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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작업해봐야 한다” - 2집 《신의 놀이》 발표한 이랑
이다혜 사진 최성열 2016-08-18

이랑의 말버릇은 “~하거나 할 때”다. 음악을 만들거나 할 때, 영화를 만들거나 할 때, 글을 쓰거나 할 때. 그도 그럴 것이, 이랑은 그 모두를 다 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나와 단편 <유도리> <변해야 한다>를 쓰고 연출했고, 만화책 <이랑 네컷 만화>와 <내가 30代가 됐다>를 냈고, 웹드라마 <출출한 여자>와 <게임회사 여직원들>을 연출했으며, 음반으로 말하면 1집 《욘욘슨》에 이어 2집 《신의 놀이》를 발표했다. 《신의 놀이》는 CD 없이, 책을 구입하면 음원을 다운로드해 들을 수 있게 했고, 1집과 2집은 일본에서 동시에 발매되었다(일본의 《신의 놀이》는 CD가 출시된다). “언제 어떻게 개죽음을 맞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오늘 하루 스트레스받지 않고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략) ‘즐겁게 살자’고 마음먹고 사는데도 즐겁지가 않았다.” 이랑은 ‘나’의 세계와 바깥의 세계가 충돌하고 확장되면서 흘러가는 모습을 ‘성장’의 서사 안에 가두지 않고 담아내는 중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노래하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랑은, 바로 그런 이유로 쓰고, 찍고, 그리고, 노래한다.

-《신의 놀이》 앨범은 CD 형태가 아니라 음원 다운로드만 하게 되어 있다.

=제작사 소모임음반 대표인 김경모씨가 선결이라는 밴드를 한다. 김경모대표 말로는 선결 음반을 낼 때 패키지에 신경을 많이 써서 냈는데 막상 산 사람들이 CD 드라이브가 없어서 무쓸모한 굿즈같이 되더라는 거다. 그 말을 듣고 CD 없이 음반을 내는 쪽으로 생각하다가, 노래를 만들면서 메모해둔 것이나 써놓은 글이나 가사를 앞뒤로 붙여봤다. 처음엔 도톰한 부클릿 같은 걸 생각했는데, 아예 글을 더 써서 책으로 만들게 되었다.

-커피숍(아메노히 커피점)이나 행사(‘소설을 읽는 10가지 방법’ 행사)처럼, 완벽하게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녹음한 곡들이 있다.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지금도 보면 시끄러운 게 지나가고(창밖에서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뒤에 다른 사람이 있고 푸닥거리는 소리가 녹음에 다 들어가잖나. 밖에서 보면 무슨 얘기하는지는 몰라도 이상하고 무서운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데, 보기에는 일상적인 풍경이고. 녹음할 때 아무것도 없는 데 갇혀서 감정을 만들어내는 일이 내게는 상당히 어렵기도 하고.

-아티스트의 사생활, 개인적인 이야기가 작품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고 앨범으로 묶는 단계에서 필터링을 하게 될 텐데 그 경계를 어떻게 정하나.

=나는 원래 싸이월드에 실명이 다 나오는 일기를 적나라하게 썼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 하고 이름을 쓰지 않고 일기를 쓰다 결국 없애버리고 혼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 깎아야 하는 것이 있긴 있었다. 인생이 한번 사는 것이어서. (웃음) 나는 영화를 만들거나 할 때 나를 소스로 많이 하기 때문에 나를 캐릭터처럼 볼 때가 많다. 이랑이 이름처럼 안 느껴지고 캐릭터처럼 느껴지고. 에세이 쓰거나 할 때, 어떻게 들릴까를 생각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쓰면 그게 재미있기 때문에… 뭔 얘기 하려고 그랬지? … 아, 그래서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와 되게 적나라하다, 솔직하다, 자기 얘기를 이렇게까지 하는 게 놀랍다고 하는데, 뭐가 놀랍다는 거지, 깎아서 쓴 건데. 되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

-깎아내는 기준은 무엇인가.

=나한테 공격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개인정보를 쓰지 않는다거나 누군가를 죽이는 방법을 어느 정도까지 자세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같은 것.

-그런 내용으로 노래가 되기도 하나.

=딱히 구분해놓고 메모를 하진 않는다. 메모장을 보면, 중구난방으로 쓰여 있다. 그걸 그대로 노래로 부를 때도 있고, 일기를 그대로 부를 때도 있고. 그런데 완성을 할 때는 입에 맞는 타이밍을 맞추고 손봐가면서 작업한다. 초반에는 그냥 그대로 부른다. 말하는 것처럼 부른다. 작곡 수업할 때도 그 방식으로 가르친다. 일기를 써오게 하고 읽게 하고 멜로디 없이 읽게 하면서 그 옆에서 내가 기타를 계속 친다. 그러면 음이 들리는 것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면서, 음이나 리듬 때문에 자꾸 자기가 읽는 것을 바꾸게 된다. 그 과정을 다듬으면 노래가 되니까. 그런 식으로 만들고 가르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영상이 유튜브에 있다. 처음엔 사진처럼 보이는데 가만히 보면 동영상이다. 독특한 방식으로 시간을 담아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아마 영상 작업의 중요한 부분일 텐데. 흐르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서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

=유튜브에 올리면서, ‘이 트랙은 아메노히 커피점에서 원 테이크로 녹음한 것입니다’라고 넣었다. 기타로 데모를 녹음한 게 있어서, 첼리스트 이혜지씨에게 노래를 들려주면서 어떻게 할까 상의했다. 그분이 한번 해보자고 했다. 코드 네개가 계속 반복되는데, 둘이 마주보고 여기에서 약간 올라가요 하는 식으로 판소리하듯 사인을 주고받으며 녹음했다. 가사가 너무 길어 내가 까먹기도 해서, 그렇게 두세번 녹음한 것 중 한 테이크였다. 소름 돋는 경험이어서, ‘그 순간을 담았어야 했는데!’ 하고 아쉬워했다. 그런데 그걸 재연하는 건 너무 구리다고 생각했다. 선공개로 한곡을 유튜브에 올리기로 했는데, 보통 뮤직비디오가 아니면 앨범이미지를 같이 올리잖나. 사진을. 희한한 게, 음악 만들었어, 하고 들려주면, 화면엔 가사도 없고 볼 게 아무것도 없어도 맨날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있다. 딴 거 하면서 들어도 되는데. 굳이 안 움직이는 사진 보고 있을 거면, 사진인 줄 알았는데 조금 움직이는 거 해보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과일이 썩어들어가는 과정을 찍은 작품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최대한 안 움직이는데 그걸 찍어서, 누구는 사진인 줄 알고 안 볼 수도 있는데, 그냥 멍하게 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신기하다 하고 재미있어할 만한 걸 만들어보자고 했다.

-책에 예술의 목적을 ‘체험에 의한 위로’라고 적었던데, 이 말은 예술을 소비하는 사람에게뿐 아니 라 예술을 창작하는 이에게도 해당하는 말일까.

=내게는 그렇다. 쓰면서 해소되는 게 많아서. 과거에,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저 사람이 왜 나를 싫어하게 됐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하며 화가 나면, 그걸 써보곤 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캐릭터로 만들어서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기 때문에 그 근거를 생각해야 하지 않나. 그러면서 알게 되는 거다. 내가 하는 행동이 이 사람 인생에서는 불편할 수 있구나. 내가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작업해봐야 하고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데 결과물은, 소스가 무엇이든 소비할 사람에게… 나는 위로라고 얘기했지만 이것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감정 변화를 주어야 한다.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돈을 내고 사는 경우에는. 세상에 내놓지 않은 내 작업들을 구분해보면, 내 선에서 만족하고 끝나는 것들은 안 내놔도 되는데, 내놓음으로써 사람들이 재밌어한다든가, 슬퍼한다든가, 그런 것들을 조금 줄 수 있는 것들을 다듬어서 내놓는다.

-트랙리스트 순서와 책에 수록된 곡 순서가 다르다. 그 순서가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다 들어봐야 글과 노래를 연결지을 수 있다.

=음반은, 그냥 음원만 듣는 흐름을 고려해서 트랙리스트를 짰고, 책은, 읽는 흐름을 생각했다. 굳이 일치시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트랙리스트는 몇번 바꾸면서 순전히 듣는 사람들을 고려해서 했다. 1번부터 5번까지, 6번부터 끝까지 듣는 걸 기준으로 한 게 이 결과물이다.

-앨범을 내고 속지를 만들 때, 듣는 사람에게 친절한 방식으로 가사, 후기, 이런 것을 정확히 곡과 매치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신의 놀이》는 전부 섞어놨기 때문에 책이 책 자체로도 잘 읽힌다.

=작품이라는 것은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시작부터 조금 낯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늘 다니던 길이면 신경을 안 쓰지만, 갑자기 어두운 데가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다.

-아, 이 음반은 ‘컴컴한 데’인가.

=(웃음) 그렇게 들어왔을 때, 더 들어올 수 있게, 자연스럽게 유도해줘야 한다. 들어오자마자 너무낯설면 다시 돌아가고 싶어진다. 듣고 읽는 사람이 안 튕겨나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을 안 튕겨나가게 만드는 작품들은 무엇인가.

=영화로 치면, 이창동. 소설은 커트 보네거트. 음악은 디즈니 O.S.T, 김일두.

-《욘욘슨》과 《신의 놀이》 사이에 변한 게 있을까.

=그냥 흐름이 변했는데, 《욘욘슨》 때는 내가 겪은 상처가 가족에게 겪은 상처나 연애할 때 잘 안되는 것들 정도였는데, 지금은 훨씬 이슈가 많다. 요즘 제일 많이 생각하는 것은 여성 혐오와 폭력, 그리고 병과 죽음.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수업한 얘기를 하면서 과거를 떠올리는 대목이 있다. “내 방 책상판에 깔린 얇은 유리 단면에는 내가 어른이 되면 죽일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놓았었다.” 그리고 이제 어른이 되었다. 과거에 적은 그 이름들은 어떻게 되었나.

=이제 내가 어른이 되니까, 실수할 수밖에 없구나 싶다. (웃음) 그때 책상에 쓸 수 있는 이름이 언니, 엄마, 아빠밖에 없었는데. 집에서 나온 다음에 거짓말을 되게 많이 했다. 잘 지낸다고. 그게 점점 너무 힘들어져서 어느 날은 용기를 내서 잘 못 지낸다고 얘기를 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벌어지더라. 내가 그동안 거짓말을 했던 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왜 ‘사실 죽고 싶었어, 오늘’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엄마, 아빠도 내 나이를 거쳐서 어른이 된 사람들인데.

이랑 2집, 《신의 놀이》

“가벼운 시대에 가장 무거운 음반을 만들고 싶었다.” 《신의 놀이》 보도 자료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여성 혐오 반대 집회에서 이랑은 노래를 불렀다. 2집 수록곡 2곡을 불렀다. “노래 들은 분들이 남긴 글을 찾아 읽는데, 이랑의 곡이 여성 혐오와 관계가 깊다고 하더라. 그런 곡은 아니었는데. 그러다 아, 내가 지금 그런 걸 생각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랑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경험적 사실로부터 출발해 노래를 만든다. 그런데 듣다보면, 그것이 그려내는 지금 이곳의 풍경이 있다. 지옥도에 가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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