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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영화는 꿈을 꾼다
김곡(영화감독) 2015-12-18

정치와 영화, 현실과 신화의 상관관계

<절멸의 천사>

그래. 인정한다. 난 현실적 불만족을 채워보려는 심산으로 정치영화를 사랑했었다. 현실정치에서 못 얻는 쾌감이 거기 있었고, 현실정치에 대해서는 못해본 비판의식이 거기 있었다. 이것은 마치 행정고시에서 연거푸 낙방한 만년 재수생이 미친 듯이 PC방 게임에 탐닉하는 것과도 같다. 내가 현실정치에선 못해보고, 못 느껴보는 현실감이 저기 저 스크린 속엔 있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나는 마치 커지는 불만족을 더욱더 격렬하게 다스려보려는 듯, 점점 더 센 정치영화들에 일부러 열광하기 시작했다. 비판의식과 내러티브적 재미를 적절하게 배합해주시는 웰메이드 정치극 영화들(앨런 파큘라, 코스타 가브라스, 켄 로치…)은 이미 나의 목록에서 하단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비판의식은 안드로메다 은하로, 그리고 내러티브 완결성은 켄타우로스 은하로 유배시키고서야 겨우 정치 얘기를 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 정치영화들(루이스 브뉘엘, 두샨 마카베예프, 얀 슈반크마예르…)이 오히려 나의 18번들로 급부상하고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

그중 열광했던(혹은 일부러 열광하는 척했던) 작가가 바로 미클로시 얀초다. 그의 영화는 괴기하지만 숭고하기 그지없다. 벌판 한복판에 기병대와 시위대가 서 있다. 시위대가 서서히 다가가면 기병대도 서서히 다가간다. 시위대가 기병대를 감싸는가 하더니, 이번엔 기병대가 시위대를 감싼다. 두 무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적과 백> <붉은 시편>). 하나의 거대한 무당 군무와도 같은 이 영화야말로, 내가 정치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 아닌가! 아아, 전투가 궁하면 지령문이라도 다시 보자. 음식이 궁하면 메뉴판이라도 쳐다보자.

대리만족 관람법에 대한 태클

그러나 내 이러한 대리만족 관람법에 태클을 걸게 되는 초유의 사건이 드디어 나타난다. 미클로시 얀초가 199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씨네21>과 했던 인터뷰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인용해보면, 얀초 왈,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영화를) 그만두는 게 낫습니다. 아니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해야 합니다”.(‘미클로시 얀초 인터뷰’ 1996년 5월 <씨네21> 51호) 아아아∼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개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현실정치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정치영화를 보아오던 나에게, 작전이 실패했으니 지령문이라도 읽어볼 요량으로 정치영화를 보아오던 나에게, 마치 “네가 원하던 현실은 여기 없다” 혹은 “이 지령문 다 개뻥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저 인터뷰는! 게다가 그것이 내가 정치영화의 대가로 목록 상단에 랭크해놓았던 미클로시 얀초가 한 말이라니!

<적과 백>

대답이 막혔으면 거꾸로 묻는 수밖에. 그러게. 다시 되물으려고 생각해보니, 그리고 다시 돌아보니 얀초의 영화에는 현실정치 혹은 정치현실이 없다. 그것은 차라리 집단으로 하는 굿판으로서, 현실 사회주의가 부흥하거나 패망한 과정을 상징적인 몸짓과 패턴으로 형상화하고 있을 뿐이다. 군무와 그 몸짓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현실이라기보다는 현실에서 피어나고 좌절된 꿈이었다. 그것은 스탈린에 의해 이미 죽어버린 사회주의에 대한 추모제인 동시에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는 미래의 사회주의와 소통하는 교령식이기도 하다. 제사에 항상 집단이 참여하는 것처럼, 이것은 집단이 꾸는 꿈이다. 여기에 바로 얀초가 그토록 고집하던 플랑세캉스(plan sequence)의 정치윤리적 목적이 있을 터이니, 개인에게 역사는 파편일 수 있지만 집단에게 역사는 언제나 연속이다. 흘러가는 것은 하나도 잃는 것이 없다. 혹은 모든 것을 잃어야 군중은 비로소 꿈을 꾼다. 꿈은 언제나 역사의 끄트머리에서만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가 아니라 비현실 사회주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다.

이쯤 되고 보니… 현실 불만족을 보상받기 위해 지령문과 메뉴판처럼 읽어대던 다른 정치영화들도 현실을 다룬다기보다는 꿈을 다룬다는 것이 소름. 앨런 파큘라는 개인의 사적인 꿈과 구분되어야 할, 한 집단의 공적인 꿈을 매우 집요하게 묘사한다. 음모란 항상 권력이 꾸는 꿈이다(<암살단>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납치, 감금, 고문의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고 알려져 있는 코스타 가브라스도 예외는 아니다. 그 생생함의 요체는 다 보여주지 않기, 마비된 반응을 통해서만 증언하기, 너무나 지리멸렬해져서 몽상이 되어버린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만 보여주기에 있기 때문이다(<제트><계엄령>). 내 목록 상단에 랭킹되어 있던 작가들에게선 더욱더 분명하다. 좋은 예로 브뉘엘은 항상 꿈을 통해서만 정치를 말한다. 부르주아는 변태를 꿈꾸고, 경찰서장은 사기꾼을 꿈꾼다. 하지만 이 꿈들은 서로에게 단락되어 이어져 있질 않아 그 안에서만큼은 인물은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자유의 환영>). 지배자건 피지배자건 간에 꿈 안에서는 진심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복지까지 포기하고 창조경제와 국위선양을 꿈꿀 때, 그건 졸라 진심이다. 가난한 내가 비루하게 복권을 사며 당첨을 꿈꿀 때가 졸라 진심인 것처럼. 그리고 그 두 꿈은 결코 이어지거나 통합될 수 없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꿈꾸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으레 권력자이고, 꿈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으레 가난뱅이, 거지, 노동자들이라는 브뉘엘의 성찰(<절멸의 천사>).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나처럼 꿈밖에 남지 않은 인생이기 때문이다. 마치 행정고시에서 또 낙방한 만년 재수생만이 사회제도의 혁파와 계급구조의 혁명을 꿈꾸는 것과 같은 이치.

꿈은 집단의 꿈인지라 그것은 언제나 신화다. 물론 이 신화는 현실정치에서 동떨어져 있는 신화가 아니다. 반대로 현실정치는 모두 이 신화 위에서 벌어진다. 국가가 공권력과 세금폭탄의 신화를 꿈꾸는 것처럼, 시장이 무한경쟁과 자동조절의 신화를 꿈꾸는 것처럼, 자본주의도 이윤 극대화와 영구팽창이라는 신화를 꿈꾸는 것처럼, 국민은 세금=0의 신화를 꿈꾸고, 소비자는 유통마진=0의 신화를 꿈꾸고, 노동자는 잉여가치착취=0의 신화를 꿈꾼다. 모든 정치적 투쟁은 바로 신화간의 투쟁인 셈이다. 단 그것은 권력신화와 대중신화간의 투쟁이다. 어느 것 하나 더 과학인 건 없고, 어느 것 하나 더 이데올로기인 것도 없다. 좋은 정치영화들은 바로 이 괴상한 도식을 용기 있게 내뱉는 영화들이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 정치영화의 진정한 시작은 한국 뉴웨이브가 아니었을까. 한국 뉴웨이브영화들이 으레 바보를 다룬다면, 그것은 현실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현실을 꿈꾸기 위해서다. 그것은 “고래”라는 신화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한국 뉴웨이브가 보여줄 정치성에 대한 중대한 선언문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거기서 바보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고래라는 신화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가신화가 행하는 폭력 앞에서 스스로 드러내는 무력함과 되돌려줄 폭력이라고는 다른 신화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는 간절함, 그것이 바보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정치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장호 감독은 유아 수준의 지능을 가진 바보들이 행하는 뻘짓거리와 보쌈놀이, 그리고 즉흥적인 광대짓을 통해서 고래를 기다린다(<바보선언>). 배창호는 아예 병신춤을 추거나(<꼬방동네 사람들>), 장례식을 지내거나(<고래사냥>), 시간을 멈추는 놀이(<고래사냥2>)를 하면서 고래를 기다린다. 장선우에게 고래란 정신해방이었다. 설령 그것이 신분의 방랑과 육체의 광분을 통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경마장 가는 길> <너에게 나를 보낸다> <거짓말>). 고래 꿈꾸기는 의식파업인 셈이다.

거리에서 정치영화 찍기

요컨대- 내가 애초에 오해했던 것과는 반대로- 정치영화는 리얼리즘영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영화는 언제나 현실이 아니라 꿈을 다루기 때문이다. 얀초의 그 엄청난 폭탄발언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영화는 현실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지령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는 현실정치와 현실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반대로 현실정치에서 실패했던 꿈과 다시는 실패하지 말아야 할 꿈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정치영화는 차라리 신화영화다. 권력의 신화에 대항해서, 대중신화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영화. 요즘 민중 총궐기로 한창 논쟁을 벌이는 중이다. 불법시위네, 복면금지법이네, 사실 원리상 형용모순이어야 할 단어들이 엄밀한 법률용어인 것처럼 버젓이 나도는 현실이 각박하고 짜증난다면, 거기로 나가서 정치영화 한편 찍어보는 건 어떨까? 정치영화의 교훈대로라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우리는 우리만의 영화를 찍는 셈이니까. 왜냐하면 총궐기야말로 대중신화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이 신화는 단지 허영이고 환영이 아니다. 반대로 그들의 법치주의와 국가보안을 거짓말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거기에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소렐의 말대로, 신화가 바로 힘이다. 잠꼬대로 휘두른 주먹이 더 아픈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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