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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원] 늘어진 티셔츠 입고 맘껏 놀았다
장영엽 2015-01-12

<허삼관> 하지원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디라고 했던가. 어떤 역할을 맡든 완벽하고 치열하게 파고드는, 그래서 그 빛나는 성취의 왕관이 얼마나 매혹적인 것인지 잘 알고 있는 배우에게도 종종 그가 감당해야 할 왕관의 무게는 버겁게 느껴지는 편이다. 지난 2014년 상반기까지 원나라의 황후가 된 고려 여인, 기황후를 연기했던 하지원의 심정이 바로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근육의 움직임을 허투루 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연습이 수반되어야 했던 작품인 <기황후>는 그녀에게 연기 대상을 안겨주었지만 몸과 마음의 피로 또한 함께 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지원에게 찾아온 <허삼관>은 계산하지 않는 연기와 유쾌한 동료들, 상상의 즐거움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청량제 같은 작품이었다.

-오늘 촬영을 지켜보니 하정우와 눈만 마주쳐도 웃더라.

=진짜 웃긴다. 내가 웃음이 많고 재미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하)정우씨의 웃음코드와도 잘 맞는 것 같다. 현장에서도 연기할 때를 제외하면 계속 웃고 있었다.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다.

=오래 대화를 나눈 건 이번 작품을 통해서가 처음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딱 1년 전 오늘 정우씨와 만나 <허삼관> 이야기를 처음 했다. 회사로 대본이 왔는데, 작품은 너무 좋지만 세 아이의 엄마 역할을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싶은 부담감과 걱정이 있었다. 그런데 정우씨와 PD님, (제작사) 대표님이 나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는 거다. 궁금했다. 나는 내 옷이 아닌 것 같은데, 나와 잘 어울릴 것 같다면 왜 그럴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난 거지.

-혹시 시나리오를 보며 스스로도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던 장면이 있나.

=10년 전 절세미녀였던 옥란이가 가족을 위해 다시 좋았던 그 시절의 모습을 하고 전 남자친구와 그 부인을 찾아가서 싸우는 장면. 그 장면이 굉장히 묘하면서도 재밌더라. 사실 조카나 아기를 보며 “아, 예쁘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엄마라는 존재는 예쁘고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은 아니잖나.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소리 지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싸우면서 가족을 위해 내가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엄마’의 마음을 현실에서 직접 경험해보진 못했는데, 어떤 준비 과정을 거쳤나.

=선배님들이 연기하는 엄마의 모습을 혼자 많이 찾아보기도 했고, 엄마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도 유심히 봤다. 그러다 발견한 건데, ‘엄마’다운 행동 패턴들이 있더라. 힘들면 잠깐 멈춰서 ‘아휴’ 한숨 쉬고, 무슨 말을 해도 좀 ‘빨리빨리빨리’ 하게 되는. (웃음) 그런 모습들을 집에서 혼자 있을 때 많이 연습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있었다. 잘 모르는 모습이기에 고민 백배, 부담 백배인데도 현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놀았’으니까. 내가 어떤 설정을 고수한다고 해서 당장 엄마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정우씨는 내 남편, 세 아역배우는 내 아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편하게 가족들이 함께 지내듯이 현장에서 행동했던 것 같다. 쉬는 날에는 다같이 외식도 하고. (웃음)

-그 이전 현장들과는 좀 달랐나보다.

=그렇지. <기황후>를 할 때에는 손끝 동작 하나, 눈의 움직임 하나까지도 모두 계산하고 반복해서 연습하고 철저하게 외우는 과정을 거쳤다. 반면, <허삼관>의 옥란은 공부한다고 되는 역할이 아닌 것 같더라. 그래서 옥란이 처한 상황에 빠져 그냥 ‘놀았’다. 내가 편해지니 자연스러운 애드리브와 행동이 나오고, 상상의 여지도 더 열어두게 된 것 같다.

-이렇게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연기하는 건 철저한 준비와 노력 끝에 얻는 성취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줄 것 같다.

=옥란이 절세미녀였던 시기를 지나 영화상에서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를 보여주는 순간이 있다. 그 첫 장면이 앉아 있는 뒷모습인데, 정말 아기엄마 같은 거다.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는 포즈하며…. 너무 뿌듯했다. 내가 생각해도 처음 보는 나의 모습이랄까. 완성된 영화는 아직 못 봤지만, 나는 이 한 장면만으로도 영화에 출연한 게 너무 행복하다고 다른 분들에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배우 출신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에 출연한다는 건 어떤 경험이었나.

=우선 배우가 현장에서 마음을 편하게 가지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정우씨는 내가 마음을 편하게 먹기에 필요한 조건들을 센스 있게 잘 마련해준 것 같다. 사실 <기황후>를 촬영할 당시에는 일주일에 5일을 밤샜다. 혈액 순환이 잘 안 돼 걸음을 못 걷고, 허삼관처럼 피를 뽑으며 촬영할 정도였다. 정우씨가 이번 현장에선 그럴 일 없을 거라고 하더니 정말로 그 말이 사실이 됐다. 몰입에 도움이 되는 음악을 자주 틀어줬고, 내가 좋아하는 과자와 따로 쉬는 차까지 마련해줬고, 심지어 등산도 함께하고 요리까지 해줬다. 전작을 통틀어 요리에 운동까지 시켜주는 감독님은 처음이다. (웃음)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니까. 고생했다고 누군가 나에게 선물처럼 보내준 영화가 이 작품이 아닌가 하는. 그래서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마치 꿈을 꾼 것 같다. 고생을 할 때가 있는 반면 또 이렇게 행복하게 영화를 찍고 힐링을 할 수 있는 영화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2014년은 웃을 일이 많았겠다. 2015년은 어떤 해가 되었으면 하나.

=참 많이 웃었다. 개인적으로 좋은 해였다고 생각한다. 새해 첫 번째 소원은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다는 것. 스스로 에너지가 넘치고 건강해야 더 즐겁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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