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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생존자들
김혜리 2018-10-24

<벌새>

<영주>

<선희와 슬기>

<살아남은 아이>(2017)에 이어 올해 부산국제영화에서 공개된 신작 한국 독립영화들의 주요 관심사는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성인들로부터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미성년자다. 주로 10대 소녀인 이 인물들은 우연히도, 법적 보호자 대신 연고 없는 여자 어른들의 어깨에 기댄다. 성수대교가 끊긴 1984년 <벌새>(2018)의 중학생 은희(박지후)는 자신을 둘러싼 관계도 붕괴되고 있다고 느낀다. 사고로 부모를 여읜 <영주>(2017)의 영주(김향기)는 동생에게 좋은 보호자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던 끝에 아직 자기도 안아줄 팔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선희와 슬기>(2018)의 고교생 선희(정다은)는 위기가 닥치자 냉담한 부모와 상의하느니, 차라리 멀리 떠나 죽거나 완전히 다른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다.

10/04

1999년 <쥐잡이>로 데뷔해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까지 린 램지 감독이 내놓은 4편의 영화를 아우르는 공통점은 부서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쥐잡이>는 친구를 밀쳤다가 죽음을 이르게 한 소년, <모번 캘러>(2002)는 애인의 자살을 마주한 여성이 주인공이고 <케빈에 대하여>(2011)는 학살을 저지른 가해자의 엄마가 화자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조(호아킨 피닉스)는 유년시절 아빠의 폭력으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환자다. 수많은 영화의 중심 소재로 채택되는 가정폭력, 자살, 대량학살은 린 램지의 영화에서 이야기의 계기로만 다뤄진다. 린 램지 영화의 본론은 폭력이 개인 안에 초래한 강렬한 상태 혹은 그것이 2차 폭력을 낳는 과정이다. 그리고 램지는 이 모든 상태를 인과적 설명 대신 이미지, 사운드, 편집 등을 통해 묘사하고 암시한다.

조너선 에임즈의 원작은 조를 이렇게 설명한다. “조는 아버지의 구타가 자신의 영혼을 지배해 마치 토템처럼 자의식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가학적인 아버지의 폭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그 행위가 정당하고 아버지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그 믿음은 여전히 조와 함께했고 돌이킬 수도 없었다. 조는 아버지가 시작한 그 폭력행위를 끝내려고 거의 50년을 기다렸다.”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이와 같은 설명을 하지 않고 조의 뇌리와 그가 느끼는 세계를 보고 듣게 한다. 트라우마의 재발로 현장을 이탈하는 바람에 면직된 후 조의 생업은 성매매 조직에 납치된 10대들을 사적 의뢰를 받아 구출하고 가해자를 응징하는 해결사다. 하지만 성인이 된 조가 전장과 범죄현장에서 구조하지 못한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가 남긴 상처에 더해져 죽음을 향한 그의 열망을 더할 뿐이다. 린 램지는 학대와 실패의 기억을 온전한 플래시백 대신 사금파리같이 찔러대는 무수한 ‘플래시’로 조각내 조의 일상에 흩뿌린다. 조에게 자살은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언제냐의 문제다. 이 남자에게 생사, 과거와 현재의 구분은 거의 의미가 없다.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틸다 스윈튼)가 그랬듯이 조의 현재는 과거의 고통과 회한에 실질적으로 시시각각 포위돼 있다. 영화와 소설의 제목이 비롯된 “괜찮아 그냥 가면 돼. 넌 원래 여기 없었던 거야”라는 조의 내적 독백은, 린 램지의 시각적 연출 모티브이기도 하다. 타나토스의 의인화 같은 인물인 조는 살아 있으나 동시에 지금 여기 온전히 있지 않다. 불법 해결사로서 신원을 드러낼 만한 증거와 주소를 지우는 데에 실제로 능하기도 하지만, 린 램지는 조의 반투명한 실존적 상태를 현실인지 환영인지 긴가민가한 광경의 연출로 드러낸다. 토마토 즙이 피처럼 출렁이던 <케빈에 대하여>에 비하면 한결 은근한 톤으로. 예컨대 의뢰받은 한 사건을 해결한 조가 공항 음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뒤쪽으로 시선을 던지면 이어지는 숏은 시선 방향 의자에 누워 있는 한 여성을 잡는다. 눈을 뜨고 입을 벌린 여자는 휴식하는 여행자 같기도 하고 시체 같기도 하다. 다시 카메라가 제자리로 패닝하면 조는 사라지고 음수대의 물만 솟다 멈춘다. 조는 과연 거기에 있었을까? 아니면 조와 관객만 죽은 자를 보고 있는 걸까? 번잡한 뉴욕 거리를 걷는 조를 길 건너편에서 찍은 숏에서, 조는 달리는 차에 가려진 다음 순간 눈 깜짝할 새 사라져버린다. 도시에서 흔해빠진 광경이지만, 앞선 공항 신의 여운이 조를 유령처럼 보이게 만든다. 백주의 뉴욕 전철역 플랫폼에도 조를 멍하니 응시하는, 하지만 말을 섞지 않는 여자가 있다. 공항과 전철역의 말없는 여자들은 조가 죽음을 유예하도록 만드는 두명의 여성- 어머니와 납치된 니나- 과 비슷한 연한 색 머리칼을 가졌다. 어머니와 니나의 일렁이는 머리카락은 영화 후반 수중 장면에서 죽음과 재생을 기적적으로 연결하는 운명의 실처럼 표현된다. 액션 시퀀스에 있어서도 비슷한 규칙이 관철된다. 린 램지는 조가 미성년자 성매매 소굴에 침투해 망치로 보초들을 쓰러뜨리는 대목을, 멀찍한 흑백 CCTV 화면(으로 설정된 촬영)으로- 오마주 대상으로 거론되는 <택시 드라이버>(1976)의 해당 시퀀스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보여준다. 이는 폭력이 스펙터클이 되는 결과를 꺼리는 연출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폭력을 행사하는 조라는 인물의 본질과 관련된 방법이 아닐까 싶다. CCTV 특성상 몇초 앞뒤로 튀기를 반복하는 구조 장면은, 망치를 휘두르는 행위를 조가 들어오기 전의 공간과 폭행 후 상황보다 강조하지 않는다. 니나를 데리고 빠져나오는 길에 화면은 다시 컬러로 변하는데 역시 폭력의 결과인 쓰러진 몸들이 주로 스크린을 차지한다. 조는 운동하는 액션의 주체라기보다 그가 남긴 폐허들의 총합이다.

10/07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칸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함께 각본상을 탔다. 조너선 에임즈의 짧은 소설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읽었다. 사건 전개에서는 놀랄 만큼 원작에 충실한 동시에, 결정적 세부를 더한 각색이다. 각색으로서 플롯의 가감보다 중요한 장점은 소설의 묘사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해서 시청각으로 옮겨놓은 작업에 있다(여기서 각색은 원작에서 글로 된 시나리오로의 변화만 뜻하는 것인가라는 질문도 생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오히려 소설이 영화보다 액션 장르물로 느껴지는 희귀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비교적 하드보일드하게 행위의 표면을 따라가는 소설에 비해 영화는 인물의 부서진 내면과 거기 투영된 현실에 집중한다. 조가 파병된 전장이 아프가니스탄이었는지 쿠웨이트였는지, 백일몽 속 떼죽음한 사람들이 난민이었는지 성매매된 소녀들이었는지 명시하는 일은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또한 카메라 앞의 살아 있는 인간이 연루되기에 소설에는 없던 요소가 영화에는 포함된다. 유머와 육체성이다. 영화의 조는 자살에 관해 명상하다가 수도꼭지를 다루지 못하는 어머니의 외침에 급히 뛰어가야 한다. 소설의 조는 “신장 189cm에 체중 86kg의 체지방 없는 몸”의 소유자로 소개되지만, 호아킨 피닉스의 조는 여기저기 늘어지고 상한 불균형한 신체를 보여준다. 배우의 조건도 있겠지만, 스크린의 조가 일을 위해 부지런히 단련하는 해결사처럼 보이는 것도 부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살아 있기에 발생하는 시시각각의 통증과 스트레스, 그리고 살아가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불가결하게 수반되는 유머가 소설에는 없고 영화에는 있다. 소설은 어린 조가 갈망했던 복수 대신 정의를 추구하게 되는 결말을 취해 다음 표적을 향해 움직이는 왕성한 운동 중에 끝나는 반면, 영화는 어머니와 니나가 포개지는, 죽음의 완결이자 부활의 시작인 정적인 영점(零點)에서 종료된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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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의 아네트 베닝은 모방이나 특수분장의 조력 없이 실존 배우 글로리아 그레이엄(1923~81)의 핵심을 재현한다.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2011)에서 미셸 윌리엄스가 그랬듯. 온 세상이 다 아는 마릴린 먼로를 연기한 윌리엄스와 달리 베닝의 성취는 영화에 잠깐 삽입된 그레이엄의 출연작 클립과 오스카 조연상 수상 현장 기록 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네트 베닝이 그리는 그레이엄은 천진하고 관능적이면서도 자존감이 확실한,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다. 스타들의 사인을 테이블 램프갓에 넣은 뉴욕 레스토랑에 연인 피터(제이미 벨)를 데려간 글로리아는 잘난 척하지도 겸손하지도 않다. 과거의 영광을 그리며 애상에 잠기지도 않는다. 그저 재미있어한다. 영화 후반 등장하는 1952년 오스카 시상식 기록 필름은, 글로리아가 정말 그럴 법한 사람임을 확인시킨다. 호명된 글로리아 그레이엄은 오스카 트로피가 무슨 주문한 테이크아웃 커피라도 되는 양 휙 받아들고 “매우 감사해요” 한마디를 날리며 퇴장한다. 마이크 앞에 거의 멈추지도 않고 단상을 지나쳐간다. 글로리아 그레이엄은 명성이 자신을 바꿔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성기에도 말년에도 알았던 스타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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