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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 불가능성을 깨다

02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읽는 세 가지 경로 - 토머스 핀천 그리고 탐정 장르

이 글에서 내 임무는 영화화가 그렇게 어렵다는 토머스 핀천의 소설을 어떻게 폴 토머스 앤더슨이 영화화하는 데에 성공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미리 말하겠지만 이 결론은 다소 싱겁다. 질문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무비 데이터베이스(IMDb)를 확인해보면 토머스 핀천의 소설을 각색했다는 영화는 단 두편이다. 오늘 이야기할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 그리고 2002년에 나온 독일영화 <Pr¨ufstand VII>. <Pr¨ufstand VII>는 <중력의 무지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진 작품이니 온전한 각색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제대로 된 핀천의 각색물은 <인히어런트 바이스>, 단 하나만 있는 셈이다.

장르물로서도 만족스러운

이는 엄청난 성취처럼 들린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위대한 작가의 성공적인 소설이 모두 그렇게 쉽게 영화화되는 것은 아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각색하려는 시도 중 그나마 성공적인 것은 존 휴스턴의 <더 데드>(1987)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소설의 위대함은 ‘영화화할 수 있는 이야기의 재미’로 측정되지 않는다. ‘위대함’을 ‘재미’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은 지금도 꾸준히 영상화되지만 성공적인 작품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핀천의 경우는 조이스처럼 일반화하기도 쉽지 않다. 반세기 넘게 활동해온 작가지만 작품 수는 많지 않다. 인기는 초기작 세편에 집중되어 있다. 방대하고 난해한 <중력의 무지개>가 영화화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V>나 <제49호 품목의 경매>가 영화화되지 않은 건 작품의 각색 불가능성과는 무관하다. 그냥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첩보물, 로맨스, 판타지, SF, 무엇보다 해결되지 않는 수많은 떡밥들이 어우러진 <V>의 통속적인 재미는 요새 미니시리즈 형식과 잘 어울릴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제49호 품목의 경매>가 영화화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찾기 어렵다. 이 책이 출판된 60년대의 영화쟁이들에게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게 가장 그럴싸한 답이다.

<인히어런트 바이스> 이야기로 넘어가자. 이 소설은 2009년에 나왔으니 핀천의 작품 중 비교적 최근작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이 ‘핀천 라이트’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평이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70년대를 배경으로 약물중독자인 사립탐정이 실종된 부동산업자를 찾으러 LA 시내를 돌아다니는 소설의 이야기는 대시엘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 이후 수없이 쏟아져나온 사립탐정물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전에도 핀천은 꾸준히 추리와 SF의 장르 경계선 주변을 넘나들었지만 이 경우는 형식이 훨씬 정통적이라 그냥 70년대에 나온 페이퍼백 장르물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가끔 등장하는 인터넷에 대한 농담 같은 것을 잡아내지 못할 70년대 독자들은 정말 속을지도 모른다.

소설이 전통적인 추리물의 목표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주인공인 닥은 소설 내내 사립탐정질을 부지런히 하고 다니지만 독자는 종종 그의 목표가 무엇이고 이 소설이 다룬 사건이 무엇인지 쉽게 잊어버린다. 계속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튀어나오는 동안 범인을 잡고 진상을 밝힌다는 목표는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특이한 일일까? 정리 불가능할 정도로 배배 꼬인 미로를 만들어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은 해밋 이후 하드보일드 소설의 오랜 전통이었다. 여전히 전통적인 핀천 소설의 음모과 편집증이 책 전체를 지배하고 전통 추리소설의 집중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웬만한 일들은 대충 매듭짓고 끝이 난다. 이 정도면 장르물로서도 만족스러운 결말이다. 정작 탐정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문장을 시각화하며

<데어 윌 비 블러드>가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지만 아이디어만 얻었을 뿐 완전히 새로 이야기를 짠 작품이라는 걸 알고 있는 관객은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도 같은 각색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은 정반대의 접근법을 택한다. 영화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놀라울 정도로 원작에 충실하다. 중요한 대사들은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왔고 소설의 지문 상당수는 내레이션으로 들어갔으며 스토리도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수정된 부분도 있고 삭제된 인물들도 있지만 이 정도면 넘어갈 만하다. 이 접근법은 당연하다. <레미제라블>은 방대한 소설이지만 서너줄 문장으로 요약되는 아이디어에 지탱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당연히 원작을 버리고 그 아이디어에 기반한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핀천의 소설에서 아이디어만 취한다면 흔해빠진 사립탐정물의 줄거리만 남는다. 당연히 원작의 장점을 취하려면 원래의 이야기에 충실해야 한다.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가장 일탈처럼 보이는 부분은 원작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챈들러의 필립 말로 소설과 달리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3인칭으로 전개된다. 앤더슨은 이 지문을 내레이션으로 처리하는데, 여기서 내레이션을 담당하고 있는 건 영화에 솔티레쥬라는 이름의 조연으로 등장하는 조애나 뉴섬이다. 원작의 문장을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TV 문학관>스러운 직역을 교묘하게 피하는, 거의 천재적인 발상이다. 여성 목소리의 내레이션은 원작에 추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만 원작을 거스르지도, 심하게 재해석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는 앤더슨이 이 각색과정 중 꾸준히 고수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의 목표는 문학 텍스트의 영화적 전환이다.

여기에서 다시 정리하자면,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영화화하기 불가능한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영화화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이 아니다. 핀천의 소설이 영화화가 불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미신화된 고정관념이고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영화를 품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각색과정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하려는 영화감독/각본가의 일반적인 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원작이 우리가 폴 토머스 앤더슨이라는 감독에게서 이미 보았고 기대하는 것들, 그러니까 70년대 배경, 미로 같은 구성, 마약 문화, 편집증과 같은 것을 미리 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토머스 핀천의 원작엔 각색 불가능성보다 내재된 폴 토머스 앤더슨다움이 더 많이 보인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만드는 폴 토머스 앤더슨은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며 문장들을 거의 즉석해서 시청각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이상한 결말이다. 굳이 <제5도살장>이나 <마더 나이트>의 영화판을 보지 않은 독자라도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의 팬이라고 자처할 수 있다. 하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이 개입한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토머스 핀천의 팬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영화가 되었다. 좋은 영화로서뿐만 아니라 원작의 정수를 그대로 보존한 충실한 영화로서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만족스러운 ‘핀천 영화’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유일한 핀천 영화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블레이드 러너>(1982)가 나오기 전까지 필립 K. 딕은 영화화가 불가능한 작가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최근 몇 십년 동안 그 각색 불가능성의 미신이 어떻게 깨졌는지 보라. 둘은 전혀 다른 작가이기 때문에 일대일의 비교는 어렵다. 하지만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각색 불가능성이라는 미신을 깨고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한 영화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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