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동료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심정이다. 산드라를 비롯해 그들은 모두 불안해하고 있다. 당장은 자신들의 보너스와 동료의 복직을 놓고 벌이는 양자택일 상황이지만 그들은 모두 이 상황이 본질적인 게 아님을 알고 있다. 피고용자로서의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 운명의 지도를 그릴 수 없다. 부탁하는 쪽이나 그 부탁을 듣는 쪽이나 모두 이 상황이 강제 된 것을 항변하며 그들은 서로 그 부당함을 확인한다.

마음속 갈등과 겹치는 동선

이 상황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갈등을 다루는 <내일을 위한 시간>은 인물들의 표정과 말뿐만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 안무된 각자 다른 동선을 통해 그 갈등을 드러낸다. 산드라와 친했던 동료 나딘은 아예 현관 인터폰에 숨어서 나오지도 않는다. 다른 동료 안느는 집 단장을 위해 음악을 들으며 페인트칠을 하고 있다가 돌아서는 산드라를 뒤늦게 붙잡고 자신의 경제적 형편을 사정한다. 가책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다시 남편과 상의하겠다며 집으로 돌아가 전화를 가져오려 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동선은 왔다 갔다 길게 늘어진다. 산드라가 안느의 집 현관에서 몸을 돌려 걸어나온 뒤 나중에 눈치를 채고 쫓아나온 안느와 대화를 나눈다. 안느의 거절 의사를 들은 산드라가 다시 몸을 돌려 멀어지면 안느가 다시 쫓아와 다시 고민하겠다며 시간을 달라고 말한다. 쉽게 갈라서지 못하는 그들의 동선은 그들의 마음속 갈등과 겹친다. 안느의 동선은 나중에 산드라의 그것과 합쳐진다. 남편과 언쟁을 벌이고 이혼하겠다며 집을 나온 안느는 산드라의 남편 마누와 함께 일요일 밤 산드라의 방문 여정에 친구가 되어준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나는 개별적인 상황들은 상대의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동선이 변주된다. 집에서 휴일을 보내는 동료들만큼이나 주말에도 밖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이 많다. 어느 쪽으로도 중산층의 여유를 즐기는 동료들은 없다. 산드라는 이들을 만나면서 어떤 식으로는 자기굴욕감을 견딘다. 자신의 처지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물론이고 동정적인 반응을 표하는 다른 동료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산드라는 동료들에게 부당한 상황에서 정당하지 않은 선택을 강요하는 폭력을 행사한다고 느낀다. 산드라의 이런 자격지심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만한 감정이다. 산드라는 동료들도 원치 않는 폭력을 자신에게 행사함으로써 괴로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런 괴로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행동할 것을 부추기는 남편을 산드라는 원망한다. 남편의 행동도 정의감과 생존욕구 사이에서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이 부당한 당위 앞에서 산드라를 비롯한 영화 속 인물들은 괴로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괴로워하는 입장 때문에 역설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복직을 호소하는 산드라가 좌절과 격려 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 그 와중에 자신의 입장을 편들거나 거부하는 누구에게도 호오의 감정보다는 분열된 우리의 입장에 대해 비통한 심장을 갖는 것, 그것들이 <내일을 위한 시간>을 버티는 가장 강력한 심정일 것이다. 이 비통함은 당장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극적 문맥을 갖출 수도 없다. 대단원의 결말이란 게 이런 현실을 다룬 영화에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부에 산드라가 어떤 상황에 처한 후 사장에게서 뜻밖의 제안을 받고 심심하게 거절하는 장면은 극적이지 않은 현실적 맥락에서 벅찬 감정을 전해준다. 산드라는 이틀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녀 자신의 내면을 연대라는 명분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상태로 단련시켰다는 것을 그 장면은 암시한다. 그게 눈물을 흘릴 만큼 대단한 진전은 아니더라도 여하튼 그녀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남편에게 전화로 말한다. 이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그녀의 걸음걸이를 지켜보고 있다. 영화 내내 우리가 봤던 그녀의 똑같은 걸음걸이다. 그러나 그녀가 미소 지으며 걸을 때 그녀의 살짝 통통거리는 발걸음은 조금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반영한 동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마리옹 코티야르의 연기는 존 카사베츠 영화에서 지나 롤랜즈가 보여준 연기를 떠올리게 할 만하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그녀는 완전한 영화 속 인물로 몰입하는 걸 보여줬다. 카사베츠는 그녀의 연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리서 지켜본다. 카메라는 오로지 배우를 위해 존재한다. 다르덴 형제의 이 영화에서 코티야르는 카메라 앞에서 충분히 안무된 동작을 보여준다. 그건 카메라와 배우가 세세한 연습을 거친 끝에 나온 움직임이다. 새장 앞에서 마리옹 코티야르는 그 부자유를 의식하지 않은 상태로 연기한다. 거기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의 수준이 놀라운 것이다. 이는 배우가 고도로 단련된 마음과 몸의 집중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경지일 것이다. 앞으로 이 영화를 생각하면 마리옹 코티야르의 걸음걸이가 우선 떠오를 것 같다.

매년 영화를 만들면서도 늘 나아가는 실력을 보여주는 감독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내일을 위한 시간>이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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