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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꿈은 소중하잖아요
김선(영화감독) 2015-02-13

명절을 맞이하는 영화인의 자기세뇌법

<펄햄 123>

명절이다. 하지만 명절만큼 영화인들에게 절망스러운 시간이 또 있을까. 오랜만에 친척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오가는 덕담들은 악담에 가깝다. “넌 감독 공부한다더니 영화는 언제 만들 거냐?” “<국제시장> 같은 심금을 울리는 시나리오 한번 써봐라.” “이순신 영화가 나왔으니 다음엔 유관순 영화가 나와야 할 차례다.” 차라리 이런 식상한 덕담은 참아줄 만하다. 영화인에게 가장 최악의 덕담은 오히려 영화판을 잘 아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요즘 영화판이 힘드니 영화 그만두고 딴 일을 찾아보는 건 어떠냐.” 아아, 영화라는 꿈을 먹고 사는 몽상가에게 꿈을 포기하라니. 유관순 시나리오를 쓸지언정 꿈을 포기할 순 없잖아.

하지만 아무리 에고가 강한 몽상가라도 덕담 공격과 엄친아/삼옆딸(삼촌 옆집 딸) 총공세를 방어하다보면 자신의 꿈에 대해 의심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의심은 자기혐오에까지 이르게 되고 결국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듀스 형님들의 가사가 생각날 때쯤엔 이미 당신은 꿈을 포기하고 있다. 자, 영화인들이여, 몽상가들이여, 명절 때만 되면 꿈을 의심하고 포기하는 이 절망적인 패턴, 무기력하게 죄시할 것인가? 좀더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Provide, Provide, Provide. 대비해야 한다. 자기세뇌가 필요하다.

봤던 영화 또 보고, 거장의 망작 보고, 내 영화는 보지 말자!

영화를 시작한 지 12년차인 나는 명절 때를 대비한 나름의 자기세뇌법이 있다. 다년간의 실험을 통해 이 세뇌법을 쓰면 어떤 엄친아/삼옆딸의 압박에도 꿈을 지켜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자, 일단 영화에의 꿈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 알다시피, 영화를 보는 것이다. 그동안 밀렸던 영화들을 보는 거냐고? 천만에. 오로지(!) 봤던 영화를 또 봐야 한다. 100번이고 200번이고 봤던 영화를 또 보면서, 아예 컷들을 외울 때까지 보면서, 내 꿈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존 카펜터의 <괴물>을 본다. 너무 많이 봐서 컷포인트와 대사까지 외울 지경이 됐다. 그렇다고 멈추면 안 된다. 옥에 티가 보일 때까지 봐야 한다. 그 유명한 심장충격기 장면에서 화염방사기의 불길 방향과 괴물을 클로즈업할 때의 불길 방향이 다르다는 옥에 티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 실수를 소유하게 된다. <괴물>은 존 카펜터의 것일지 몰라도 화염방사기 장면의 옥에 티만큼은 내 것이다. 즉 <괴물>은 존 카펜터의 꿈인데 옥에 티는 내 꿈이다. 나는 저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꿈꾸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옥에 티까지 다 찾아내면 그다음엔 뭘 하냐고? 그다음엔 평소 흠모하던 작가(다들 좋아하는 거장 따위는 절대 안 된다)의 망작을 감상한다. 걸작보단 망작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걸작은 너도나도 꾸는 꿈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건 나만의 꿈이다. 이를테면 나는 토니 스콧을 흠모하는데, 명절의 압박이 극심해 졌을 때 나는 그의 망작 <펠햄 123>을 본다. 그가 <더 팬>이나 <크림슨 타이드>에서 뿜어냈던 속도감과 에너지가 <펠햄 123>에서 비실거리고 있음을 확인하며 토니 스콧 역시 꿈꾼 적이 있었고 그 꿈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음을 확인한다. 무엇보다 확인해야 할 것은 그 망작에서도 토니 스콧이 어떤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망작이 된 원인보다는 망작임에도 끊임없이 울부짖는 토니 스콧을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테면 존 트래볼타가 덴젤 워싱턴에게 “날 쏠 수 있으면 쏴 봐!”라고 울부짖는 매가리 없는 클라이맥스에서 토니 스콧의 끊임없는 주제의식- ‘후까시’- 을 감지해야 한다. 그 후까시야말로 당신이 토니 스콧을 사랑하는 이유이며, 당신이 영화를 꿈꾸게 된 동기 아니었던가.

망작 말고 유작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꿈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기억”하기보다 꿈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체험”하는 것이다. 유작을 선택할 때는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도 괜찮고 남들이 모두 칭송하는 거장(따위)의 작품도 괜찮다. 이를테면 오시마 나기사의 유작 <고하토>를 보며 그가 반치매 상태에서도 놓지 않으려던 꿈을 감지해본다. “제국주의의 토대는 근친상간일 거야…” 혹은 “동성애의 적은 네 안의 제국주의일거야…”를 읊조리는 오시마 나기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당신이 왜 꿈을 꾸기 시작했는지를 기억하기보다는 당신이 왜 꿈을 계속 꿔야 하는지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 체험은 유작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일종의 빙의에 가까운데, 지나치게 빙의되어 덕담하는 친척에게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운동권 톤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건 범죄를 저지르는 거랬어요!!!”라며 자충수를 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 가지 더 주의해야 할 건 봐서는 안 될 영화가 있다는 거다. 엄친아/삼옆딸이 총공세를 펼치는 극한의 시기엔 영화를 잘못 골랐다가 외려 꿈이 망가질 수 있다. 첫 번째로 금해야 할 영화는 남들이 너도나도 칭송하는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다. 대중과 평단의 호응을 동시에 받은 걸작이면 더 곤란하다. 내 꿈이 이미 이뤄진 것 같은 착각 혹은 내가 하려던 걸 이미 누가 했다는 (‘근자감’ 기반의) 좌절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스필버그의 최고작 <E.T.>는 피해야 할 영화 중 하나다. 물론 당신은 1984년 인천 인형극장에서 엄마 손 잡고 <E.T.>를 보며 영화의 꿈을 꿨을 것이다(그러면 도대체 당신은 몇살?). 하지만 그 꿈은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다. 이미 세계의 꿈이고 우주의 꿈이다. 심지어 영화 그만두라는 친척도 <E.T.>를 보면서 눈물 흘린 때가 있다. 차라리 스필버그의 1979년 망작 <1941>을 보면서 그가 못다 이룬 꿈을 확인하는 게 낫다. <E.T.>보다 재미는 없을지언정 스필버그의 미완의 꿈과 내가 지켜야 할 꿈을 링크시키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하토>

그리고 무엇보다 금해야 할 영화는 바로… 당신이 만든 영화다. 영화의 꿈을 먹고 자란 당신, 독립영화든 단편영화든 상업영화든 비상업영화든 장편영화든 UCC든 블록버스터든 뭐든 만들어봤을 것이다. “영화를 그만두라”는 덕담을 듣고 방으로 돌아와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인데…”라고 흥분하며 예전에 만들었던 영화를 꺼내 보는 당신, 꿈을 자폭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필요한 건 미래를 위한 세뇌작업이지 과거를 위한 반추작업이 아니다. 미래란 미완의 꿈을 완성시키려는 노력이지 완성된 꿈 쪼가리를 가지고 죽은 아들 불알 만지듯 감상에 젖는 게 아니다(그런 의미에서 그 옛날 작품이 고퀄리티 작품일수록 명절 때는 금해야 한다). 감상에 연연하다보면 미래는 점점 바이바이다. 차라리 안방으로 달려가 아까 그 덕담하던 친척과 싸우라. “당숙 아저씨도 대한민국이 어려우니 직장 그만두세요”라고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어보자. 귀싸대기를 맞을지언정 당신의 꿈은 지켜졌다. 와우.

이것저것 세뇌법을 써봤지만 엄친아/삼옆딸의 압박에 여전히 꿈이 의심된다고? 그럼 그냥 내가 보라는 영화를 봐라. 난 이번 명절 때 친척들의 덕담을 방어해줄 영화목록을 이미 정해놨다(후후후, 역시 Provide, Provide, Provide…). 바로 정치-액션 스릴러 영화의 마스터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의 작품들이다. 그의 명작 <대열차 작전>이나 <그랑프리>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등은 다시 보지 않으련다. 완성된 꿈은 내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그의 망작과 유작을 보련다. <레인디어 게임> <로닌> <닥터 모로의 DNA> 그리고 그가 토니 스콧, 오우삼 등과 공동작업한 BMW 단편 프로젝트 <앰부시>를 보면서 그가 70살이 다 돼서도 나불거렸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련다. 예상컨대 그의 초기작인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선 감지할 수 없었던 새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그 목소리는 분명 70년 동안 불만에 가득 차서 영화를 찍었던 한 노인네의 푸념일 테고 앞으로 내가 꿈을 위해 투덜거려야 할 현실태의 그림자이리라. 기분이 썩 좋진 않겠지만 꿈을 지키기 위해 그 정도 불쾌감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엄친아와 삼옆딸보단 낫지 않겠는가.

떡국은 꼭 먹자!

그리고 꿈을 지키기 위해 잊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떡국을 먹는 것이다. 꿈을 꾸는 데에도 체력이 필요하다. 사실 영화인들이 맨날 책상에 앉아서 글이나 끄적거리고 영화나 보고 있으니 체력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 앉아서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박근혜 정치 잘하나 감시해야지, 김정은이 다이어트 성공했나 체크해야지, 영회진흥위원회 위원장님은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예상해야지, 유관순 시나리오가 정말로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봐야지,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로 영화인에게, 몽상가에게 체력은 필수다. 비록 지난해에는 빌빌거렸지만 올해는 힘차게 꿈을 꾸련다. 떡국을 먹고! 프랑켄하이머 영화를 보면서! 엄친아/삼옆딸 귀싸대기 올리면서! 미래의 꿈을 꾸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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