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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배우 4인 대담 _ 고아성, 김새벽, 김예은, 정하담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19-02-28

여성들의 관계가 돋보이는 영화에서 앙상블 연기를 더 많이 해보고 싶다

배우 김예은, 김새벽, 고아성, 정하담(왼쪽부터).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 중 하나일 유관순 열사의 활동에 관해, 그리고 같은 시기 존재했던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에 관해 부끄럽게도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1919년 4월 1일 17살의 나이로 고향 병천의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체포된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 감옥에 머물렀던 1년여의 시간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배우 고아성이 유관순을 연기했고, 김새벽이 수원 지역 기생들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김향화를, 김예은이 개성 시위를 이끈 유관순의 이화학당 선배인 권애라를, 그리고 정하담이 8호실의 막내로 설정된 가상의 인물 이옥이를 연기했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비추는 여옥사 8호실은 25명의 수인들이 겨우 제 한몸 서 있을 공간을 찾기 힘들 정도로 좁디좁다. 옥중 동료로서 “추위도, 배고픔도, 답답한 공기도 모두 함께 느끼는” 사이, 이들은 역사적으로 무거운 의미를 지닌 인물들의 인간적인 감각을 나눠가짐은 물론이고, 카메라 바깥에서는 젊은 여성배우들이 대거 한자리에 출연하는 작품에 대한 고마움도 알뜰히 공유했다. 대담 말미에 “다음번엔 한 작품에서 자매들로 만나면 좋겠다”라고 입을 모은 네명의 배우들은, 그렇다면 <작은 아씨들>이 딱이겠다는 기자의 말에 다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영화에 잊지 못할 얼굴들을 새겨넣었고, 이미 의좋은 자매나 다름없어 보였던 배우 4인이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작업 일지를 소상히 들려줬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이하 <항거>)가 보여준 기운 그대로 유관순 열사를 필두로 한 4명의 옥중 동료를 함께 만나고 싶었다. 일단 영화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부터 듣고 싶다. 특히 유관순 역은 고문 장면이 있고 육체적으로도 험난할 것이 예상되는 작품이라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고아성_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그동안 유관순 열사를 다룬 작품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번 놀랐다. 예상했던 그분의 강인한 이미지나 굳은 신념 같은 것에만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인간적으로 고민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조언을 구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담는 점이 좋았다. 실제로 동료들에게 장난을 많이 쳤다는 기록도 있더라.

=김예은_ 생각보다 관련 자료가 적다는 게 이번에 작품을 준비하면서 놀란점 중 하나다. 유관순 열사가 심하게 고문당했다는 사실만 자주 언급돼 있고, 그분의 삶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는 알려진 부분이 거의 없더라. 하물며 (내가 맡은) 권애라 선생은 더 알려진 것이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다. <항거>를 통해서 그분을 기리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기쁘겠다는 마음으로 출연을 결심했다.

김새벽

=김새벽_ 나 역시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내가 맡은 캐릭터보다는 유관순 열사를 조명하는 영화라는 점에 좀더 의의를 뒀다. 잘 알고 있는 사람에 관한 본 적 없는 이야기라는 점에 끌렸다. 또 한편으론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한 사람 한 사람 다 존재하고 살아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체감하게 만든 영화다. <항거>를 통해 김향화, 권애라 선생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정하담_ 시나리오를 읽기 전에 감독님과 먼저 만나서 이옥이 캐릭터에 관해 먼저 들었다.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옥사 8호실에 25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어린 인물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일단 좁은 옥사 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들어서 깜짝 놀랐고, 자연스럽게 감정이 동했다.

역사적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의 기쁨과 슬픔

-언론 배급 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고아성 배우가 유관순 열사에게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언급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 <항거>는 촬영 현장에서 자주 배우들의 감정이 벅차오르지 않았을까 예상되는 작품이다.

김예은_ 고아성 배우가 울보다, 울보.

고아성_ 촬영할 때 다들 울었잖아, 왜 그래! (일동 웃음)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옥사 안에서 만세시위를 재개하는 장면이 기억난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긴 대사를 끝내고 감독님이 컷을 외치는 순간, 갑자기 내 눈앞에 펼쳐진 동료들의 풍경이 마치 정말로 당시에 실재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눈물을 흘리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다른 배우 모두 울고 있는 거다. 뭉클했다.

-조민호 감독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 열사의 사진 한장을 보고 그 눈빛에 끌려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캐릭터를 상상하고 연구했나.

고아성

고아성_ 혼자 서대문형무소에 가봤는데, 유관순 열사의 커다란 초상을 보는 순간 곧바로 감독님이 말씀하신 사진이 이거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또 영감을 준 것은 여기 <씨네21> 스튜디오처럼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작은 사진이 빼곡히 붙어 있는 방이었다. 그리고 맨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감독님의 서문이 있었는데, 유관순 열사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여러 위인을 언급하면서 지도자로 기억되는 많은 사람이 실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 잘하고 있는 거 맞느냐’고 자꾸 물어보고 불안해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셨다. 나는 살면서 반장도 해본 적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이끄는 역할을 부담스러워한 편인데, 감독님 말씀을 듣고 유관순 열사가 지닌 특별한 재능에 대해 좀더 공감하게 됐다.

김예은_ 권애라 선생은 개성 지역의 첫 만세시위를 이끈 인물이라는 사실 외에는 정보가 극히 적었다. 시나리오에서 유관순 외에 다른 사람과 그리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점에 착안해 굉장히 독립적인 성격이었을 것으로 캐릭터를 잡았다. 전에도 이미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그래서 가능한 한 독립운동가들이 덜 다치면서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련하고 사려 깊게 고민하는 전략가의 기질이 있다고 봤다.

김새벽_ 김향화 선생에 관한 정보도 양으로 따지면 세줄 정도뿐이다. 주근깨가 많고 말투나 행동이 매우 당돌했다, 수원 지역 기생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정도다. 생각해보니 이전에 실존 인물을 연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혹시 김향화 선생을 알았던 분들에게 폐가 되진 않을까 겁이 좀 났다. 유튜브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수원 지역 기생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김향화의 마음과 독립운동을 해나가는 여러 사람의 보편적인 마음을 섞어가면서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

정하담_ 다방 종업원 출신인 옥이는 실존 인물이 아니어서 서대문 형무소에 걸려 있는 많은 사람의 사진을 보면서 이중 어떤 사람과 가장 가까울까 생각했다. 관순, 애라, 향화 같은 8호실 사람들을 만나 성장하는 캐릭터라고 바라봤다. 극중 남자들처럼 만주에 가서 활동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수감 경험을 통해 더욱 단단해져서 출소 이후엔 만주에 가고 러시아도 가며 자유롭게 살았을 거라고 상상했다.

-고증에 특별히 신경 쓴 부분도 있나.

고아성_ 유관순 열사의 사진은 많이 봤지만 목소리를 한번도 들어본 적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음성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리고 개신교 신자였던 유관순 열사는 애국심만큼 신앙심도 강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내가 종교가 없다 보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처음엔 어렵게 느껴졌다. 이번에 영화를 확인해보니, 옥사에서 선배 권애라와 함께 ‘하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실까?’ 하고 고뇌하는 장면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귀엽게 느껴지더라. 다행스러웠다.

김새벽_ 나는 수인복 안에 무용할 때 입는 레오타드를 입었다. 김향화다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당시엔 실존 인물의 진실에 가까워지려면 무엇이 더 있을까 고민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극중 노래 부르는 장면은 음악감독님이 골라주신 경기민요를 레슨받은 결과다. 자기 마음을 노래로 능숙하게 표현하는 인물이었을 텐데 연습 기간이 짧았던 터라 걱정이 많았다. 그리고 만세를 외치다 들어온 사람이니까 처음엔 목소리도 마냥 곱지는 않을 거라고 봤다. 일부러 목을 많이 긁은 다음 촬영에 들어갔는데, 한번은 감기에 심하게 걸리기도 했다. (웃음)

김예은_ 이화학당 선후배 사이인 권애라 선생과 유관순 열사는 사실 서로 알고만 있는 정도였는데, 나는 권애라가 비록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독립운동 진영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유관순을 크게 아끼고 있었을 거라고 느꼈다.

고아성_ 예은 언니가 출소 이후 권애라 선생의 삶을 말해준 것이 인상 깊었다. 무력투쟁이나 행동파쪽이 아니라 주로 강연 활동으로 민중을 계몽하는 데 힘썼다는 이야기였다. 현장에서 느낀 권애라 캐릭터의 본질을 더 확실하게 느끼게 된 계기였다.

정하담_ 옥이는 일제강점기에 다방에서 일하면서 문화적 혜택을 누리는 계층의 손님을 많이 만났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일본어도 늘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북한 사투리도 쓰는데, 시대배경이 남북 분단 이전이니까 당연히 북쪽에서 온 사람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황해도 지역에 독립운동가가 많았다고 들어서 처음엔 황해도 사투리를 구상하다가 최종적으로 평안도쪽으로 굳히게 됐다.

열일곱의 유관순을 만났던 순간들

-유명한 만큼 얼마간 피상적으로 알던 인물을 생생하게 감각하게 된다는 사실이 <항거>를 보는 내내 뜨겁게 다가온다. 직접 연기한 배우들이 꼽는 기억에 남는 장면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고아성_ 극 초반에 다 같이 원을 그리면서 돌 때 그 풍경이 너무 슬펐다.(서 있기만 하면 오히려 다리가 더 붓고 아프기 때문에 수인들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걸어 다녔다. 밤에는 번갈아가며 잠을 청한다.-편집자) 촬영 초반이어서 막 감옥에 들어온 유관순이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배우들과 약간은 어색한 감정을 나누고 있었는데, 예은 언니가 불쑥 ‘이렇게 도는 거 너무 슬프지 않아?’라고 말을 걸었다. 다들 같은 느낌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마음이 아팠던 순간 중 하나다.

김새벽_ 유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 처음 도착하는 오프닝 장면을 꼽고 싶다. 수갑 찬 맨발이 화면에 잡히고, 이윽고 얼굴이 가려진 채 약간 두리번거리며 걷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다 얼굴이 드러났을 때 고아성 배우의 표정을 보면서 이 사람 정말 유관순이구나 하고 영화 안쪽으로 성큼 빨려 들어갔다.

김예은_ 고문을 심하게 당하고 옥사로 돌아온 유관순 열사가 겁을 먹고 구석에 앉아 있던 모습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이 애초에 자기가 품었던 원대한 다짐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큰 공포를 느낀다고 생각한다. 대열 안에서 원을 돌면서 바라본 그때 고아성 배우의 모습, 그 관순의 모습이 또렷이 기억난다.

고아성_ 감사하다. 칭찬은 처음 듣는다.

김예은_ 현장에서는 맨날 서로 놀리기 바빠서 그랬지…. 쫑파티 때는 쑥스러워서 도저히 이런 이야기를 못하겠더라고. (웃음)

정하담

정하담_ 3·1운동 1주년 기념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장면에서 나는 대한 독립 만세를 사람이 실제 입말로 외치면 어떤 느낌인지 처음 실감했다. (고아성 배우를 따라하며) ‘대~한 독립 만세!’. 아성 언니가 아까 유관순 열사의 음성을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는데 내게는 아성 언니의 음성이 곧 유관순의 것이었다.

고아성_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 전 재판장에서 의자를 집어던지는 장면이 있었는데 시나리오 단계에서 최종적으로 삭제됐다. 왜 빠졌느냐고 감독님께 물어보니 <항거>는 인물의 기개를 과시하려고 만든 영화가 아니라고 하시더라. 그 이후 캐릭터가 더 잘 잡히는 것 같았다.

촬영장 어디를 가나 ‘여자 친구들’이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 <항거>는 그동안 기회의 부족을 절감한 젊은 여성배우들이 살을 맞대고 진심을 펼쳐내는, 밀도 높은 화학작용의 장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더욱 뭉클하다.

김새벽_ 영화 한편을 찍을 때마다 개인적으로 특히 기대하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인데, <항거>는 여기 있는 이 친구들, 이 배우들과 함께 촬영한다는 것의 의미가 여느 때와 달랐다. 이렇게 온전히 여성 캐릭터만 나와서 호흡하는 이야기는 많지 않으니까. 결과적으로 기대 이상으로 동료들에게 고맙다.

고아성_ 작품을 준비하면서 배우 활동을 하는 친한 언니에게 <항거>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이 영화의 핵심은 유관순 열사가 아니라 8호실에 같이 있던 모든 여자의 존재라고 하더라. 유관순이 돼 그 여성들을 부각시켜줄 수 있다면 자신 있게 작품에 임하라고 조언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젊은 여성배우들이 여럿 나오는 영화에 출연하는 기회를 잡을 뿐만 아니라 더 잘 살려내서 좋은 선례로 남기라는 뜻이 아니었나 싶다.

김예은

김예은_ 촬영 내내 신기했던 건 동성이 한 화면에 아주 많이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웃음) 촬영장 어디를 가나 마음이 잘 통하는 여자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했다. 현장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다들 함께했던 것 같다.

정하담_ 막내로서 이렇게 여러 사람에 둘러싸여 사랑받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물리적으로 굉장히 가깝게 붙어서 연기하는 촬영장이어서 더 특별했던 것 같다.

-<항거>는 각자의 필모그래피 내에서 어떤 의미가 될 것 같나, 그리고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나고 싶나.

김예은_ 대외적으로는 강인하지만, 한명의 사람으로서는 흔들릴 수도, 두려워할 수도 있는 여성 인물을 많이 만나고 싶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 중엔 <더 포스트>(2018)가 그랬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아직 한국영화계에서는 여성 캐릭터에게 요구하는 결이 그리 다양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다. 전형성에 머무르지 않는 다양한 상(像)을 제안받고 싶다.

정하담_ 언니들과 흡사한 바람일 텐데, 이렇게 여성간의 관계가 돋보이는 영화에서 마음을 나누는 앙상블 연기를 더 많이 해보고 싶다. 무엇보다 연기하는 그 순간에 내게 좋은 힘을 준다. 그리고 이런 장면이 가득한 영화는 찍고 나서도 배우 개인에게 에너지를 준다.

고아성_ 맞다. 카메라 바깥까지 이어진다.

김새벽_ 여성 인물 2~3명이 서로 가까운 관계였던 적은 있는데, 젊은 여성배우가 이렇게 여러 명 나오는 작품은 그동안 제안받은 적 없었던 듯싶다. 촬영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작품을 또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아성_ <항거> 같은 작품 꼭 다시 하고 싶다. 한국영화계 여성배우들의 라인업 면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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