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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도시를 부유하는 시상(詩想) 수집가의 하루

이 영화는 시(詩)다

“둘 중에서 문학적인 것은 영화쪽이요, 이미지가 들끓고 있는 것은 오히려 소설이다.”

앙드레 바쟁은 베르나노스의 일기체 소설을 기반으로 한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를 극찬하며 이렇게 썼다. 각색자가 소설, 특히 1인칭 화자의 내면 고백을 주로 다룬 작품의 문체를 시나리오화할 때 흔히 택하는 방식은 내면의 외화이다. 이것은 주로 사유의 사건화와 문장의 대사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브레송은 원작의 문장들을 대사로 전환하지도, 넘치는 이미지들을 영상화하지 않았다. 바쟁은 브레송이 표면적인 스토리를 흉내내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무미건조한 어조와 절제된 이미지들을 이용해 “이야기나 드라마의 진수에, 가장 엄밀한 미학적 추상화에 도달”하는 것을 의도했다고 평가했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2016)은 여러모로 바쟁의 브레송 분석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은 원작을 가진 영화는 아니다. 짐 자무시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영감을 받아 쓴 연작 서사시 <패터슨>에 착안해 이 작품을 구상했다. 그러나 스토리나 시구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에 나오는 시들은 윌리엄스보다 후세대 시인인 론 패지트가 써두었거나 이 작품을 위해 새로 창작한 것들이다. 그러나 영화 <패터슨>은 시집 <패터슨>을 비롯해 그것을 잉태하게 한 모더니즘적 시작(詩作)에 바치는 헌사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을 휩쓸었던 모더니즘에서 시인은 더이상 감상적이거나 열정적인 창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냉정한 관찰자이자 파편적 사실들의 기록자이며 문화적 유물의 탐구자이고 역사적 사실의 직조가가 되었다. 이제 독자는 한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 시적 자아와 하나되고자 하는 감수성을 마련할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인 수수께끼와 지식의 파편들을 맞춰나가야 하는 능동적인 탐구자의 자세를 갖춰야 했다. 이 영화는 가장 내밀한 문체를 가진 시의, 육체가 아닌 정신을 스크린 위에 투사해내고 있다.

버스는 도시를 산책한다

뉴저지의 패터슨에서 시내버스를 몰고 있는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의 삶은 어떻게 현대시가 만들어지는지 아주 정밀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그가 보내는 일주일간의 단조로운 삶을 다루고 있다. 평일에는 늘 오전 6시10분 언저리에 기상한다. 시리얼을 아침으로 먹고, 걸어서 직장에 출근한다. 직장으로 가는 길에 시상들을 떠올리고, 직장에 도착해 운전대 앞에서 그것을 노트에 적는다. 운전을 하며 패터슨의 구석구석을 관망하며 지나치고, 간혹 손님이 나누는 흥미로운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가 싸준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폭포를 보고(윌리엄스의 시 <패터슨>에 나오는 도시가 돌아가는 원동력을 상징하는 바로 그 폭포) 시상을 정리하며 노트에 적어둔다. 퇴근 뒤에는 로라와 저녁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고, 밤에는 애완견 마빈과 산책을 나선다. 마빈을 묶어두고 근처 선술집에 들러 술집 주인이나 지인과 대화를 나누며 맥주를 한잔 마신다. 이렇게 하루를 마치면 다시 또 하루가 시작된다.

버스 기사 패터슨의 삶은 꽤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 단조로운 일상에서의 소소한 사건들과 끊임없는 감정 교류 그리고 틈입하는 정보들이 어떻게 시상(詩想)으로 전환되는지 정밀화처럼 그려낸다. 예를 들면, 그의 아침 식탁 한켠을 무심하게 채웠던 성냥갑은 사랑시의 연인의 열정을 드러내고, 눈에 잘 보이지 않았던- 보통의 상업영화에서 제시되곤 하는 사랑에 관한 통상적인 시청각적 이미지로 대체될 수 없는- 밀도의 감정으로 전환된다. 이때 성냥은 바로 T. S. 엘리엇이 그토록 강조했던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이 된다. 패터슨 자신은 현대성을 체험하는 새로운 종류의 지각 경험들을 담지하고 있었던 보들레르의 ‘산책자’가 기계화된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는 버스에 몸을 싣고 정해진 노선을 따라 도시를 부유한다. 그가 운전하는 버스는 화면에 기계화된 리듬감을 선사하고, 인간 패터슨의 삶에 지리적 배경이자 정서적 요소를 구성하는 도시 패터슨 배경을 오버랩시킨다.

패터슨시에 사는 남자 패터슨

패터슨의 일상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은 그가 버스에서 듣게 되는 이야기들 안에서 벌어진다. 허리케인 카터의 억울한 누명, 패터슨 최초의 아나키스트 그리고 아는 여자들에 대한 허세. 무의미한 타자들의 수다일 수 있지만 그것에 귀기울이는 순간 듣는 이의 삶으로 스며들어 일부가 된다. 마치 로라의 꿈 이야기처럼. 그녀가 들려준 쌍둥이 꿈은 그 이후 패터슨의 일상 곳곳에 등장한 쌍둥이들을 의미 있는 요소들, 뭔가에 대한 예언 혹은 징후처럼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이 영화는 그것들을 굳이 그 지점들에 배치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의미는 보여준 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자의 몫이다. 하지만 곧 또 다른 이미지들이 흘러들어와 그 의미를 씻어버리고 다른 의미들과 뒤엉켜버린다.

패터슨이 저녁마다 들르는 술집은 패터슨시(市)의 작은 역사를 담은 ‘기억’의 장소이다. 술집 주인은 패터슨과 관련된 인물들의 일화(anecdote)들을 스크랩하여 벽면에 소박하게 붙여둔다. 그곳에는 유명인들의 패터슨과 관련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것은 패터슨의 역사이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고, 패터슨만이 기억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것은 일종의 언어 유희인데, 술집 주인이 이기팝에 관한 기사를 보여주며 패터슨에게 그것을 붙여도 좋을지 묻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패터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만의 명예의 전당에 그 기사를 올릴 것을 동의한다. 그것은 패터슨이라는 작은 도시의 이야기이며, 패터슨에게 인지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패터슨(인간)이 패터슨(도시/자아)을 더 알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는 그들의 시 속에서 만들어졌다

언어는 늘 대상의 정수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언저리를 부유한다. 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언어를 통해 본질에 닿으려는 가장 절실한 노력이다. 한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언어를 익혀야 하지만 실제로는 알고 있는 대다수의 언어를 버려야 한다.

짐 자무시는 이 표면적 언어의 경계(외국어들, 다른 인종의 언어, 침묵, 말실수와 오해)를 넘어서는 본질적 언어에 대한 관심을 작품 속에서 줄곧 표명해왔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곧잘 다른 언어를 이용해 무리 없이 소통한다. 이 영화에서는 다양한 버전의 시를 통해 본질적 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패터슨은 시를 통해 어린 소녀와 짧지만 깊은 교감을 나누며, 세탁방의 래퍼와 공감하고, 시를 따라 태평양을 건너온 일본인의 짧은 감탄사 ‘아하’에 담긴 깨달음(둘의 대화는 하이쿠를 연상시킨다)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다른 리듬과 라임으로 혹은 하나의 감탄사로 세계를 바라보고 표현하고 살아간다. 세계는 그들의 시 속에서 다른 언어를 통해 의미화되고 교통된다.

패터슨(인물)이 패터슨(도시)을 관통하는 산책에 완벽하게 관객이 젖어들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감독의 연출력 덕분이지만 패터슨을 연기한 애덤 드라이버가 없었다면 불가능해 보인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작품(<프란시스 하> <위아영>)에서 허세로 가득 찬 힙스터 예술가였던 그는 이 영화에서 평범한 인간의 일상과 몸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예술적 향기를 완벽하게 육화해냈다. 그는 예술이 가진 다양한 결들을 섬세하게 짚어내고 그것을 과장되지 않은 몸짓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안다. 특히 사랑, 공포, 분노, 좌절이라는 격동적 감정을 눈꼬리와 입매의 미묘한 움직임만으로 완벽하게 전달하던 그의 얼굴이 시를 적어 내려가는 무미건조한 장면에서 가장 격렬하게 폭발하는 감정을 드러내던 클로즈업들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패터슨>은 한편의 영화가 한 학기의 시학 강의보다 더 효과적으로 시적 경이를 체득게 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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