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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세계에서 <마이 리틀 자이언트>가 지닌 의미를 더듬다
송경원 2016-08-24

<마이 리틀 자이언트>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숱한 필모그래피 가운데에서도 특별하게 기억해야 할 작품이다. 스필버그의 영화세계가 과거의 영광이나 향수에 빠지기는커녕 여전히 전진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할리우드 최후의 작가와 유능한 장사꾼 사이를 오간다며 오해받았던 그의 오랜 행적이 드디어 하나로 모아지는 오솔길의 길목에 서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흥행 실패는 영화산업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앞으로의 할리우드영화, 특히 디즈니를 중심으로 한 영화들의 미래에 대한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다. 이에 조금 늦었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긴 모험의 연장선에서 <마이 리틀 자이언트>가 어디쯤 와 있는지 그 위치와 의미를 더듬어보기로 했다. 여전히 영화라는 꿈을 믿는 거장은 먼 길을 에둘러 다시금 순수로 회귀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던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필버그에게 ‘모든 꿈은 이미 영화다’.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비교적 평평하고 긴장을 위한 작위적인 장치도 그리 많지 않다. 포커스를 온전히 주인공 그룹에 맞췄기 때문에 등장인물도 상당히 적은 편이다. 갈등의 낙차가 크지 않아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순간은 많아도 의자 앞으로 온몸을 당기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긍정과 낙관이 버무려진 시선 위에서 조금은 쉽게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는 엔딩을 단조롭게 받아들인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초기작에서 선보였던 낙관과 순수의 세계로 돌아간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

스필버그의 담담한 판타지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마이 리틀 자이언트>에 대한 몇몇 아쉬운 평가를 접하며 불현듯 1982년작 <E.T.>가 떠올랐다. 아마도 이런 지적들은 <E.T.>에 대한 평가라 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외계인을 순수와 호기심의 대상으로 그린 <E.T.>는 적대와 공포로 포장하는 게 당연했던 당시 외계인 소재 영화들과의 차이 덕분에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금 이와 같은 전개를 들고 나온다면 마치 골동품에 먼지를 터는 것처럼 지루하고 단순하다는 볼멘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 앞에 ‘새로운 세대를 위한 <E.T.>’라는 홍보문구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건 장점과 단점을 공유하는 두 영화가 바라보는 지점이 그만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담담한 어조로 꿈을 말한다. 이 영화는 꿈을 다루는 거인에 대한 상상이자 꿈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고백이며 한번도 손에서 꿈을 놓은 적이 없는 어른이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이야기다. 심심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순진한 이 영화의 전개는 초창기 스필버그 영화에 드러나는 해피엔딩으로 직진하는 서사와 닮았다. 그때는 감탄했던 요소들이 지금에 와서는 순진하고 늘어지는 전개처럼 느껴진다면 그 시절 순수에 반했던 관객이 그간 숱한 이야기와 자극의 세례를 받고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이가 그렇게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스필버그의 꾸준한 변화를 지켜봐온 한 사람으로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다. 하지만 <E.T.>와 같은 낙관적이고 순진한 믿음에 기대고 있냐고 하면 전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원작인 로알드 달의 이야기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동화는 논리로 납득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이 덮고 자는 은밀한 상상력의 이불을 살짝 들춰보는 쪽에 가깝다. 여기에 <E.T.>의 시나리오작가 멜리사 매티슨의 각색이 더해지자 영화는 좀더 모험극에 가까워지고 먼 길을 돌고 돌아온 스필버그의 완숙한 손길은 거인의 얼굴 주름에 무게를 더한다. 감정은 좀더 통제되고 이야기는 적극적으로 담담해졌다. 대신 영화가 재현하는 꿈과 환상의 경계는 한층 엷어진다. 마음 착한 거인이 소녀와 우정을 나누고 아이들을 잡아먹는 거인들을 혼내준다는 주요한 이야기 줄기에 별반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소하고 자잘한 순간, 이를테면 소녀와 거인의 끊임없는 수다나 꿈을 채집하는 장면들이 카메라의 주요 관심사다. 달리 표현하면 서사에 통합되지 않는 얼룩들을 가능한 한 오래 주시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스필버그가 꾸는 영화에 대한 꿈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중간 아이들에게 꿈을 불어넣는 BFG(Big Friendly Giant)를 향해 소피는 아쉬움을 담아 말한다. “꿈은 짧아요.” BFG는 부드럽고 깊은 눈빛으로 소피를 바라보며 “바깥에서 보면 짧지만 안에서 보면 길단다” 라고 답해준다. 이 짧은 문답에 영화와 꿈에 대한 스필버그의 오랜 해답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스필버그에게 영화와 꿈은 이음동의어가 아닐까 싶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

함께 나이 들어가는 캐릭터, 긴 여정의 종착지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확실히 스필버그의 초기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물론 스필버그가 과거의 향수에 기대어 가족영화의 패턴을 답습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2000년 이후 한동안 스필버그의 변화를 지켜봐왔다. <E.T.>나 <미지와의 조우>(1977)에서 보여줬던 낮선 세계를 향한 긍정과 믿음에 어둠의 그림자가 끼기 시작한 건 아마도 (2001)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정확히는 해피엔딩을 향한 방향 자체가 바뀌었다기보다는 인물의 내부에 깃들 수 있는 어두운 일면, 굴곡과 주름에 좀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의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은 여전히 해맑은 아이의 얼굴을 한 모험가지만 그가 끝내 도달하게 될 여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관객이 의 엔딩을 납득한다면 그건 데이빗이 모험 중에 보인 한결같은 태도를 존중하는 차원이지 그의 선택에 함께 동참하는 건 아닐 터다. 그리고 <우주전쟁>(2005)에 이르면 스필버그는 심연을 들여다보다 끝내 심연에 동화된 것처럼 보인다. 호러에 가까운 이 영화의 태도는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자라지 못한 소년을 관찰하는 듯하다. ‘집’으로 상징되는 어딘가로 모험을 떠나야 한다는 줄기는 변함이 없고, 그 사실을 강박적으로 수행하는 주인공(톰 크루즈)도 여전한데 주변 환경은 어느 날 갑자기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영화가 더이상 해피엔딩에 이를 수 없는 건 낙원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관객마저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해될 수 없는 상황에 던져진 자기중심적인 인간. 악몽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

<링컨>(2012)과 <스파이 브릿지>(2015)가 놀라웠던 건 그 유장한 리듬과 속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필버그가 매료된 인물의 위치 때문이었다. 강건한 의지의 영웅, 미국이 여전히 지향하는 가치를 드러낼 고결한 인물로 충분히 채색할 만한 인물들을 꺼내놓고 스필버그는 문득 인물의 가장 저속하고 어두운 면을 파고든다. 다만 그 방식이 주변 상황과의 충돌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이 이색적일 따름이다. 여기서 스필버그는 인물이 행하는 행동의 옳고 그름은 부차적으로 미뤄두고 인물이 무엇을 강건하게 믿고 있는지와 같은 상태에 집중한다. 가령 링컨은 자신의 믿는 바를 위해 정치의 더러운 일면에 과감히 몸을 던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링컨의 악몽은 어쩌면 선의와 믿음, 현실 사이에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링컨을 위한 마지막 변명처럼 보인다. <스파이 브릿지>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적어도 외적으로는 한치의 흔들림이 없는 인물에 주목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지지하는 주인공은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이 아니라 루돌프 아벨(마크 라일런스)이라고 생각한다. 아벨은 단 한 장면의 번민하는 숏도 없이 의지를 관철시키는 인물이다. 물론 그가 번민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만 영화는 그 번민의 과정에 시간을 할애하는 대신 이미 어느 정도 체념한,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는 인물에게 경의를 표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인물의 심리 묘사를 게을리함으로써 ‘일어서는 사람’으로서의 위치를 고수하는 아벨을 존중하는 것이다. 스필버그가 21세기 영화산업 한가운데에서 유장한 리듬을 뽑아낼 수 있는 비결, 느린 속도를 유지하는 이유를 <마이 리틀 자이언트>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스필버그의 작가적 역량과 제작자 마인드 사이 분열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양쪽에서 부당하게 공격을 받는 애매한 위치를 두고 혹자는 전혀 다른 톤의 영화를 차례로 선보이는 스필버그의 갈지자 행보 탓으로 책임을 미루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그 가벼운 손가락질 사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의 BFG를 보니 스필버그의 캐릭터들이 걸었던 숱한 변화가 마치 하나의 긴 여정처럼 보인다. 그리고 문득 어쩌면 스필버그는 자신의 캐릭터들과 함께 나이를 먹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동굴 속에서 다양한 꿈을 조합해 새로운 꿈을 창조해내는 거인의 모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스필버그 자신의 작업에 대한 투영이다. 숱한 오해와 비난, 때론 무가치하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꿈을 만들어온 거인. “뭐라도 해야 하는구먼”이란 말을 반복해서 되뇌는 거인의 굽은 뒷모습은 그간 스필버그가 해왔던 일들에 대한 가장 정확한 형태의 자기고백처럼 들린다. 나이를 셀 수 없을만큼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했다는 BFG가 그런 결심을 하고 꿈을 만들어 세상에 뿌리는 작업을 해온 건 언제부터일까.

문득 상상해본다. 꿈을 보고 경탄했던 BFG의 기쁨을. 자신에게 이름을 붙여준 소년으로부터 문자를 배우고 끝내 소년을 거인들에게 잃어버리면서 겪었을 절망을. 그럼에도 이거라도 해야 한다며 속죄를 치르고 있는 피곤함을. <E.T.>의 순수를 믿었던 아이는 이제 세상이 자신의 선의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줄 만큼 만만하지 않음을 깨닫고 선택해야 한다. 의 데이빗처럼 꿈속으로 잠길 것인가, <우주전쟁>의 레이처럼 목적만 달성하고 쓸쓸히 퇴장할 것인가. 그 길을 계속 걷다보면 <스파이 브릿지>의 아벨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 풍파를 겪을 만큼 겪고, 세상이 꿈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이 믿었던 가치들을 포기하지 않는 노인. BFG가 마크 라일런스의 얼굴을 한 건 우연이 아니다. 나는 <마이 리틀 자이언트>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조건이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스필버그가 마크 라일런스를 만났다는 사실, 나머지 하나는 마크 라일런스의 얼굴을 ‘그려낸’ CG에 대한 스필버그의 확신과 애정이다. 이쯤 되면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영화와 꿈, 그리고 스필버그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거의 직유에 가까운 영화처럼 보인다.

멜리에스로의 복귀, 순수영화를 선언하다

내게 이 영화는 순수를 향해 몰두하는 스필버그의 선언으로 다가온다. 단순하게는 어린아이의 순수, 동화의 순수, 이야기의 순수겠지만 여기까진 <E.T.>가 먼저 선보인 순진함에 가깝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가 몰두하는 순수는 좀더 복합적인 상태, 이를테면 윤리적 기준에서의 선악이나 정당함으로 나뉘기 이전의 혼돈과 닮은 순수다. 혹은 어떤 상태라기보다는 꿈을 구현하는 틀에 가깝다. 요컨대 영화라는 매체의 순수, 사건에 매몰되지 않는 이야기의 순수, 서사에 통합되지 않는 순간에 대한 관찰로서의 순수다. 좀더 원시적인 상태의 체험이나 우리가 꾸는 꿈과 비교하면 좀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 실제로 기억하는 건 아마 한두 문장 정도로 설명 가능한 단편적인 조각들이다. 하지만 꿈은 꽤 길고 깊숙한 체험이다. 스필버그가 영화를 통해 재현하고 싶은 건 그 이야기에 포섭되지 않은 움직임, 순수한 운동이 아닐까 싶다. 영화 초반 소피를 납치해 거인의 나라로 데려가는 BFG의 움직임은 가히 그림자의 율동이라 할만하다. 소피를 담요째 집어 도시를 빠져나갈 때 거인은 망토를 활용해 그림자를 창조해낸다. 때론 동상인 척 숨기도 하고 벽을 만들어내며 실루엣의 마법을 선보인다. 아마도 뤼미에르 형제의 사진적 리얼리즘 이전 인류가 움직임의 환영에 빠졌던 순수한 마술, 그림자 놀이, 혹은 순수한 형태의 애니메이션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거기에 거인의 시점과 소피의 시점을 유려하게 넘나드는 숏의 변화는 카메라의 순수한 움직임을 아름답게 뽐낸다. 이와 같은 시점의 자유자재 변환은 오직 디지털의 힘을 빌려 구현 가능한 율동이다.

‘꿈을 그린다’는 명제를 수행하기 위해 스필버그는 숱한 장치들을 활용해왔다. <E.T.>의 특수효과나 <쥬라기 공원>의 애니매트로닉스는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효과적인 통로들이다. 중요한 건 통로 자체의 완성도나 기술력이 아니다. 어떤 통로건 꿈을 향해 갈 수 있다면 기꺼이 활용하겠다는 스필버그의 태도다. 만약 스필버그를 조르주 멜리에스의 적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영화라는 매체를 일종의 마법처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 과정은 가능한 한 감추고 놀라운 체현의 결과를 전시하는 것, 이야기를 실어나를 최상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 스필버그의 영화가 언제나 지향해왔던 방향이다. 하지만 이야기보다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후부터(정확한 시기를 특정하긴 어렵지만 SF 판타지에 한정한다면 무렵부터) 스필버그는 매체 자체가 뿜어내는 마법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 같다. 마치 멜리에스가 영사기라는 장치에 매료된 것처럼. 그리고 디지털은 스필버그가 찾아낸, 꿈을 불어넣을 또 하나의 효과적인 도구다. 마치 BFG가 들고 다니는 트럼펫처럼 말이다.

꿈의 내용보다 꿈의 순간들에 집중하기 시작한 스필버그의 영화는 일순 느려졌다. 이야기로 설명되지 않는 표정들을 보여주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사건의 진행에 밀려 생략된 감정의 행간을 은유적으로나마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그 결과는 이미지에 대한 응시와 움직임에 대한 집중으로 이어졌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 역시 이야기의 호흡이 빠른 영화는 아니다. 사건 자체가 단순하니 당연한 일일 수 있다. 대신 스필버그는 충분히 확보된 시간을 소피와 BFG의 언어유희, BFG의 무용 같은 움직임들, 그리고 꿈을 자아내는 정원의 환상적인 전경에 할애한다. 어쩌면 이건 멜리에스의 길을 따라 순수영화에 이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인지도 모르겠다. 스필버그는 거창한 가상의 공간을 창조하는 데 디지털의 마법을 활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일상의 아기자기한 순간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조금은 뭉툭한 그래픽들을 펼쳐 보인다. 거인 나라의 우뚝 솟은 기암절벽들은 얼마나 웅장하고 환상적인지를 뽐내지 않는다. 차라리 약간은 비어 있고 황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서부극의 풍경들을 닮았다. 과잉해석일지 몰라도 <마이 리틀 자이언트>의 디지털 방식은 현실과는 조금 다른 톤으로 이질성을 드러낼 때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최상의 꿈을 펼쳐 보이면서도 꿈과 현실, 이야기와 실제의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스필버그의 통제력은 소피와 BFG 사이에 오가는 감정을 훨씬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현명한 간격이다. 비유하자면 움직임, 혹은 그 흔적과 잔상이 남기는 마법에 집중하는 흐릿한 디지털. 때론 보여주지 않음(예를 들어 여왕이 꾸는 악몽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을 통해 이미지를 착취하지 않는 착한 상상력. 조르주 멜리에스가 영화를 통해 구현하고 싶었던 마법의 순간들이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BFG의 트럼펫을 통해, 아니 스필버그의 디지털을 통해 완성됐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

디지털이란 마법의 힘으로 살려낸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장면들

스필버그의 디지털을 논하기 앞서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얼마전까지 나는 그려진 것(그래픽)은 찍은 것(포토그래픽)의 뭉툭한 순간을 따라잡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CG 초창기 언캐니 밸리(실제와 가깝게 묘사할수록 낯설게 느껴지는 현상)를 언급할 것도 없이 정보를 채워나가는 방식으로는 비어 있는 순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믿었다. 사진이 포착하는 빛과 그림자는 때론 우연의 결과이며 감독의 의도를 벗어난 상태를 담아낸다. 그것은 정확하게 계산된 정보의 조합이 아니라 뭉개지고 흐릿해져 도리어 상상과 감정의 개입을 유도하는 빈틈이다. 하지만 초기 CG는 이를 고려하지 않고 압도적인 정보량으로 실제와 가까워지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그럴수록 실제가 아닌 이질적인 어떤 것이 되어갔다. 변화가 찾아온 건 CG가 실제가 아닌 실제를 찍은 필름 이미지를 흉내내면서부터다. 디지털은 그 뭉툭함까지 흉내내며 영화가 100년에 걸쳐 쌓아온 경험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패턴을 학습하는 최근의 인공지능을 닮은 모방의 방식이다. 소위 퍼포먼스 캡처는 극한으로 채워넣은 정보량과 필름의 뭉툭한 이미지 사이에서 새로운 시지각 이미지들을 생산해내고 관객에게 학습시킨다. 짐작건대 10, 20년만 지속되어도 우리는 필름의 질감을 기억하지 못하고 낯설게 느낄 수도 있다. 사실의 흔적이 아니라 ‘사실 같은 이미지’를 그려내는 건 이미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디즈니가 라이브액션시네마로 끊임없이 부활시키려는 동화들, 가까운 예로는 <정글북>이 이룬 성취는 전부 CG로 그려졌다는 사실보다 우리가 더이상 그 새로운 이미지들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까지 도달했다는 점에서 어떤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의 CG는 어떤가. <정글북>과 비교하면 조악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덜 사실적이고 덜 사진적이다. 과연 기술이 모자라서 그랬을까. 애니매트로닉스의 힘을 빌렸다고 하지만 스필버그는 실제를 뛰어넘는 사실감을 이미 10년도 전에 <쥬라기 공원>을 통해 성취한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마이 리틀 자이언트>의 CG에서는 도리어 그 그래픽적인 속성을 한껏 드러낸다. 어디까지나 그려진 것임을 감추지 않는 거인의 형상은 디지털을 활용하는 방향에 대한 스필버그의 선언처럼 들린다. 굳이 사진을 흉내내거나 사람들을 착각에 빠트리지 않아도 그려진 것은 그려진 것으로써 얼마든지 꿈을 자아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확신.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한 화면에 공존할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 그리고 모든 걸 적나라하게 전시하지 않고 꿈은 꿈의 형태로 남겨두겠다는 의지. 그리하여 BFG의 얼굴은 사람을 흉내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온전히 상상 속 거인의 얼굴이 된다.

이러한 태도는 <링컨> 이후 스필버그 영화가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얼굴 혹은 모호함에 대한 경배로도 읽힌다. 스필버그는 어느 순간부터 말하지 않아도 좋은 것들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여주지 않아도 좋은 것들은 보여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 보인다. ‘가짜 같다’는 것과 ‘진짜가 아니다’라는 명제 사이의 간격을 찾아낸 것일 수도 있다. 비록 그것이 실제하지 않는 이미지라 해도 이미지 자체가 의미 없는 건 아니다. 같은 의미에서 BFG의 얼굴이 우리가 실제로 보는 얼굴의 이미지와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해서 눈앞에 존재하는 거인의 표정, 그 주름 사이에서 우러나는 감정까지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디즈니가 그래픽을 한없이 포토그래픽에 가깝게 묘사하는 동안 스필버그는 그래픽의 가치를 솔직하게 긍정해 보인다. 우리가 꿈, 환상, 상상의 세계를 직접 ‘사진적’으로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 세계를 믿고 긍정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

BFG의 문법이 틀린 말투는 처음에는 웃음을 유발한다. 소피는 거인 아저씨의 말투가 이상하다며 계속 거인에게 바른 문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종국엔 “아저씨의 말이 아름답게 들린다”고 고백한다. 거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칭찬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나도 스필버그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CG는 처음엔 조금 가짜 같아서 이상해 보였다고. 하지만 BFG의 깊은 눈망울과 귀를 움찔거리는 동작들, 지쳐 보이지만 단호한 표정들이 세상 어떤 배우의 클로즈업보다 아름답게 보인다고. 스필버그는 그래픽으로 하여금 그래픽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허락함으로써 끝내 포토그래픽에 못지않은 감정을 채워냈다. 주변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가치들, 완고함과 순수, 그 아름다움들을 끝내 디지털이란 마법의 힘을 빌려 살려낸 것이다.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해맑은 아이의 얼굴을 한 현명한 노인 같은 영화다. 영화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거장, 아니 이 사랑스런 거인은 먼 길을 돌고 돌아 여기서 또 한번 영화의 순수와 디지털의 미래에 대해 선언한다. 꿈은 영원히 늙지 않고, 영화는 매번 새로 태어난다고. 스필버그는 더 나아갈 곳이 없어 보이는 최전선에서, 오늘도 전진 중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흥행 참패가 영화산업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본다. 디즈니와 스필버그의 합작 결과물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한편으론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스필버그의 존재는 할리우드가 꾸는 영화라는 이름의 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꿈은 꽤 길지만 막상 깨고 나면 정말 짧게 느껴진다.

디즈니의 최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

<정글북>

애니메이션적인 움직임과 디즈니의 라이브 레퍼런싱

애니메이션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사진과 구별된다. 동시에 ‘그려진 것’들은 존재하는 것을 흉내내 사실성의 근거로 삼고자 하는 욕망도 품고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역사는 실제 인간의 동작을 모사한 라이브 레퍼런싱을 축적해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창기에는 실사를 고스란히 그림으로 옮기는 로토스코핑 기법에 가까웠는데 실제보다 훨씬 밋밋하고 생동감이 떨어지는 결과물이 나와 고민에 빠졌다. 이에 디즈니가 도입한 것이 라이브 레퍼런싱, 즉 실제와는 다른 과장된 움직임과 동작을 추가해 만화적인 질감을 부각시키는 방식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사실적인 동작에 기반을 두되 전반적으론 만화만이 줄 수 있는 움직임의 패턴들을 확보하는 것이다.

매 작품 실제 동작에 기반을 둔 라이브 레퍼런싱을 충실히 확보하는 건 2D, 3D 형식에 관계없이디즈니가 추구해온 애니메이션 고유의 정체성이라 할 만하다. 디지털이 ‘그려진 것’의 연장이라고 할때 사진을 흉내내는 것 이외에 어떤 방향을 추구할 수 있는지 진즉에 답이 나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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