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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우 감독, 배우 박중훈·최명길·유혜리가 함께한 <우묵배미의 사랑> 재개봉 현장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18-11-08

1989년의 그 겨울로 우리는 함께 갔다

유혜리, 장선우, 최명길, 박중훈(왼쪽부터).

너무도 가난한 청춘, 삶의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에게 사랑의 적시적소를 논할 수 있을까. <우묵배미의 사랑>에서 봉제공장의 재단사인 일도(박중훈)와 미싱사 공례(최명길)는 각자의 가정을 뛰쳐나와 애틋한 만남을 지속한다. 여관비가 아까운 이들의 밀애는 한겨울 비닐하우스에서도 처량한 온기를 피워낸다. 공례는 남편(이대근)의 폭력에 시달리고, 일도의 아내인 지호 엄마(유혜리)는 상실의 분노에 휩싸여 둘의 자취를 끈질기게 좇는다. 그들은 어디로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자리가 움푹 팬 곳을 뜻하는 서울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장선우 감독은 탈출구가 대체 있기나 한 것이냐고 묻는다.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보물 중 하나로 남은 이 작품이 지난해 한국영상자료원의 디지털 복원을 거쳐 올가을 재개봉한다. 1990년 개봉 이후 28년 만이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10월 29일(월)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씨네21> 주성철 편집장의 진행으로 관객과의 대화(GV) 상영회가 열렸다. 당시 20대였던 박중훈, 최명길, 유혜리 배우가 오랜만에 모인 뜻깊은 자리로, 장선우 감독은 “거친 것 안에서 따뜻한 것이 나오고, 슬픈 것에서 희극적인 것이 나오는 이중의 울림”을 전했다. 영화가 남기는 쓸쓸함을 따뜻한 추억으로 쓰다듬었던, 그날 밤의 GV 현장을 전한다.

=박중훈_ 28년 전 영화가 개봉하다니, 내 인생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감독 이명세, 1990), <게임의 법칙>(감독 장현수, 1994) 같은 영화들은 심지어 현재 국내에 필름이 없는 상태다. 외국에서 특별전 요청이 들어와도 보낼 필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묵배미의 사랑>은 놀랍게도 보존이 잘된 데다 디지털 복원까지 훌륭하게 이뤄져서 오늘 다시 보니 요즘에 찍은 시대물 같더라. 자화자찬 같지만, 이 영화는 내게 정말 많은 것을 남겼다.

-주성철_ <우묵배미의 사랑>은 1990년 3월 31일에 개봉했다. 거의 30년 만에 오늘의 자리가 만들어진 셈이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만 해도 한국 관객은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볼만한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묵배미의 사랑>을 비롯해 <칠수와 만수>(감독 박광수, 1988)나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들을 보면서, 내 또래 사람들에게는 장차 한국에서 영화를 직업으로 택해도 좋겠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줬다. 특히 <우묵배미의 사랑>은 박광수 감독의 사회파 리얼리즘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이 담긴 리얼리즘 영화다. 동시녹음이 자리잡으면서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도 한국영화에 담기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박중훈, 유혜리 배우의 2개 내레이션 시점으로 나눠진 것 같은 화법 또한 굉장히 세련됐다. 그 와중에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추위는 다시 봐도 찬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강력해 보인다. 당시 현장 상황은 어땠나.

박중훈

박중훈_ 1989~90년 사이의 겨울인데, 80년 만에 온 추위였다. 뉴스에서 청평, 양평, 가평이 가장 추웠다는데 이 영화 촬영지가 청평, 양평, 가평이었다. 요즘은 촬영장의 보온 시설이 잘되어 있지만 당시는 그냥 정신력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내 딴에는 배고픈 연기를 한다고 저녁을 굶은 채 재킷 하나만 입고 연기했는데, 단연코 내 33년 영화 인생에서 가장 추운 기억으로 남았다. 최명길 선배는 기억을 못하시던데, 폐비닐하우스에서 밤새워 촬영하던 날 한쪽에서 구슬피 우시더라.

-주성철_ 영화 오프닝에서 공례가 남편에게 맞는 장면은 당시로서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사실적인 연출이 가능할까 싶었다.

=최명길_ 그저 정신없이 촬영을 끝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자 다른 촬영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걷지를 못하겠더라. 결국 그날 촬영을 접었다. 비닐하우스에서 울었던 것도 이제는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참….

박중훈_ 독했지.

최명길_ 영화 속 지호 엄마에게도 참 많이 맞았다. (웃음)

=유혜리_ 바람난 남편의 뒤를 좇아서 밀애 현장을 급습하고야 말겠다는 일도의 아내를 연기했다. 등에 아이를 업은 일종의 ‘형사’였다. 처음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일단 남편 먼저 30대 정도 때리고 그다음 공례의 머리채를 잡았다. 동시녹음을 도입한 터라 때리는 소리를 가짜로 입히지 않고 진짜처럼 해달라는 감독님 요구가 있었다. 그래서 때리는 장면들 하나하나가 쉽지 않았다. 나중에 다른 작품에서 내가 한번 맞아보니까 정말 아프더라.

=장선우_ 공례가 남편에게 맞는 장면도 영화에서 저 정도면 실제 현장에는 5~6배의 강도다. ‘저걸 어떻게 했지, 저걸 시킨 사람이 누구지’ 하고 생각해보니 마음에 괴로움이 밀려오더라. 나중에 알고보니 박중훈 배우가 그 추위에 밤새 촬영하고 혼자 운전해서 집에 돌아갔다더라. 그때는 소속사라는 게 없었으니까. 너무 졸려서 자기 구레나룻을 뽑아가며 운전했다는 말을 듣고 너무 죄송스러웠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찍는다지만 현장까지 그렇게 살벌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세심한 디테일들을 스스로 하나하나 찾아서 연기해준 배우들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 이 자리를 빌려 스탭들에게도 사죄드린다. 앞으로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겠다. (박수)

-주성철_ 유혜리 배우는 <우묵배미의 사랑>을 통해 이미지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배우로서 독기를 품었다는 게 선명하게 보일 정도다.

유혜리_ 당시 몇편의 에로영화를 찍고, 비슷한 시나리오만 계속 받았다. 그런데 <우묵배미의 사랑> 속 새댁은 소외계층으로서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남편 일도를 때리는 건 기본이고, 발길질을 하거나 욕을 해야 해서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배우로 새롭게 탈바꿈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첫 촬영에 나섰는데, 생각보다 욕이 맛깔스럽게 안 나왔다. (웃음) 연극하는 선배님들 뒤를 쫓아다니면서 구성지게 욕하는 연습을 정말 많이 했다.

-주성철_ 당시 박중훈 배우는 장선우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지를 계속 내비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박중훈_ 당시 한해에 100여편의 영화가 제작됐다. 스크린쿼터 편수를 맞추기 위해 퀄리티가 낮은 영화들도 쏟아지던 시기였다. 컬러TV의 등장으로 유능한 배우나 연출가들은 텔레비전 드라마로 가는 추세이기도 했고. 한국영화계가 열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장선우 감독님을 비롯해 배창호·이장호·임권택 감독님 등 각자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분들도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장선우 감독님, 안성기 선배님 등과 술을 마셨다. 그 당시 장선우 감독님이 군부독재 시절 고문경찰 이야기를 담은 <붉은 밤>이라는 작품을 계획중이었는데, 내 별명이 ‘붉은 닭’이라고 어필하며 적극적으로 출연시켜달라고 했었다. 결국 영화는 정부의 압력 탓에 성사가 잘 안 되고, 이후에 <우묵배미의 사랑> 시나리오를 받았다.

-주성철_ <우묵배미의 사랑>은 장선우 감독님의 전작 <성공시대>(1988)와 비교해보면 스타일이나 결이 무척 다른 영화이고, 이후에도 <경마장 가는 길>(1991), <화엄경>(1993),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꽃잎>(1996) 등 ‘작가의 여정’이라고나 할까, 매번 큼직큼직하게 이동하는 궤적을 통해 후배 감독들에게 어떤 작가적 전범이 됐다. 이런 흐름 안에서 <우묵배미의 사랑>은 어떤 결심을 통해 탄생한 영화인지 궁금하다.

장선우

장선우_ 영화를 벗어나, 제주도에서 산 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 영 낯설다. 나는 그렇게 계속 스타일을 바꿔가면서까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나. 가장 민망하게 느끼는 영화 중 하나가 <화엄경>인데, 그 구성을 보면 어린 동자가 자기 어머니를 찾기 위해 세상을 방황하고 여러 스승을 만나가면서 구도를 찾는 로드무비다. 이제 와 생각건대 나는 계속해서 스승을 찾았던 게 아닌가 싶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고, 또 답을 찾고…. 그러다 어느 순간 영화 밖에서 답을 찾는 중이다. 그다음엔?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겠다. 나의 마지막에 대해 스스로도 기대를 하고 있다.

-주성철_ 지호 엄마가 일도와 공례를 잡아서 끌고 나오는 장면에 대해 묻고 싶다. 택시 기사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두 사람을 잡으러 들어간 상황이기 때문에 관객으로서는 다시 택시로 돌아가기까지 긴박감도 느껴지고, 그 와중에 동네 아이들 무리를 뚫고 가는 생생함도 있다. 감독 데뷔 이전부터 관심을 두었던 마당극적인 요소가 돋보이는 장면인데.

장선우_ 기억력도 나쁜 데다 현장에서 즉흥적인 부분이 많았던 터라 대답하기가 어려운데, 짚어준 게 맞는 것 같다. 마당극에서 보이는 흥의 순간들, 그 감각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안한 말이지만 영화속에서 박중훈 배우가 맞을 때 난 가끔 쾌감을 느낀다. (일동 웃음)

유혜리_ 감독님이 하루는 일도를 구박하는 내 연기가 약하다 싶었는지 도끼를 가져와서 들고 뛰라고 하시는 거다. 처음엔 안 믿었다. 농담이겠지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신을 쓰셨더라.

박중훈_ 도끼가 아니라 망치인데…. (일동 웃음)

장선우_ 도끼라고 하니까 내가 더 나쁜 사람 같다.

유혜리

유혜리_ 맞다, 망치. 한번은 내게 호랑이가 쥐를 잡는 듯한 액션으로 해달라고 요구하셨다. 새댁은 겉으로는 거칠지만 숨겨둔 과거의 아픔이 있고, 현재는 자신의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감독님이 일도를 과감하게 때리라고 주문할 때마다 아주 과감히 때렸다.

-주성철_ 당시는 의상감독이 따로 없던 시절이다. 영화 속 공례와 일도의 의상은 배우들의 소장품인가.

최명길_ 맞다, 실제 내 옷이다. 별도의 의상팀 없이 연출부와 함께 의상을 챙겼다. 가난하지만 일도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공례의 마음을 두고 감독님과 의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박중훈_ 나는 당시 조감독이었던 임종재 감독님과 함께 청계천을 돌면서 아주 싼 옷들을 여러 벌 샀다. 일도 캐릭터에 맞게 더 꼬질꼬질한 차림새를 하려고 일부러 차 트렁크에 방치했는데, 어느 날 차를 도둑맞아서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장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도난 신고 후 이틀 만에 차를 찾았다. 옷이 워낙 더러워 보여서 그랬는지 도둑이 옷은 그대로 두고 차 바퀴만 훔쳐갔더라. (웃음)

-주성철_ 쓸쓸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의 엔딩에 관해서도 감독님의 코멘트를 들어보고 싶다. 당시로서는 한국영화에서 매우 드문 엔딩이다.

장선우_ 1990년 개봉 당시를 제외하면 이렇게 큰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사실상 거의 처음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회자정리, 그러니까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진실을 담고 싶었다. 고통스럽게라도 만나서 거기에서 의미를 찾고, 에너지도 얻었지만 결국에 모든 만남은 헤어짐으로 끝난다는 것이 내가 바라보는 진실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는 진실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주의 영화를 숙고한다면 이별을 택해야 한다.

-주성철_ 끝으로 각자 인사 말씀 부탁드린다.

최명길

최명길_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드니로가 나오는 <폴링 인 러브>(1984) 같은 작품을 해보고 싶다. 손 한번 잡는 순간도 가슴을 시리게 했던 영화다. 지금까지 참 오래 기다렸는데, 영화와 연이 닿지 않았던 것은 아쉽게 생각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영화가 있다면 언제든지 열심히 임하겠다.

장선우_ 오늘 이 영화를 봐주신 분들 행복한 겨울 맞이하시길 바란다.

유혜리_ 2018년 가을 끝자락에 <우묵배미의 사랑>을 재상영할 수 있어서 뭉클했다. 많은 분들이 봐주셔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박중훈_ 모든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각자의 고생을 겪으며 살아가지 않나. 그런데 영화를 해서 좋은 점은 오래전에 고생했던 순간이 이렇게 기록이 되어 남는다는 점이다. 그 기록을 같이 봐주시고 마음을 나눠주시는 경험, 내게는 더없이 큰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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