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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마린보이> 고태식 수중촬영 감독, "물속에 들어가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
이주현 사진 최성열 2017-11-22

1세대 수중 비디오 저널리스트로 시작한 그의 바닷속 촬영기

1990년대 방송에 자주 얼굴을 비쳤던 고태식 수중촬영 감독이 진모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올드마린보이>의 수중촬영을 맡았다. <올드마린보이>의 수중 영상은 숨막히도록 아름답다. 그것은 CG가 아니다. 강원도 고성의 차가운 바다에 공기탱크를 메고 들어가서 찍은 영상이다. 독학으로 수중촬영을 마스터한 그는 수시로 스쿠버다이빙 장비와 카메라를 챙겨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 시간만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1세대 수중 비디오 저널리스트 고태식 감독의 지난 시절과 현재의 이야기를 전한다. 더불어 수중촬영이 빼어난, 함께 보면 좋을 스쿠버다이빙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소개한다.

수중촬영에 나서는 고태식 감독.

<고태식의 수중세계> <고태식의 해양 대탐험> <고태식의 바닷속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고태식 수중촬영 감독은 자신의 이름을 건 방송을 <생방송 좋은 아침입니다> <모닝 스페셜> 같은 지상파 아침 프로그램에서 매주 선보였다. <서귀포 바닷속 24시> <환경스폐셜-스쿠버다이빙의 두 얼굴> 같은 긴 호흡의 방송 다큐멘터리 또한 그의 작품이다. 그때는 “고태식이다!” 하고 알은체하는 사람도 많았고, “저도 수중촬영 전문가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라는 군인들의 진로 문의 편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1990년대 노래방에서 노래 가사와 무관하게 흘러나오던 열대 바닷속 풍경으로 그의 영상을 접했을지도 모른다. 오케이 컷만 모아놓은 그의 수중영상 테이프를 누군가 훔쳐서 노래방 업체에 팔아넘긴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마다 달리 보이는 것들

국내 스쿠버다이빙 붐을 일으킨 1세대 수중 비디오 저널리스트 고태식 감독이 최근엔 진모영 감독의 <올드마린보이>에 참여했다. 가족과 함께 탈북해 강원도 고성에 정착해 살아가는 머구리 박명호씨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올드마린보이>에서 수중촬영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60kg의 잠수복을 입고 한 가닥 공기 공급줄에 의지한 채 해산물을 채취하는 심해 잠수부 머구리의 삶은 언어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지점이 있다. 잡지에서 본 한장의 머구리 사진에서 진모영 감독이 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듯이 머구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미지를 통한 체험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박명호씨만큼이나 바다를 잘 아는 수중촬영 감독이 필요했고, 진모영 감독은 고태식 감독을 비롯해 오지탐험 전문 다큐멘터리스트인 이정준 감독 등 국내 최고의 수중촬영 감독들을 프로젝트에 끌어들였다. <올드마린보이>의 수중촬영 제의가 왔을 때 고태식 감독은 그저 “바다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수조 세트가 아닌, 무수한 변수가 존재하는 진짜 바다에 들어가 박명호씨의 작업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작업은 그와 함께 추위를 견디고, 수압을 견디고, 대왕문어가 나타나길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기도 했다. 북한 한류의 영향을 받는 곳이라 강원도 최북단의 고성 바다는 4월이라 해도 한없이 시렸다. 그럼에도 고태식 감독은 “물속에 들어가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라고 말한다.

고태식 감독은 바다 곁에서 자랐다. 태어난 곳은 제주, 자란 곳은 포항이다. 고등학생 때 배구 선수로도 활약했고, 1973년 경북대학교에 배구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바다가 좋았던 그는 해군 최정예특수전부대인 UDT에 지원한다. 스쿠버다이빙은 UDT 복무 중 배웠다. 이후 대기업을 다니며 취미로 사진을 찍던 그는 1986년 제1회 한국수중사진촬영대회에서 광각부문 금상을 수상하면서 부상으로 수중카메라 한 세트를 받는다. 이후로도 수중사진대회에서 상을 휩쓸었고 그것이 계기가 돼 “남들이 하지 않는 수중 비디오 촬영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당시 수중 사진가들이 많이 물었다. ‘비디오는 ON 버튼 누르고 카메라 들고 다니면 저절로 찍히는데 무슨 재미로 비디오를 찍냐?’ 나의 대답은 이랬다. ‘사진은 손가락으로 셔터 한번 누르면 찰칵 하고 끝인데 그보다 더 쉬운 게 어딨냐?’ (웃음) 사진은 입문 때부터 어렵고 비디오는 입문은 쉬우나 갈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 뒤 고태식 감독은 제주도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제주도 바닷속을 영상으로 찍기 시작한다.

“제주도 바다는 난류의 영향으로 아름답고, 고성의 바다는 한류의 영향으로 아름답다.” 차디찬 고성의 심해에서도 고태식 감독은 바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리고 고독한 머구리를 보았다. 고요한 심해에서 머구리 박명호씨는 아름다운 춤을 춘다. 실은 생존을 위한 동작들이 우리의 눈에 아름다운 춤처럼 보이는 것이다. “주인공 박명호씨가 고독해 보였다. 고독한 머구리, 고독한 아버지, 오로지 일이 곧 생활 그 자체인 사람, 취미라고는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 오로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우리 아버지 세대를 보는 것 같았다.” 박명호씨는 사선을 넘듯 매일 바다로 뛰어든다. 공포를 이겨낸 삶에 대한 강한 의지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 어떤 연출도 불가능한 심해에서 고태식 감독은 고독과 경이로움을 카메라에 담아야 했다.

“사막의 낙타 한 마리 같은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기술적 선택들이 뒤따랐다. 카메라는 캐논 5D Mark2, 렌즈는 초광각렌즈인 14mm 단렌즈를 사용했다. 14mm 렌즈는 화각이 115°가량 되기 때문에 인물에 밀착해 찍어도 바닷속 풍경을 넓게 보여줄 수 있다. 동작의 역동성 또한 강조되는 특징이 있다. 참고로 인간의 시각과 유사한 표준렌즈의 화각이 약 50°다. 더불어 수중 전문 비디오카메라를 사용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어 ‘가성비’를 고려해 DSLR을 택했다. 영상 촬영 시 DSLR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직접 스태빌라이저도 만들었다.

수중에서 카메라의 흔들림을 방지하고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로, 카메라 보디 밑에 널찍한 알루미늄판을 붙였다. 그러면 평평한 알루미늄판에 의해 카메라에서 손을 떼더라도 카메라가 바로 쓰러지지 않아 훨씬 안정적인 화면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올드마린보이>의 수중촬영 장면은 굉장히 입체적이다. 피사체의 엣지도 선명하다. 이러한 샤프한 표현을 위해서 중요한 건 바닷속 밀도와 색온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물속에서 촬영을 하면 흐릿하게 찍힌다. 수중에선 대상과 조금만 거리가 멀어져도 화면이 흐릿해진다. 수중 시야에 따른 최적의 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 시야는 매일 바다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그 최적의 거리를 찾는 건 경험과 본능이다.”

고태식 감독이 촬영한 <올드마린보이> 한 장면.

수중촬영은 처음부터 독학이었다. 지금처럼 언제든 인터넷에 접속해 외국의 자료들을 뒤질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직접 바닷속으로 들어가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기술을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촬영도, 편집도, 글도 독학으로 깨쳐 1인 비디오 저널리스트가 됐다. “당시 어느 PD가 그러더라. ‘이야기가 있는 영상을 만들어보세요.’ 그때부터 어류사전을 찾아가며 물고기의 이름과 특성을 공부했다. 그러다보니 바닷속 생물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그려지더라. 이 이야기를 찍기 위해선 어느 바다가 좋은지, 어느 시기가 좋은지 미리 계획해서 촬영을 한다. 그곳에 늘 내가 기대하는 장면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우연을 기대하기 위해선 먼저 계획을 세워야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무궁한 호기심과, 호기심이 생기면 파고드는 실행력이 수중촬영 감독으로서 탄탄대로를 걷는 데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태식 감독은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걸어 자취를 남긴 것은 맞지만 그건 그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나는 타고난 인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수중촬영을 잘한다고 내가 ‘영화’를 잘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큐멘터리는 일종의 ‘노가다’인데, 극영화는 노동의 질과 양으로 흥행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기술이 영화를 만드는 시대니까.”

이토록 현실적이고 쿨한 바다 사나이는 “바다에서 죽을 뻔한 경험”도 쿨하게 들려준다. 수중촬영 감독으로 방송을 시작하기 전, 20대 때 처음 “죽을 고비”를 경험했다. 전남 진도군 서망리 인근 바다. 그는 해저 케이블이 터져서 현장 조사를 위해 수중촬영에 투입된 적이 있다. “해저 지형이 반반하지도 않고 조류도 거칠었는데, 어쩌다 해초처럼 풀어진 케이블 철사 가닥에 잠수복이 걸렸다. 일단 카메라는 바닥에 잘 묻어놓고, 옷을 벗어 맨몸으로라도 빠져나가려 했는데 잘되지 않았다. 한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조류의 방향이 바뀌었는지 저절로 걸린 옷자락이 풀렸다. 급하게 상승을 시작해 수면에 도달하니 조류에 한참을 떠내려왔는지 작업 중인 선박이 저 멀리 보이더라.” 살았음을 직감하자 UDT 출신의 자존심이 되살아났다. 수중에서 위험한 사고는 언제 당했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척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필리핀 코론섬 동굴 촬영을 갔을 때, 동굴에서 길을 잃은 다이버 한명을 구하러 갔다가 생사를 오갔다. 다이버 인솔자가 했어야 할 일이지만 촬영을 하던 그가 낙오된 다이버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공기통의 공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하러 갔다. “그분이 스님이었는데, 내가 조명을 켜고 구하러 가자 부처님이 후광을 내뿜으며 구하러 오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 (웃음)” 무사히 다이버를 구한 다음엔 40m가량을 공기 없이 상승했다. “내가 죽든지 폐가 끝장나든지 둘 중 하나겠다” 싶었지만 손에서 카메라는 놓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태식 감독은 바다가 두렵지 않다고 한다. 이후에도 트라우마 없이 바다를 드나들고 있다. 바다에 대한 사랑이 두려움까지 삼켜버린 걸까.

실제 수중촬영할 수 있는 좋은 작품 찾는다

“CG가 아니라 실제 수중촬영을 할 수 있는 좋은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과연 생길까. 수중촬영에 투자하기 위해선 투자자도 감독도 수중을 알아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 고태식 감독은 지난 일로 아쉬운 건 많지 않다고 했다. 다만 영화든 방송이든 수중촬영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환경이 아쉽다고 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BBC> <NHK> 다큐멘터리팀에는 해양 다큐멘터리팀이 따로 있다. 그들이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는 건 방송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시청자에게 선보이는 것, 그것이 곧 방송국이 번 돈을 시청자에게 환원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선진국에선 그렇게 시청률과 무관하게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그것도 큰돈을 들여서. 세계의 바다를 돌아다니면서 <BBC>나 <내셔널지오그래픽> 해양 다큐멘터리팀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꼭 팀으로 다니고, 방송을 위해 물질적 투자도 많이 한다.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물론 시장의 크기와 여건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걸 고태식 감독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공공재로서의 방송에 대한 인식이 선진국에 못 미친다는 아쉬움은 감출 수가 없다. “방송국에선 광고가 많이 붙고 시청률이 잘 나오는 프로그램 팀이 진급도 잘된다. 그러니 개그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만 흥한다. 진짜 유의미한 프로그램에는 투자가 되지 않는다. 진짜 실력자들도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 투자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웃음)”

고태식 감독은 자신이 지나간 세대이지 앞으로를 책임질 세대는 아니라 했다. 그 말은 왠지 <올드마린보이>의 박명호씨와 우리 아버지 세대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극한직업 머구리는 언젠가 사양직업이 될지 모른다. 수중촬영 기술도 진화하고 있어 이제는 웬만한 세트장에서 수중촬영을 소화하고 있고, CG와의 접목비율도 커지고 있다. 수고롭게 물과 사투를 벌일 필요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아름다움은 악전고투 속에서 피어난다. <올드마린보이>의 수중촬영이 그러했다. 그리고 고태식 감독은 그 귀한 아름다움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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