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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달의 아이
김혜리 2017-03-15

※<문라이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 이름은 꾸제트>

알코올중독 엄마가 쏟아내는 맥주캔을 모아 피라미드를 쌓으며 꾸제트가 다락방에서 혼자 노는 오프닝부터, <내 이름은 꾸제트>는 어른들 세계의 결함과 병 때문에 덩달아 고통받아야 하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가난 때문에, 엄마가 추방돼서, 가족에게 성추행당하고 보호소에 온 일곱명의 소년, 소녀에게 가정은 반드시 그리운 곳이 아니다. 지혜로운 신입 카미유가 “난 여기서 사는 게 나아”라고 고백하자 꾸제트도 털어놓는다. “가끔 내가 어른이 돼서도 엄마랑 사는 꿈을 꿔. 엄마는 여전히 맥주를 마시고 혼잣말을 해. 나도 술을 많이 마셔. 그런 일이 안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둘은 헤어지기 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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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터렐 앨빈 매크레이니와 배리 젠킨스 감독이 기억하는 1980년대 마이애미 서민 공공주택 단지는 젊은이들이 의식적으로 사력을 다하지 않으면 빈곤과 범죄, 마약중독의 악순환에서 인생을 건져내기 어려운 곳이다.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세 블록 떨어진 이웃에 자라며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똑같이 마약중독에 시달린 독신 어머니를 두었던 두 사람은 동네를 벗어나 작가와 감독이 됐고 <문라이트>를 각색하며 처음으로 만났다. 영화의 주인공 샤이론은 매크레이니가 그랬듯 게이이며 친절한 동네 마약상으로부터 가족이 주지 못한 보살핌을 받았다. 젠킨스는 풋볼과 육상에 뛰어난 이성애자였고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담담히 받아들인 우등생이었으나 샤이론처럼 혈연과 무관한 세 어른의 선의에 힘입어 성장했다고 한다. 생물학적 아버지임을 부정한 남자- 젠킨스는 그의 말이 사실일 거라고 판단한다- 의 어머니, 10대에 아이들을 낳고 중독으로 고생하는 생모를 거두어준 선량한 아주머니, 젠킨스의 글쓰기 재능을 깨우쳐준 외지 출신 백인 여성 교사가 그들이다.

<문라이트>는 10살, 17살, (아마) 30대 초반의 샤이론을 해당 연령대의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3장으로 구성돼 있다. 많은 관객이 관찰하듯 알렉스 히버트, 애슈턴 샌더스, 트라반테 로데스는 그리 닮지 않았다. 셋을 연결하는 고리는 그들의 눈동자 안에서 가냘프게 타오르는 희구다. 타인을 상대하는 몸놀림과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생각 가운데 무엇을 입 밖에 낼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르는 ‘사이’(pause)들이다. 예컨대 1부에서 친구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3부에서는 엄마의 눈물을 본능적으로 훔쳐주는 손가락이다. 따라서 세 배우의 외양은 1, 2, 3부의 연속성이 아니라 각 챕터가 보여주지 않은 시간이 샤이론이라는 인간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하나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던진다. 1부와 2부 사이에 샤이론은 후안 아저씨를 잃었고 엄마의 중독 악화를 목격했다. 2부와 3부 사이에 샤이론은 감옥살이를 통해 불법적 직업을 택했고 세상이 인정하는 강자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이 사건들은 다음 챕터의 샤이론에게 흔적을 남긴다. 결과를 봐서는 믿을 수 없게도 배리 젠킨스 감독은 세 배우가 서로를 모방할 수 있도록 촬영분을 보여주거나 미팅을 소집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라이트>에서 각 챕터의 제목 ‘리틀’, ‘샤이론’, ‘블랙’은 시기마다 주인공을 규정한 아이덴티티를 호명한다. 젠킨스는 챕터마다 약간의 프롤로그를 두어 관객이 소제목의 의미를 반쯤 상상하며 샤이론을 지켜보도록 편집했다. 체구와 몸짓이 여려 ‘리틀’로 불렸던 꼬마는 10대에 이르러 첫사랑을 통해 게이의 정체성을 확정하고 30대에는 터프한 마약상으로 사회적 자아를 구성해 사랑했던 친구가 붙여준 이름 블랙을 닉네임으로 택한다. 영화의 제목과 어울리게도, 샤이론은 우리가 지켜보는 동안 어둠 속에서 세번의 중요한 만남을 경험한다. 1부에서는 또래들에게 쫓기다 숨은 컴컴한 마약창고에서 쿠바 출신 동네 딜러 후안(마허샬라 알리)에게 발견돼 유사 부자관계를 시작하고, 2부에서는 집과 학교 양쪽에서 떠밀려 발길이 닿은 달밤의 해변에서 친구 케빈(자렐 제롬)과 첫 성경험을 한다. 3부의 어둠은 보다 아늑하다. 빛나는 성공은 아닐지언정 세상 속에서 자리잡은 샤이론은 고향의 쿠바 식당에서 일하는 케빈을 찾아간다. 엷은 빛으로, 사방을 에워싼 어둠 속에서도 우리의 눈이 찾아가는 윤곽과 움직임과 색깔. 대낮에는 약하고 희미한 그것들이 개인의 생을 지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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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이 아닌 빈곤층 캐릭터의 불리한 환경, 성소수자 차별, 마약중독, 학교 폭력 등 <문라이트>가 다루는 소재 중 우리에게 생경한 것은 없다. 한편 참신한 것은 나머지 거의 모두다. <문라이트>의 이야기는 비참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서사의 표준을 벗어나고 있으며 형식적으로는 사회에 기인한 불행을 묘사하는 영화들이 자동적으로 채용하는 자연주의 미학을 택하지 않았다. 배리 젠킨스는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줄 것인지, 가리고 묵음시킬 것인지를 거의 시인이나 건축가의 엄밀한 태도로 통제한다. 그렇게 정제된 결과물은 거의 완벽한 비율로 조합된 음향과 침묵, 이미지와 생략이다. 가로등 없는 해변의 파도 소리. 친구가 무안하지 않도록 정액을 가만히 모래 위에 문질러 닦는 소년의 손, 회전수를 늦춘 힙합, 말수 적은 소년의 희열과 각성을 대신 노래하는 현악기의 코러스. 상태가 악화된 엄마의 고함은 소년의 관객에게도 차단되고 그녀의 성난 움직임은 붉은 조명 아래 현실인지 꿈인지 명멸한다. 각본가 매크레이니는 이 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분명 내가 엄마를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1인칭 주인공 내레이션을 쓰지 않았는데도 <문라이트> 에서 시종 샤이론의 보이스 오버가 들리는 듯한 착각은 촬영과 음향에 기인한다.

무엇보다 <문라이트>가 관객에게 ‘개안’의 느낌을 안겨주는 까닭은, 흑인의 남성성을 재현하는 방식이 지금까지 일상적으로 접해온 블랙 무비들과 다른 데에 있다. 배리 젠킨스의 흑인 남성 캐릭터들은 터프하거나 터프해야 할 필요성 이외의 다른 화제로 대화한다. 이를테면 <문라이트>에는 두 흑인 남자아이가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져다주는 미묘한 감각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럴 땐 울기도 해?” “울 것 같지만 울진 않지, 너는?” “나는 너무 울어서 온몸이 눈물방울로 변할 것 같아.” “큭, 그래서 바다로 흘러들어가기라도 하려고?” 어린 샤이론이 물에 뜨는 법을 배우는 장면의 이미지는 거의 신화적인데 소년을 요람에 든 아기처럼 받쳐든 후안의 모습은 어머니의 그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때 후안은 힘이 아니라 힘을 빼는 일에 관해, 세상 속에서 자리를 찾아가는 일에 대해 아이에게 들려준다. 수많은 영화에서 그렇지만 물은 <문라이트>에서도 매우 중요한 이미지이며 그래서 공들여 찍혀 있다. 제임스 랙스턴의 카메라와 조명은 눈물, 세면대의 얼음물, 욕조의 비누거품, 바다 그리고 마이애미의 무더운 대기와 인물들의 피부에 감도는 습기를 세심히 잡아낸다.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흑인 배우들의 피부 톤을 <문라이트>처럼 인물의 상태에 맞춰 아름답게 표현한 영화는 기억에 없다. (다음에 계속)

<오버 더 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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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춤

여자는 자신이 망가졌다고 여기고 남자는 남을 망가뜨렸다고 생각한다. 희망 없는 두 사람은 남자의 고향 하코다테에서 마주친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오버 더 펜스>에서 오다기리 조아오이 유우는 늘 웃고 있지만 깊이 절망한 30, 40대 남녀를 연기한다. 청순한 인물을 자주 연기해온 두 스타가 무너지고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오이 유우가 연기하는 사토시는 자기혐오가 커질수록 크게 웃고 떠든다. 새들의 구애를 흉내내는 막춤으로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어느 밤 사토시가 예의 춤을 추기 시작하자 요시오(오다기리 조)는 구경하거나 민망해하는 대신 다가가서 댄스 파트너가 돼준다. 비웃음을 사는 주책에 불과했던 막춤은, 그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한 사람의 시선과 호응이 더해지자 순식간에 방 안의 부러움을 사는 친밀함의 교환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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