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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노처녀의 도(道)

<싱글즈>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으로 본 노처녀의 도(道)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누구한테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벌써 떠들 만큼 떠들고 다닌 일이기도 해서 밝히는 건데, 나는 지지난해에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시 댄스경연대회에 나갔다, 종목은 줌바 댄스(줌마 댄스 아님). 숨겨왔던 너의 자유로운 영혼을 해방하라며(다시 말해 지금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정신을 놓으라며) 나를 설득하던 줌바 강사는 아, 네, 글쎄요, 그게 시간이, 만 되풀이하는 나를 향해 치명적인 승부수를 던졌다. “애들 땜에 그래요? 내가 우리 남편한테 애들 봐주라 그럴게!” 애도 아니고, 애들…. “저 애들 없어요.” “그래요? (반색)” “결혼 안 했어요.” “그래요. (미안)”

그렇게 나는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내 나이면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아줌마지, 애들이 아니라 ‘애’라고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기’라고 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결전의 댄스대회 당일, 강사는 17명의 아줌마에게 외쳤다. “여기 정원씨는 처녀래요오오오오오!” 저기요, 내가 미혼이라 그랬지 언제 처녀라 그랬어요. “괜찮은 남자 있으면 중매 좀 하세요오오오오오!” 저기요, 내가 남편 없다 그랬지 언제 남자 없다 그랬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소일거리를 만난 아줌마들은 피가 끓었다. “아유, 나이가 몇살인데 여태 시집을 안 갔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남친이랑은 왜 결혼 안 하고?”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만… 너,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그렇게 나는 17 대 1로 외톨이가 되었다. 나이만 먹는다고 아줌마가 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나는 노처녀, 갈 길이 멀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우리 엄마가 나를 노처녀라 부른 게 27살이었으니, 노처녀의 길을 걸어온 지 어언 10여년, 처녀 소리 들은 세월보다 노처녀 소리 들은 세월이 긴데도 아직 그 도(道)를 깨우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노처녀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 밟고자 흔적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얘네, 왜 다 나보다 어려.

노처녀 인생에 금과옥조로 삼을 명언을 남긴 이가 있으니 <싱글즈>의 동미(엄정화)다. 룸메이트와 헤어져서 집을 구해야 하는데 보증금이 없는 그녀는 고민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린다. “시집이나 갈까? 우리 나이에 목돈 나올 데는 결혼밖에 없어. 그래야 노인네들이 돈을 풀지.” 그래, 우리 엄마도 나 결혼하면 3천만원 준다고 하더라, 근데 땅 투기하다 날렸음.

그렇다면 노처녀 인생의 해결책은 과연 결혼일까. 그렇지도 않다. 내 친구는 추운 오피스텔에서 떨다가 바닥 난방되는 집에서 살고 싶다며 부모한테 돈 받아 결혼했지. 그리고 바닥 뜨끈뜨끈한 38평짜리 주상복합에 들어갔으나… 대충 맞선 봐서 결혼한 남편하고 세개들이 편의점 콘돔을 두달에 한번 사는 생활을 3년 하다가 이혼했어. <싱글즈>의 나난(장진영)은 하도 오래 못한 나머지 꿈에서 그걸 했다는데, 너도 꿈에서 제법 했겠구나. 사실은 나도 몇번… 그래도 친구야, 3년 동안 따뜻했지?

때로는 인생을 너무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만날 수도 있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묻던 사와코(데라지마 시노부)는 결혼하려던 남자로부터 임신 가능 진단서를 요구받고 이럴 거면 그냥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아’ 상태가 된다. 근데 이 남자는 사와코의 동창, 그러니까 동갑. 내가 왠지 모를 이유로(왠지 모르기는, 사장이 시켰다, 자기 친구라며) 대한민국 최고의 불임 클리닉 전문의와 인터뷰를 했는데 남자도 나이 먹을수록 임신 확률이 떨어진다더라. 애 혼자 낳는 거 아니라며 제발 남자들도 검사 좀 받으라고.

<싱글즈>

그 임신 확률 떨어지는 브라질 갑부 동포가 신붓감을 구하는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소문의 진원지이자 갑부의 지인이라는 후배를 추궁했다. 나도 브라질 갈 수 있는데! 브라질 엄청 좋아하(기로 방금 결정했)는데! “남자가 낼모레 50살인데?” 상관없다, 그쪽은 내가 낼모레 40살인 게 상관있겠지만. “애만 낳을 수 있으면 괜찮다고는 하더라고요… 나이가 많아도.” 나는 나이도 남부럽지 않게 많고 애도 낳을 수 있을 거라 믿지만… 안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고. 혹시 못낳으면 이역만리에서 맨몸으로 쫓겨날 것 같단 말이야.

<올드미스 다이어리_극장판>의 미자(예지원)는 2만 피트 상공에서 추락한 비행기의 생존자가 벼락을 맞고 살아날 확률보다 애인도 없는 30대 백수 노처녀가 이 거지 같은 삶에서 탈출할 확률이 낮다고 하던데, 차라리 거기에 걸겠다. 설사 탈출하지 못하더라도 이 거지 같은 삶은 나를 쫓아내지 않고 받아주겠지.

좀더 현실적인 노처녀의 도를 찾자면 역시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브리짓 존스(르네 젤위거)다. 자유분방하고 여성 인권이 보장된다는 유럽에서 고작 32살에 노처녀 취급받는 브리짓을 보면 왠지 흐뭇해지며 세상 공평함이 느껴지려는 순간, 아, 브리짓은 만으로 32살이지, 문득 서러워지는 이 영화는 노처녀를 위한 매우 바람직하고도 현실적인 새해 목표를 제시한다. 담배 끊고 술을 줄이고 입을 다물자. 곧 죽어도 술 끊는다 소리는 안 하는 게 이 소원이 지닌 현실성의 백미다.

나이 한살 보탠 지 벌써 두달이 지났다. 새해를 밝히는 일출과 더불어 담배도 늘고 술도 늘었다. 입은 다물고 살지만 이건 집에만 처박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그 심심함을 극복하고자 담배와 술이 는 건지, 담배와 술이 늘어 혼자 재미있으니 구태여 밖에 나가 떠들지 않아도 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든 노처녀의 도는 몰라도 혼자 노는 데는 도가 텄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 노처녀의 도가 아닐까 싶다, 혼자서도 잘하는 것, 연약한 여자라고 외로웠다고 의논할 상대가 필요했다고 징징대지 않는 것.

과로사는 피하자

멀쩡하게 노처녀의 도를 걷다가도 삐끗하게 되는 두세 가지 모멘트

<관능의 법칙>

잠들고 싶은 순간

30대 후반에 접어든 친구가 8살 어린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헤어졌다. 야. 8살 어린 남자는커녕 8살 많은 남자도 씨가 마른 황무지에 살던 우리는 왜 그랬느냐며 아우성을 쳤다. “왜, 걔가 돈이 없어서 그래? 그게 어때서? 너도 없잖아.” 친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애가 집을 안 가, 아침 8시가 넘었는데.” 아. 그래, 우리 나이엔 잠이 보약이지. <관능의 법칙>의 신혜(엄정화)도 연하 애인이랑 호텔 가서 잠만 자더라. 연애도 좋지만 일단 과로사는 피하자.

<올드미스 다이어리_극장판>

누나라 불리고 싶은 순간

아기를 안은 젊은 남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기가 나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엄마. 이 자식이! <올드미스 다이어리_극장판>의 미자가 절규하듯, 난 누구한테도 나쁜 말 안 하고 심한 짓 안 했는데, 왜 나더러 엄마래. 난 너 같은 아들 두려면 임신 가능 진단서 떼야 한단 말이다. 상심한 내 얼굴을 보고 아기 아빠가 아들을 나무랐다. “엄마 아니야, 누나, 해야지.” 엄마는 괜찮아요, 댁만 나한테 누나라고 안 하면 돼요.

<싱글즈>

남편이 필요한 순간

먼 옛날, 엄마가 선 자리를 물고 왔다. 보스턴에서 유학 중인 청년이 방학을 틈타 결혼하러 들어왔으니 이 남자에게 시집만 가면 너는 보스턴에 갈 수 있다고 유혹했다. 결혼을 하라는 게 아니라 보스턴에 가라니, 맨날 모욕감만 줘서 계모인 줄 알았는데, 나와 피를 나눈 우리 친엄마 맞구나. <싱글즈>의 나난은 일 그만두고 공부하라며 함께 미국 가자는 애인 앞에서 갈등한다. 그냥 가, 남편은 없어도 남자는 있다지만 미국 비자 받으려면 남편이 있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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