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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안국진, 윤성현, 조성희 감독과의 대화
진행 장영엽 사진 오계옥 2016-04-28

안국진, 윤성현, 조성희 감독(왼쪽부터).

안국진 감독

1980년생. 경희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한국영화아카데미 27기로 입학해 연출을 전공했다. 그의 첫 장편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제36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제7회 올해의 영화상, 독립영화상, 제3회 들꽃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제작사 씨네2000에서 <여고괴담> 리부트를 준비 중이다. 최근 초고를 완성했다.

윤성현 감독

1982년생. 서울예술대학 영화과를 졸업한 뒤 한국영화아카데미 25기로 입학했다. 첫 장편영화 <파수꾼>은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비롯해 제48회 대종상영화제, 제32회 청룡영화상의 신인감독상, 신인남우상을 수상하고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홍콩국제영화제 등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차기작으로 배우 이제훈이 주연을 맡은 액션 서스펜스물 <사냥의 시간>(가제)을 구상 중이다. 주•조연 배우들의 캐스팅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참이다.

조성희 감독

1979년생. 서울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영화에 흥미를 느껴 한국영화아카데미 25기로 입학했다. 2009년에 연출한 단편영화 <남매의 집>이 제8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 3등상을 수상하며 단편영화계의 스타감독으로 주목받았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연구과정의 일환으로 <짐승의 끝>을 연출했고, 장편 상업영화 <늑대소년>(2012)을 만들었다. 5월4일 개봉하는 신작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후반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씨네21>은 지난 2015년 창간기념 특별호에서 강형철•류승완•윤종빈•박정범(<씨네21> 1000호 기획), 이병헌•우문기•홍석재•김태용(<씨네21> 1002호 기획) 감독을 만나 당시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 창작자로서의 고민에 대해 자유롭게 물었다. 그들이 공유하는 생각과 고민의 지점이 한국영화계의 현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올해 <씨네21>이 주목한 이들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신인감독인 안국진, 윤성현, 조성희다. 이 세 감독들은 어느덧 재능 있는 신인감독의 등용문으로 자리잡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연구과정의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감독 안국진, 2015), <파수꾼>(감독 윤성현, 2010), <짐승의 끝>(감독 조성희, 2011)을 통해 충무로 관계자들과 일반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신인감독이 자신의 장편영화를 극장에 내걸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이 시대,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시스템을 통해 ‘데뷔전’을 치른 이들은 충무로에서 본격적으로 장편 상업영화를 준비하며 어떤 온도차를 느끼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들이 직면한 과제를 통해 2016년 한국 영화산업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길 바라며, 세명의 신인감독들과 장시간 나눈 대화를 이 지면에 옮긴다.

<씨네21>_세 사람 모두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이다. 더불어 아카데미의 장편제작연구과정을 통해 충무로에서 주목받은 신인감독이라는 공통점도 지녔다. 서로에 대해 어떤 기대감을 품고 이 자리에 나왔는지 궁금하다.

조성희_일단 윤성현 감독에 대해서라면, 너무 자주 보는 사이다. (웃음) 성현이는 아카데미 동기이고, 졸업한 뒤에 <짐승의 끝>을 찍을 때에도 사는 동네가 같았다. 안 그래도 기수당 사람이 적어서 동기들끼리 다들 친한데, 성현이는 특히 집이 가까워 더더욱 가까운 사이가 됐다. 안국진 감독님은 오늘 처음 뵙는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봤는데, 장편제작연구과정의 환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환경을 넘어서는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떻게 만들었는지 노하우도 궁금했고, 한번 뵙고 싶었다.

윤성현_조성희 감독 얘기대로 동기들끼리 다 친하다. 그중에서도 조성희 감독은 자주 보던 사이다. 얘기한 대로 집이 가까워서. (웃음) 뿐만 아니라 나보다도 앞서 상업영화를 개봉했고, 내가 아주 상업적이지는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있어서 지금 작품을 준비하며 많은 조언을 구하고 있다. 안국진 감독님은 나도 오늘 처음 뵙는다. 하지만 <파수꾼>에 출연했던 배제기 배우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출연했기 때문에 한 다리 건너 얘기를 많이 들었고, 늘 궁금했던 감독이다.

안국진_나는 두 감독님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영화제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예전에 <우리집에 놀러오세요>(2008)라는 단편을 영화제에 출품한 적이 있다.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가 내 영화를 상영한다는 얘기를 듣고 영화제에 간 거다. 그런데 다녀와서 내 영화 얘기는 하나도 안 하고 조성희 감독의 단편 <남매의 집>(2009) 얘기만 하더라. (웃음) 도대체 어떤 영화인가 싶었는데 영화를 보고 난 뒤 조성희 감독이 부러워졌다. 다른 사람들이 그저 공부를 해서 따라잡을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진 분이더라. 그래서 사실 이 대담을 제의받았을 때에도 ‘아, 나 성공했는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웃음) 윤성현 감독님의 <파수꾼>을 보고도 많은 감동을 받았었다. 상상마당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상영이 끝난 뒤 홍대 길거리를 울면서 걸었다. 막상 영화를 볼 때는 담담했는데, 보고 나와서 많은 것들이 밀려오는 영화더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촬영할 때에도 윤성현 감독과 친한 배제기 배우에게 이 말은 꼭 해달라고 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조금이라도 확대상영된다면, 그건 <파수꾼>의 성공 덕분이라고. 장편제작연구과정 작품이었던 <파수꾼>이 극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이후에 장편제작연구과정 영화를 만드는 아카데미 출신 감독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극장 개봉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아, 그리고 나는 <파수꾼>에 출연도 했다. 뒤통수가 나온다. (웃음) 호프집 장면에서.

윤성현_어! 그래서 낯이 익나보다.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안국진_25기가 영화를 찍을 때 우리 기수가 현장 지원을 나갔었다. 그런데 <파수꾼> 크레딧에 이름이 안 나와서 실망했다. (웃음)

윤성현_지금이라도 다시 추가를…. (웃음)

조성희_안국진 감독님의 말대로,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연구과정의 영화가 이제는 관객에게 하나의 브랜드로 안착된 것 같다. 그렇게 된 데에는 <파수꾼>이라는 영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거의 독립영화계의 고전 같은 작품이 되지 않았나. <파수꾼> 이후 배우들 오디션을 진행하면 자유연기를 할 때 많은 배우들이 기태(이제훈) 연기를 하더라. 영화학교에서 특정 장면을 직접 찍어보는 수업을 할 때에도 <파수꾼>을 참고로 한다고 들었다. 아무쪼록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소셜포비아>(2015), <파수꾼>, 이런 작품들의 성공이 아카데미의 장편제작연구과정을 오래 지속할 수 있게 한 것 같다.

안국진 감독.

<씨네21>_그 역할은 <짐승의 끝>이라는 작품도 했잖나. (웃음)

조성희_나는 좋아하는데,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 (웃음)

안국진_나는 <짐승의 끝> 정말로 좋아한다. 볼 때마다 질투나는 지점이 있다. 보도 듣도 못한, 되게 기묘한 디스토피아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대체 저런 건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으면서도, 생각이 막힐 때마다 다시 보는 영화 중 하나다.

윤성현_조성희 감독이 <짐승의 끝>을 만들 때, 나는 솔직히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왜냐하면 당시 아카데미 내부에서 조성희 감독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 천재가 나타났다는 거였다. (웃음) 단편 <남매의 집>이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고, 학교 선생님들도 ‘조성희, 조성희’ 할 때였다. 나도 사람인지라 질투까지는 아니고 약간의 섭섭함이 있었다. (웃음) <짐승의 끝>을 너무 의식하다가는 내 중심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크게 개의치 않으려 했는데, 그때 조성희 감독이 오히려 나에게 배려를 많이 해주고 사려 깊게 대해주더라. 나도 영화가 잘되면 이런 모습을 꼭 지켜나가야지 하는 생각을 할 만큼 품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성희 감독의 재능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어느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한다. 예술성과 상업성, 이 모두를 다 갖춘 감독이라고 생각하는데, 조성희 감독의 이 두 가지 면모 중에서 예술적인 재능을 볼 수 있는 작품이 <짐승의 끝>, 거대한 포용력을 지닌 작품이 <늑대소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넓은 스펙트럼으로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친구이자 존경할 만한 창작자다.

조성희_나는 성현이가 했던 얘기 중에 기억에 남는 말들이 몇개 있다. 실제로 영화를 하면서 종종 되새기는 말들이다. 첫 번째는 현장에서 너무 바쁘고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을 때,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라는 말이다. 힘들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나더라. 또 하나는 <파수꾼>을 만들 때 성현이가 했던 얘기다. 당시에 나는 영화를 막 시작하는 입장이라 <짐승의 끝>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아카데미 선생님들에게 의지를 많이 했었다. 선생님들이 내주시는 과제 안에서 성취를 하려고 노력했던 반면, 성현이에게는 강력한 자기 확신이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말이 ‘<파수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라는 거였다. 솔직히 시나리오만 보고 당시 선생님들이 걱정을 많이 했었다. 시나리오의 행간을 아는 사람이 성현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현이는 선생님들을 설득시키려 하기보다 본인의 비전을 확실히 세우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파수꾼>의 편집본을 시사하는 날, 성현이가 옳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확신이 부러웠다.

<씨네21>_<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땠나.

조성희_나는 영화 제목이 재밌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 말장난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 제목을 굉장히 재밌는 말로 지어놓고 정작 영화는 시시한 경우들이 가끔 있지 않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말이 너무 재밌어서 오히려 기대보다는 의심을 하게 된 거다. 그랬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는 너무나 핵심을 꿰뚫는 제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만화적인 요소를 좋아하는 취향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장난스럽고 위트 있는 표현 방식이 좋았다. 이건 비단 농담 섞인 대사를 얘기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적 콘티뉴이티, 미술적인 측면에서도 감독의 야심이 보이더라. <짐승의 끝>을 만들어봐서 제작연구과정이 장편영화를 찍기에 얼마나 가혹한 환경인지를 잘 안다. 감독의 야심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그런 상황에서도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연출자의 의지를 높이 살 만하고. 하여간 깜짝 놀랐던 작품이다.

윤성현_힘든 현실을 동화적 화법과 위트를 통해 보여준 점이 좋더라. 영화에서 수남(이정현)이 처한 현실이 너무 고되다보니 그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면 보는 사람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꼈을 수도 있다. 동화의 장점이 상징성이 있다는 거잖나. 무게감 있는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더 넓은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한 능동적인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처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연출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씨네21>_영화과를 졸업해도 장편영화를 극장에 거는 게 하늘의 별 따기인 시대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연구과정의 작품은 CGV아트하우스를 통해 극장 개봉한다는 점에서 신인감독에게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각각 <짐승의 끝> <파수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개봉한 뒤, 어떤 반응을 체감했는지 궁금하다.

안국진_확실히 제작사들과 미팅은 많이 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장편영화 한편을 찍은 감독으로 온전히 대우를 해준다는 점이 좋더라. 다만 내 영화를 장르적으로 해석한 분들이 많았는지 ‘센 영화’를 같이해보자는 제안이 많은 건 의외였다. 나는 그런 영화가 나와 잘 안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마치고 난 뒤 주연배우인 이정현씨의 덕을 많이 본 입장에서 여배우들이 더 많은 역할을 소화할 수 있도록, 앞으로 ‘여자영화’를 계속 만들어야겠다는 책임감도 느꼈다. 그게 <여고괴담> 리부트에 합류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조성희_나는 <짐승의 끝> 후반작업을 하고 있을 때 영화사 비단길에서 차기작을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은 것 외에는 엄청나게 뜨거운 반응을 실감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웃음) 안국진 감독님 말씀에 덧붙이자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장편제작연구과정이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영화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스템의 장점은 영화학도들에게 장편을 만들 수 있는 기회도 주지만 동시에 상업영화에서 하기 힘든 시도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윤성현_<파수꾼>을 만들고 좋은 시나리오들을 많이 받았다.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인감독으로서는 드문 일이잖나. 보통 기성감독님들에게 시나리오가 더 많이 가니까. 하지만 나는 워낙에 내 색깔이 뚜렷하다보니 상업영화의 경계선 안에서 내 색깔과의 접점을 찾는 과정이 쉽진 않았다.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 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다양한 시나리오를 많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화적 자양분이 됐고, 상업영화란 게 이런 것이고, 이런 방식으로 영화 화법을 가져가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조성희_명필름도 영화학교를 만들지 않았나. 연출자가 혼자 발로 뛰어서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을 받는 게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신인감독들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환경, 영화를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는 환경을 지원해주는 브랜드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기관들이 늘어나면 한국영화 토양 자체가 두터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국진_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상업영화 제작사들이 ‘아, 저 영화가 반응이 좋으니 저 감독을 연출자로 데려와야겠다’라는 생각에서 그치지 말고 관객이 그들의 새로운 시도에 주목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사실 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들이 일반 관객을 위해 만든 작품들은 아니잖나. 연출자 본인의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 찍는 거고, 어떻게 보면 불편하고 배려 없는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통한 영화가 있다면, 그건 연출자들의 새로운 시도에 관객이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까지는 장편제작연구과정의 실험과 시도가 상업영화계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는 점이 아쉽다.

윤성현 감독.

<씨네21>_안국진 감독의 말처럼, 한국영화아카데미라는 영화교육기관 안에서 만든 영화와 충무로에서 준비하는 장편 상업영화 사이의 온도차가 있을 거라 짐작한다. 조성희 감독은 <늑대소년>을 만들었고 두 번째 상업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의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윤성현, 안국진 감독은 첫 번째 장편 상업영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상업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느끼나.

윤성현_이 주제에 대해서는 내가 할 말이 많다. 나야말로 정말 오랫동안 영화를 안 하고 있으니까. <파수꾼>을 만든 이후 상업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내 색깔을 잃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다보니 상업영화와의 접점을 찾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 과정에서 내가 느꼈던 건 한국 상업영화는 텍스트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거였다. 나는 시나리오의 행간이나 감독의 색채가 텍스트에서 다 보인다면 그건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영화를 보면 관계성 드라마는 많은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처럼 텍스트로는 그 진가를 알 수 없는 영화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비티>(2013)도 마찬가지다. 별 내용이 없지 않나. 샌드라 불럭이 우주에서 조난되어 살려고 고군분투하다가 지구에 도착하는 영화다.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대결>(1971)도 자동차 두대가 달리고 있는데 트럭이 화가 나서 추격하고, 막판에 트럭이 폭발하며 끝나는 영화다. 굉장히 시네마틱하고 영화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너무너무 좋은데 내용적으로는 따지고 보면 별거 없는 작품들. 그런 시네마틱한 작품들이 한국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감독님들이 자신의 색깔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실 텐데, 연출자의 색깔을 시네마틱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산업적 토양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조성희_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나는 상업영화를 만들 때 각오를 좀 달리하고 시작했다. 아카데미 안에서 영화를 만들 때에는 ‘네가 하려는 게 뭐냐’라는 질문을 교수님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다. 그건 정말 나다운 작품을 만들길 바라는 말씀이셨을 거다. 하지만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영화를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니 각오를 다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성현이가 얘기한 대로 신인감독으로서는 자신의 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시나리오밖에 없다. 장편제작연구과정의 영화를 보았다고 해도 ‘얘는 이런 애구나’ 정도의 가능성을 볼 수 있을 뿐이지 그걸로는 약하다. 텍스트를 집중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 개선될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 한편, 한편을 만드는 게 모험이고, 좋은 감독과 배우들이 만들어도 결과를 알 수 없는 게 영화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어느 정도 요령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신인감독들이 환경을 바꿀 수 없으니 처음에는 텍스트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도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안국진_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모험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작사들로부터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어디서 본 것 같고 어떤 감독이 붙어도 어느 정도 수준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작품들이 꽤 있더라. 무엇이 안전한 선택인지는 알겠지만, 한국영화를 발전시켜왔던 영화들은 이전에 보지 못한 스타일의 작품들이지 않았나.

조성희_기획 개발 단계에서 영화적 가능성을 프리비주얼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게 지원을 해주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한국도 슬슬 그런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필요치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종이에 쓴 글자뿐만이 아니라 그림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연출자들에게 주는 것 말이다.

윤성현_텍스트에 집중하는 영화들이 꼭 나쁘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좀더 다양한 영화가 나오려면 텍스트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영화를 준비하며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도 텍스트상에서 보여지지 않는 것들을 영화적 화법으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준비 과정에서도 종종 조성희 감독의 말처럼 현실의 벽을 실감한다. ‘드라마를 더 넣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시나리오상에서 설득이 되어야 비로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안국진_정말 어려운 문제다.

조성희_한국 관객도 그 정도 준비는 됐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며 관용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미국 드라마, 영국 드라마, 할리우드영화, 웹툰. 정말 기상천외하고 재미있는 콘텐츠들이 요즘 얼마나 많나. 다만 영화는 워낙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매체이니 조심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나는 점점 더 다양한 영화들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될 거라고 본다. 사실 <탐정 홍길동>도 드라마가 강렬한 작품은 아니다. 어느 정도 다양성을 향한 의지의 혜택을 본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현이가 준비하는 작품도 잘 풀릴 거라 기대하고 있다.

<씨네21>_윤성현 감독의 신작 얘기를 좀더 듣고 싶다.

윤성현_<사냥의 시간>(가제)은 텍스트상으로 보았을 때에는 통속극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 청춘들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누군가에게 추격당하는 이야기다. <파수꾼>과 닮은 점도 있지만 표현 방식에서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될 거라 생각한다. 조성희 감독의 <탐정 홍길동> 예고편을 보면, 1980년대가 배경이지만 누가 봐도 80년대처럼 보이지 않는 새로운 느낌이다. 그렇게 나 역시 리얼리즘에 기반하면서도 그것을 우화적으로 표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안국진 감독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헬조선’을 우화적으로 풀어낸 걸 인상 깊게 본 것도 그러한 우화적 표현 방식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처럼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직선적이다. 액션 장면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어떤 면에서 보면 재난영화처럼 느낄 수 있는 지점도 있다. 장르를 말하자면 약간의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액션 서스펜스물이라고 할까. 이제훈 배우와 함께 준비하고 있고, 지금 막 다른 배우들의 캐스팅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서스펜스 이야기를 했는데, 내게 있어 상업성의 절대적 기준은 서스펜스다.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가 그렇고 베넷 밀러의 <폭스캐처>(2015)가 그렇듯, 서스펜스라는 장치를 통해 작품성과 상업성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씨네21>_다른 감독들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들에게 상업성의 절대적 기준은 무엇인가.

안국진_나에게는 ‘유머’가 아닐까 싶다. 사실 유머는 장르와 상관없이 어떤 작품에도 넣을 수 있다. 위트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유머를 담고 있는 영화를 지향하고 싶다.

조성희_개인적으로 상업영화로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선명한 이야기’다. 물음표가 안 생기는 이야기들 말이다. 누가 그게 무슨 영화냐고 물어봤을 때, 한두 문장으로 딱 떨어지는 이야기가 전제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모든 영화가 다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다. 분명하다는 건 흥미롭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는 그게 첫 단계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딱 떨어지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새롭게 풀어내는 게 중요하다. <폭스캐처>도 감정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걸 풀어내는 과정이 무척 매력적이고 새롭고 근사하잖나. <파수꾼>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마찬가지고.

윤성현_그렇다면 <탐정 홍길동>은 어떤 영화인가? 한 문장으로 소개해달라.

조성희_탐정 사무소의 사립 탐정이, 원수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그를 뒤쫓는 과정에서 숨어 있는 거대악을 발견하고, 그 거대악과 맞서는 이야기다. (웃음)

윤성현_전혀 명쾌하지 않은데? 본인이 생각하는 상업적 기준과 다른 것 같은데? (좌중 폭소) 농담이다.

조성희 감독.

<씨네21>_조성희 감독은 두 번째 장편영화를 준비하며 첫 작품 <늑대소년>과 달라진 점이 있다고 느끼나.

조성희_일단 태도가 좀 달라졌다. 이번 영화에서는 조금 무리가 있고, 환경적 제약이 있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이 있었다. <늑대소년>도 나름대로 열심히 찍었지만 지나고 나니 ‘좀더 고민해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것 같아서, <탐정 홍길동>을 준비하면서는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기 위해 태도를 달리하자는 각오를 하고 들어갔다.

안국진_궁금한 게 있다. 저예산영화와 상업영화 현장이 많이 다른가.

조성희_나는 큰 차이를 못 느꼈다. 거의 비슷했다. 물론 스탭들이 더 많고, 장비와 세트도 많지만 큰 차이를 느끼진 못했다.

안국진_그게 궁금했다. 연출자 입장에서 ‘이걸 하자’고 했을 때 웬만하면 구현이 가능한지. 저예산영화는 반드시 지켜야 할 건 지키되 도저히 안 되는 건 타협을 해야 하잖나. 상업영화는 가능한 한 연출자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환경인지가 가장 궁금했다.

조성희_생각해보니 그런 면에서 좀 다르다. 예를 들어 아카데미 장편제작연구과정은 연출자가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 같다. 아주 말단에 있는 사소한 요소까지 개입할 수 있었지만 그 대신 본인이 힘들고 그만큼 할 게 많았다. 그런데 <늑대소년>도 그렇고 이번 작품도 그렇고, 도와주는 사람도 많고 전문가들이 많지만 어딘가 연출자로서 닿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에는 스탭들을 믿는 게 중요하다. 촬영, 조명, 미술 파트 등 ‘우리 모두가 크리에이터’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목적지만 확실히 정해놓으면 된다.

<씨네21>_그러고 보니 조성희 감독과 윤성현 감독은 이제훈이라는 배우를 공유하고 있다. <탐정 홍길동>에 이제훈을 캐스팅하는 데 <파수꾼>의 영향도 있었나.

조성희_당연히 있었다. 이제훈 배우가 출연한 영화 중에 가장 많이 돌려본 영화가 <파수꾼>인데, 영향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유튜브에 보면 <파수꾼>의 명장면을 편집해놓은 영상이 있다. 기태가 친구 집을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당하는 장면이었는데 이 장면을 이제훈 배우를 캐스팅하기 전에도 많이 보고 캐스팅한 이후에도 많이 봤다.

윤성현_내 팬이었구나. 가끔씩 <파수꾼>을 왜 봐. (웃음) 나도 안 본 지 3, 4년은 된 것 같다.

조성희_같은 것도 계속 자주 보면 새롭게 보일 때가 있잖나. 이제훈이라는 배우를 더 깊게 보고 싶었다. 성현이에게도 여러 번 물었었다. 제훈씨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는지, 어떨 때 연기를 좀 편하게 하는지 조언을 구했다. 많은 남자배우들에게 하는 칭찬 중 하나가 선과 악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말인데, 제훈씨야말로 그런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굉장히 유약하고 순박하고, <건축학개론>에서 볼 수 있는 순진한 모습도 있는 반면에 되게 사악해 보이는 면도 있거든. <탐정 홍길동>의 주인공은 멋있지가 않다. 정의를 위해 싸우고, 약한 사람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이런 모습이 없다. 대신 되게 교활하고 비겁하거나 잔인할 때도 있고, 신념도 없고,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귀엽고 매력 있어야 하는 인물이다. 불리한 점들을 갖췄음에도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제훈씨와의 싱크로율이 99%는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윤성현_<탐정 홍길동>의 편집본을 봤는데, 개인적으로 이제훈 배우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면을 이 영화에서 봤다.

조성희_성현이가 이제훈 배우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굉장히 집중력이 좋은 배우이고, 동물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라고. 분위기를 마련만 해주면 뭐가 나올지 예상이 안 되는 배우라는 얘기를 했는데, 이번 영화를 촬영하며 순간순간 상황 속으로 완전히 빠져드는 모습을 보며 굉장히 놀라웠다. 그런데 실제 모습은 점잖고 조용하고 굉장히 생각이 깊고, 사람 자체가 우아하다고 할까. 그렇더라. <늑대소년>의 송중기는 쾌활하고 명랑하고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배우였다면, 이제훈은 진중하고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전작에서 성현이가 함께 작업했기 때문에 배우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도움이 많이 됐다. 그런데 그 얘기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윤성현 감독이 현장에서 어떻게 배우들과 소통하는지. 나도 정말 많이 물어봤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딱 보면 엄청난 묘수를 부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파수꾼>이나 단편 <바나나 쉐이크>(2011)처럼 성현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하나같이 배우들 연기가 진실되게 보이는 거다. 그래서 나는 성현이가 그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배우들과 어떻게 대화를 하는지. 배우들에게 원하는 걸 어떻게 이끌어내는지.

안국진_나도 궁금하다

윤성현_나는 영화를 찍을 때 진심으로 배우가 왕이라는 생각을 한다. <파수꾼>에 출연했던 배우들은 거의 다 한두 작품 정도 출연했거나 작품이 없었던 신인이었다. 하지만 한번도 내가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동등한 창작자로서 진심 어리게 소통했던 것 같다. 내가 뛰어난 점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딱 하나 좋은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진심을 볼 줄 안다는 거다. 이 사람이 가짜로 연기했는지 진심으로 연기했는지 직감적으로 구분을 잘하는 편이다.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기보다는 배우들에게 질문을 많이 한다. 지금 어떤 걸 느꼈나. 그게 진심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 창작자로서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여지를 주는 것이지 특별히 묘수가 있는 것 같진 않다.

조성희_나도 들으면 ‘아, 그렇구나’ 하는데 현장에 가면 어렵다. 그래서 성현이의 작업방식이 아직도 참 신기하다고 느껴진다. 내가 가장 놀랐던 작품은 단편 <바나나 쉐이크>였는데, 왜냐하면 주연배우가 아카데미 동기였기 때문이다. 그 영화를 보면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게 보인다기보다 성현이의 강력한 연출이 보인다. 잘 아는 사이다보니 성현이가 그 친구에게 얼마나 많은 걸 퍼올렸는지 알기에 그런 점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중에 성현이가 단편을 찍는다면 정말로 한번 출연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배우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웃음)

<씨네21>_안국진 감독은 최근 <여고괴담> 리부트를 준비하고 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이후 여자영화를 만들겠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는데, <여고괴담> 시리즈야말로 수많은 여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이자 본격적으로 여성 캐릭터에 대한 탐구를 시도할 수 있는 장르물이다. 최근 시나리오 작업을 하며 어떤 고민을 하고 있나.

안국진_첫 번째 고민은 이런 거다. 현 사회에서 여성들은 어떤 위치에 있을까에 대한 고민. 동시에 ‘여성이기 때문에 이럴 것이다’라는 선입견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고괴담> 리부트를 준비하면서 이 시리즈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는 여고생들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체였다면, 이번에는 선생님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해보면 어떨까 싶더라. 고등학교라는 사회 속에서 학생이나 선생님이나 고단하기는 매한가지다. 이번 영화는 <여고괴담> 1편의 프리퀄이 될 거다. 1편에서 이용녀 선생님이 연기했던, ‘늙은 여우’라는 별명을 가진 박기숙 선생을 기억하나. 그 선생님의 전사(前事)에 대해 다뤄볼 예정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남성 캐릭터보다 여성 캐릭터에 대해 구상하는 게 재미있더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원래는 남자가 주인공이었는데 여자로 바꾸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주인공이 가진 약점이 많을수록 이야기가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윤성현<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며 확실히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걸 느꼈다. 성별 하나를 바꿨다고 해서 이렇게 약점이 많아지다니!

윤성현_나야말로 단편 시절부터 여성 캐릭터가 거의 전무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그런 점에서 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안국진_한번 써보라. 나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준비할 때만 해도 여성 캐릭터를 아예 염두에 두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막힌 상황에서 어떤 사진집 속 여자의 모습을 보고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싶었던 거다.

조성희_그래서 나는 좋더라. 영화 속 수남의 캐릭터는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어려움을 돌파하고 삶을 개척하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에게서나 자주 볼 수 있었던 추진력 있는 캐릭터가 여자라는 점에서 이 인물에 입체감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에이리언>의 시고니 위버가 그렇듯 말이다. 성현이 영화도 캐릭터가 두텁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남자들이 주인공이고 ‘이 새끼 저 새끼’ 하지만 감성 자체가 여성적인 면이 있다는 점이다. 친구를 다른 애들에게 빼앗기기 싫고, 자기 감정을 숨기려 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할 때 가장 외롭고. 솔직히 남자 중고등학생들은 그렇게 감정을 쪼갤 수 있는 인간들이 아닌 경우가 많다.

안국진_나도 <파수꾼>을 보며 눈물이 났던 게, 10대 때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을 이제야 알게 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조성희_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기억나게 해준다는 점이 중요하다. 성의 전형성은 원래부터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없어 보이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주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요즘 영화 속 성 역할에 관심이 많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며 굉장히 통쾌했다. 그런 영화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고, 반드시 여자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불리한 입지에 처해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수록 영화의 입지도 좁아지니까.

안국진_<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들고 난 뒤 어떤 영화를 보든 주인공을 여자로 바꿔 상상해본다. 그런데 남성 캐릭터를 여성 캐릭터로 바꿀 수 없는 한국영화들이 굉장히 많더라. 그건 한국 사회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는 늘 시대와 함께 가는 것이니까. 그런 부분에서 사회 속 여성의 위치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생각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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