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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배우 박명훈 - 기이함보다는 평범함에서 출발했다
장영엽 사진 백종헌 2019-06-20

“지하에 머물던 근세가 지상으로 올라와 빛을 쬘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웃음)” <기생충>이 개봉한 지 2주 만에 매체 인터뷰에 나선 배우 박명훈의 소감이다. 영화의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 캐릭터로서, 박명훈의 존재는 <기생충>의 마케팅 과정 내내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혹여나 관객이 눈치챌까 칸국제영화제 공식 시사에서도 박명훈은 다른 배우들과 함께 입장하지 못했다. 그런 점이 아쉬웠을 법도 한데, 그는 뤼미에르 극장에서 관객의 기립박수가 쏟아지는 순간,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말을 아꼈다. 15년여간 대학로 무대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산다> <스틸 플라워> <재꽃> 등의 독립영화를 통해 영화와 인연을 맺은 박명훈은 사회와 모든 관계를 단절한 채 지하실에 머무는 <기생충>의 근세 역으로 성공적인 상업영화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을 만난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지난 2017년, <재꽃> 시사회에 봉준호 감독이 모더레이터로 참석한 적 있다. <기생충> 섭외를 위한 사전 작업이었을까. (웃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미팅 제안을 받은 건 지난 3월이었는데, 근세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라 감독님께서 캐스팅 막바지 단계까지 많은 고민을 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재꽃>을 인연으로 <기생충>에 캐스팅되지 않았나 싶다. 당시에도 “술 취한 연기의 대가”라며 <재꽃>에서의 연기를 극찬해주셔서 감사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근세라는 인물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와닿았던 점은.

=처음에는 지하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다는 것 자체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골룸이 연상되더라. 하지만 막상 근세를 연기할 때 기이함보다는 평범함으로부터 출발했다. 한때는 그도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기에 너무 순진해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명퇴당했을 것이고, 퇴직금으로 자영업을 시작했지만 몇번의 실패를 거듭한 뒤 대만 카스테라 가게까지 망하자 지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한때는 평범했으나 처한 상황 때문에 점점 기이해지는 인물로서의 근세를 표현하고 싶었다.

-촬영 전 한달간 지하실 세트에 먼저 가서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다. 그때의 경험이 근세를 연기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

=촬영 한달 전 ‘지하에 몸을 붙여보자’는 생각으로 아무도 없는 전주 세트장에 먼저 가서 몇 시간씩 누워 생각하고 자곤 했다. 그런데 지하실에 오래 있어보니 공간이 주는 특수성 때문에 사람이 굉장히 멍해지더라. 정신이 또렷할 때도 있는데,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고 느려질 때가 있었다. 그런 경험이 근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근세는 더이상 지하실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그 점에 대해 스스로 많은 질문을 해보았다. 사람이 공간에 익숙해지는 순간 안주하는 게 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가서도 처음에는 빨리 제대하고 싶지만 고참이 되어 내무반 생활에 익숙해지면 직업군인으로 전향하는 분도 있지 않나. 그처럼 근세에게도 4년간의 지하생활로 인해 양가적 마음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주하고 싶은 마음과 탈출하고 싶은 마음.

-<기생충>을 보면 근세와 문광(이정은)의 전사가 궁금해진다. 근세에게 문광은 어떤 존재인가.

=문광은 근세에게 ‘전부’다. 나는 근세가 문광 한 사람을 보고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감독님도 “세 가족 중에 서로를 가장 사랑하는 가족은 문광-근세 부부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거 있잖나. 목숨처럼 아끼던 사람이 없어지면, 살아가야 할 의미조차 찾지 못하게 되는. 문광의 죽음 뒤의 근세의 행동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라 볼 수 있다.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한 캐릭터다.

=맞다. 서로 너무 애틋하다. 그래서 나는 문광이 연교(조여정)에게 해고당하고 어슴프레한 저녁에 쫓겨나면서 짐을 끌고 내려가는 장면이 정말 슬펐다.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은 잘 모르겠지만, 남편을 두고 집을 나서는 문광의 표정이 너무 찡하더라.

-문광과 근세가 박 사장(이선균) 집 거실에서 잔니 모란디의 <In Ginocchio Da Te>에 맞춰 춤추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이다.

=이 장면을 찍을 때 정말 멋있었다. 정은 누나가 춤을 굉장히 잘 춘다. 그런데 나는 좀 엇박자다. 엇박과 정박이 만났을 때의 묘한 분위기가 흐르더라. 감독님도 이 장면을 무척 좋아했다. 우리가 연기할 때 직접 앞에서 춤도 추시더라.

-이정은 배우와는 연극 <라이어>(2005)에서 함께 작업한 바 있다.

=정은 누나는 대단하다. 6개월간 매일같이 공연을 올리다보면 느슨해지는 날도 생기지 않나. 그럴 때마다 후배들이 안일해지지 않도록 토론의 주제를 만들어 공유하며 연기에 대해 진정성 있게 접근하는 선배였던 걸로 기억한다. 늘 배려심이 넘치던 누나의 마음은 14년 만에 만나도 한결같았다.

-근세가 마침내 지하실에서 1층으로 올라올 때, 양쪽 벽에 몸을 부딪히며 올라오는 제스처가 독특하면서도 무서웠다.

=특별히 의도했다기보다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가능한 액션이었다. 통로가 좁아 사람이 빠르게 이동하려면 양쪽 벽에 몸을 부딪히는 수밖에 없겠더라. 계단을 손으로 짚고 올라가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가팔라서 두발로 걸어가는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박 사장님, 리스펙!”은 <기생충>의 명대사가 되었다. 어떤 느낌으로 표현하려 했나.

=이선균 배우와 동갑이다. 전주에서 두달 넘게 함께 있으면서 선균이가 맛있는 걸 많이 사줬다. 그때부터 ‘리스펙’의 마음이 있었다. (웃음) 농담이고, 근세가 매일 박 사장의 포스터 앞에서 인사하는 인물이다보니 ‘리스펙’을 외칠 때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의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하다가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로로 간 이유는.

=오래전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연극영화과 입시에 낙방해 행정학과를 가게 됐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는데, 여전히 연기가 하고 싶더라. 배우가 되는 데 학벌이 중요하겠냐는 생각으로 바로 현장에 갔다. 공연 포스터를 붙이는 일부터 시작해 1999년 <클래스>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연극 무대에 올랐다. 독립영화 <산다>(2014)에 출연하기까지 쉬지 않고 연극, 뮤지컬을 해왔던 것 같다.

-대학로에서는 ‘멀티맨’으로 유명했는데.

=1인10역까지 해본 것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 노숙자, 왕, 게이, 여자…. 정말 안 해본 역할이 없다. 영화에서도 언젠가 코믹한 역할을 맡아보고 싶다. 이번에 <기생충>을 보고 “당신 때문에 악몽을 8번 꿨다”, “너무 무섭다”라는 댓글이 많더라. 나 무서운 사람 아니다. (웃음)

-박정범 감독(<산다>), 박석영 감독(<재꽃> <스틸 플라워>)의 작품에 출연하며 영화와 연을 맺었다.

=마흔살에 결혼했는데, 그때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함께 공연한 선후배들이 영화계로 진출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한번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박정범 감독이 공연을 보고 <산다>에 캐스팅해주셔서 영화를 시작하게 됐고, 여기까지 왔다. 박정범, 박석영 감독님 모두 현장에서 치열함을 잃지 않으며 인간에 대한 배려가 깊은 분들이라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배우로서의 신조나 원칙이 있다면.

=전형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싶다. <기생충>의 근세 역시 처음부터 기이한 인물로 접근했다면 뻔하게 그로테스크한 인물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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