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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저임금 외계인 노동자 시대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피케이: 별에서 온 얼간이> 등에서 살펴본 외계인의 도(道)

<피케이: 별에서 온 얼간이>

한없이 느슨하기만 했던 대학에 경쟁의 칼바람이 몰아치면서 수십년 동안 나태의 선두 주자였던 우리 과에도 공고가 붙었다. 졸업논문 심사를 3단계에 걸쳐 진행하게 되었으니 졸업 예정자들은 먼저 논문 목차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졸업논문이란 벼락치기로 며칠 만에 쓰는 거라 알고 지낸 세월이 4년 반인데, 원통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들처럼 4년 만에 졸업할걸 그랬지.

나는 ‘해방 이후 전남 지역 인민위원회의 현황과 한계’라는 거창한 주제로 목차를 만들어 교수님 연구실로 갔다(진짜 엄격하게 하려면 미리 제출해야 했겠지만 어차피 우리 과 나온 분들, 교수들이라고 나태하지 않을 리가 없다). 15분에 걸쳐 목차를 검토한 교수님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말 이렇게 쓸 수 있겠나?” 나는 긴장했다. “이건 논문이라기보다 단행본 목차에 가까운데?” 그렇겠지요, 단행본 목차처럼 보이겠지요, ‘해방 이후 전남 지역 인민위원회’가 주제인 단행본 한권을 가져다가 그냥 베꼈거든요. 나는 정교수가 되어 철통 밥그릇을 꿰차자마자 공부를 접었다고 소문이 나서 그동안 무시했던 교수의 안목에 감탄하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연구실을 나섰다.

졸업논문이 그런 식이니 리포트와 발표문은 당연히 더욱 엉망진창이었다. 그랬던 1990년대 캠퍼스, 신화학 발표 시간에 엄청난 놈이 나타났다. 종교학 전공도 아닌 어느 학생이 인류는 외계 실험실에서 창조되었으며 사람이 죽으면 태초의 형태였던 전파로 화하여 그 실험실로 돌아가게 된다는 교리를 신봉하는 모 종교에 관해 체계적이고도 상세하며 설득력까지 있는 발표문을 내놓았던 것이다.

교수는 감동했다. “자네는 어찌하여 이토록 훌륭한 발표문을 작성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학생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제가 신도거든요.” 응? 네? 뭐? 우? 교수와 서른명의 학생들은 일제히 반문했다, 방금 20세기 대한민국에서 외계인을 신(神)으로 믿는 사람이 진정 내 눈앞에 나타난 거야? 어, 맞아, 나타난 거야.

<황당한 외계인: 폴>

부연 설명에 따르면 그 학생은 모 종교에서 태양계 지구 행성 아시아 대륙 대한민국 남한(농담이 아니다, 진짜로 체계가 그랬다)의 중간 관리자에 해당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믿음에 탄탄한 신학적 기반을 더하고자 수강 신청을 했던 신실한 신도였다. 그는 외계인을 믿는 사람답게, 수천년 전에 쓰인 성경이나 코란 등으로 믿음을 키운 신자들은 꿈도 꾸지 못할 현대 과학 이론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아, 그렇구나, 우리는 모두 실험실 비커 출신으로서 피펫으로 한 방울 영혼을 부여하사… 아니,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어쨌든 외계인 실험실로 전도 당할 뻔한 그날 이후, 나는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만 보면 진지하게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저 또한 우리의 창조주가 내리신 예언의 흔적이 아닐까.

제목만 듣고 무시했던 <에이리언 vs. 프레데터>를 어쩌다 보게 되었을 때도 나는 그 옛날 외계인교 중간 관리자의 흔적을 느꼈다. 머나먼 지구에다 경기장을 짓고는 에일리언 알을 까서 성인식으로 사냥놀이를 즐기는 프레데터의 스케일! 지구인에게는 하나의 문명에 해당하는 그 경기장을 겨우 100년에 한번 쓰다가 고장나기도 전에 버리는 재력! 나는 성인식이랍시고 (장미 20송이 대신) 장미 담배 20개비를 받아 (성인다운 흡연력을 인정받고자) 한꺼번에 피우는 주접이나 떨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외계인이라고 하여 다 돈 많고 낭비 심한 것만은 아니다. <피케이: 별에서 온 얼간이>를 보면 인건비가 모자랐는지 낯선 행성에 혼자 파견나온 안드로메다 은하계 출신 직장인 피케이는 보조 리모컨 한개가 없어 도둑맞은 우주선 리모컨을 찾아 인도 대륙을 헤매고 다닌다. 정규직도 아닌 거 같은 게 현지 화폐로 지급되는 체재비는 고사하고 현지 복장 한벌 지급받지 못한 맨몸, 필요한 장비와 비용은 알아서 조달해야 한다. 천신만고 끝에 안드로메다로 돌아간 피케이는 (근데 피케이 말고도 안드로메다로 보내주고 싶은 사람 많은데) 인력을 보충해 다시 돌아오지만… 리모컨은 아직도 1인당 한개, 우주선 리모컨은 많이 비싼 건가요, 안드로메다에선?

회사에서 식대를 주지 않으면 삼각김밥을 먹으면 되고, 출장비를 주지 않으면 현지에서 벌어 쓰면 된다. 그리고 현지에서 벌어 쓰려면 기술이나 간판이 있어야 한다. <황당한 외계인: 폴>의 폴은 과학자 간판을 내세워 정부를 비롯한 각계의 자문 노릇을 하면서(회사 다녀본 사람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자문이라는 직책의 실체를. 일할 손발은 없는데 일 시키는 입만 살았지) 미국 국민의 혈세로 무위도식하다가 무려 60년이 지나서야 자유를 찾아 탈출한다. 그렇다면 폴은 60년 동안 뭘 하다가 그간 죄수 신세였다고 한탄하면서 이제야 탈출한 걸까, 그것이 황당하다면 황당하긴 한데, 나라도 그러겠다, 고향 가면 일해야 하잖아. 혹시 60년 지나서 연금 받을 연차라도 된 건가. 하지만 사는 건 그리 만만하지 않다. 1993년 영화로서 세상이 팍팍하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심하진 않았던 시절의 <콘헤드 대소동>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안목은 있어 만만한 남미 저개발 국가에 착륙하려고 했지만 그걸 뒷받침할 기술은 없어 자본주의의 수도 미국 뉴욕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은 취직을 하려고 해도 서류가 없다. 미국이 까다롭다고, 나도 신용카드 믿고 현금 10만원만 들고 갔다가 공항 이민국에 끌려갔어.

위대한 창조주를 떠올리며 시작된 이야기가 어째 불법 이민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 스타일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 같다. 프레데터라고 해서 고대가 아닌, 현대 지구에 홀로 착륙했다면 달리 뾰족한 수가 있었을까, 불법 이민 신세, 에일리언 잡는 불칼 들고 저임금 노동하러 가야지. 구원을 바라거나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야 선지자건 구세주건 제구실을 하는 거지, 스스로 지옥을 택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피케이처럼 맨몸으로 세상을 떠도는 수밖에.

웬만하면 미국에 착륙하지 마세요

외계인으로서 지구를 정복하지는 못하더라도 해부는 당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두세 가지 것들

<콘헤드 대소동>

인해전술

똑같이 지구를 정복하러 오더라도 떼로 오면 <우주전쟁>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전쟁을 부르는 블록버스터가 되지만 혼자 오면 <콘헤드 대소동>처럼 싸구려 소품이나 뒤집어쓰고 다니는 코미디가 된다. <슈퍼노바 지구탈출기>의 외계인들은 갇혀 살면서 페이스북하고 아이패드하고 그 밖의 온갖 좋은 것들을 만들었던데, 그렇게 똑똑한 애들이 자기만큼만 똑똑한 친구들하고 함께 왔으면, 24시간 2교대 체제로 게임하면서 리니지 아이템 벌고 있다는 중국 죄수들처럼 살진 않았겠지… 만 그렇게 똑똑한 애들이 애초에 무슨 배짱으로 혼자 온 걸까.

<인디펜던스 데이>

적재적소

외계인을 위한 ‘외로운 행성’ 가이드북을 만든다면 미국 지도에는 비명 지르는 곤두선 머리카락의 호러영화스러운 아이콘(모 가이드북 시리즈에서 범죄 지수를 표시하는)을 다섯개 그려주겠다. 미국, 외계인 군단에 맞서 조국의 <인디펜던스 데이>를 이루고자 직접 전투기를 몰고 나가는 해병대 출신 대통령이 있는 나라, 16년 동안 콘헤드 외계인을 추적하는 공무원이 FBI의 멀더 요원이 아니라 직업정신 투철한 이민국 직원인 나라, 트랜스포머가 강림했더니 고물차 취급하는 10대들이 득실거리는 나라. 나는 지구인이지만 왠지 거긴 다시 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맨 인 블랙>

근묵자흑

먹을 가까이하면 검게 물드나니 검어지고 싶다면 먹을 가까이하라. 지구 정복에 실패한 외계인들이 해부대에 올라가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구인인 척하는 거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콘헤드 대소동>처럼 엄연한 뾰족머리 콘헤드이면서 아닌 척하는 후안무치 외계인으로 평생을 살거나 <맨 인 블랙>의 외계인처럼 지구인 모양 탈바가지를 뒤집어쓰면 되는데, 그건 너무 힘들어서 아르바이트 중에서도 고임금이라던데. 또는 <솔로몬 가족은 외계인>의 외계인들이 딱 한번 시도했듯 평범한 미국인 되기 매뉴얼을 실천하면 된다. 제멋대로 입던 옷을 버리고 니트에 면바지 입기, 그렇게 입고 존 그리샴 소설 읽기. 참고로 그들은 1회 만에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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