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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이희준 - 직선적으로, 심플하게
이주현 2020-03-12

<남산의 부장들>의 곽상천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박통에 충성을 다했던 행동대장이며, 10·26 사태의 현장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진 대통령의 경호실장. <마약왕>에서 이두삼(송강호)의 마약 유통을 돕는 최진필로 우민호 감독과 손발을 맞췄던 이희준은 <남산의 부장들>에서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권력의 2인자 곽상천을 통해 특별한 변신을 보여준다. 지금껏 시도한 적 없는 체중 증량과 직설적 연기로 우악스러운 육식동물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이희준은 <남산의 부장들>에서 변신이 가장 기대되는 배우다.

-심장을 뛰게 만드는 시나리오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남산의 부장들>이 그랬다고.

=너무 심장이 뛰어서 시나리오 읽다가 물 마시며 목을 축였다.(웃음) 끈기와 집중력이 부족한 편이라 대본을 한번에 다 읽은 적이 별로 없는데 이건 한번에 다 읽었다. <미쓰백>도 그랬고.

-우민호 감독과는 <마약왕>을 함께했다. <마약왕> 끝나고 <남산의 부장들> 얘기가 자연스럽게 오갔나.

=<마약왕> 촬영 분량을 다 찍고 서울에 가려고 하는데 감독님이 하루 더 머물면서 맥주 한잔하자더라. 그때 <남산의 부장들>을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고 멋있는 역할이 있으니 같이하자고 제안해주셨다.

-경호실장 곽상천은 실존 인물 차지철을 모델로 한다. 차지철의 외형과 이미지를 생각하면 배우 이희준과 잘 매칭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민호 감독님께 정말 감사하다. <내부자들>에서 조우진 형님을 무시무시한 조상무 캐릭터에 캐스팅한 것도 그렇고, 배우를 보는 특별한 눈을 지닌 것 같다. 나 역시 이 역할을 제안해주신 게 의외였다. 나한테 왜 곽상천을? 이건 곽도원 형님이나 조진웅 형님처럼 선 굵은 배우들이 더 어울리지 않나? 난 클레버하고 스마트하고 섬세한 쪽인데. (웃음) 그래서 더 흥분됐다. 와, 이거 재밌겠다! 감독님한테 전화해서 “그러면 살을 찌우는 게 좋지 않을까요?” 했더니 “나는 희준씨의 연기가 좋으니까 그냥 연기로 표현하면 돼” 그러시더라. 그래도 살을 찌우면 병헌이 형, 도원이 형과 함께했을 때 시각적으로도 재밌는 앙상블이 될 거란 생각이 들어서 살을 찌우기로 했다.

-몇 킬로그램까지 찌웠나.

=100kg. 매일 밤 치킨과 맥주를 마셨다. (웃음)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하고도 민감한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물론 있었다. 내가 연기하는 인물에 대한 인상이나 편견을 내려놓고 다양한 각도에서 보려고 애썼다. 자료를 많이 찾아봤다. 정반대되는 평가와 자료를 보면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도 했다. 그런데 도저히 차지철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목소리를 정말 듣고 싶었는데.

-그렇게 연구한 경호실장 곽상천은 어떤 사람이었나.

=박 대통령을 아버지이자 신이자 국가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 믿음은 진짜였다. 공감하기 쉽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의 행동대장으로서 그가 경험한 일들을 하나씩 짚어가다보니 자신을 믿어준 사람을 충분히 아버지로 섬길 수 있었을 것 같더라. 그런 모습에 약간의 연민도 느꼈다.

-2인자 김규평(이병헌)과 곽상천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했나.

=곽상천은 김규평을 정말 답답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김규평이 가려는 길은 충정의 길이 아닌데 왜 저리 어리석을까, 비록 내가 후배지만 저 사람을 바로잡아주는 게 각하도 위하고 김규평도 위하는 일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남들이 볼 땐 하극상이고 아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곽상천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거다. 지금 계속해서 곽상천을 변호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절대 꼼수가 없는 사람이다. (웃음) 배우의 재미가 바로 이거다.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캐릭터를 알아가고 공감해가는 과정에서 배우로서 느끼는 재미가 크다.

-부마항쟁과 관련해 ‘탱크로 밀어붙이자’는 대사를 할 땐 마음이 괴롭지 않았나.

=부담됐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했을까, 뭘 믿고 있었을까, 그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인간 이희준은 그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으니까. 무서우면서도 짠했다. 그 사람의 믿음을 생각하니까.

-표정이나 대사 한마디로 공기를 바꾸는 디테일한 심리 연기도 많았을 것 같은데.

=특히 이병헌 선배의 연기의 70~80%가 그랬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 장면은 어떻게 연기하실까 궁금했고, 같이 연기하면서 마치 영화 관람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적도 있다. 그 연기를 다 내 것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웃음) 나는 아주 심플하게 연기했다. 곽상천은 복잡한 심리를 보여주는 캐릭터가 아니다. 지금까지 연기한 모든 캐릭터를 통틀어 가장 심플했다. 예를 들어 “밥 먹어”라는 대사가 있으면 “(고함치듯) 밥 먹어~!” 그것만 확실히 하면 된다. (웃음) 컷, 오케이 하는데도 처음엔 적응이 안되더라. 이렇게만 해도 되나 싶어서. 지금까지는 대사 한마디를 하더라도 행간이나 서브 텍스트까지 생각하며 말을 해야 하는 캐릭터가 많았는데, 이번엔 아주 직선적으로 심플하게 연기했다. 시원하고 재밌었다.

-곽상천 캐릭터를 연기하고 나서 생긴 후유증 같은 건 없나.

=후유증은 아니고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밤샘 촬영으로 녹초가 된 상태에서 KTX 첫차를 타고 급하게 서울에 가게됐다. 그런데 뒷자리 아저씨가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핸드폰 게임을 하더라. 원래의 나는 그런 상황에서 한마디도 못한다. 얘기할까 말까 백번 고민하다가 참고 만다. 그런데 너무 견딜 수가 없어서 “무음으로 하시죠”라고 한마디 했더니 그분이 긴장한 듯 “예, 죄송합니다” 하면서 바로 무음으로 설정하더라. 곽상천을 연기하느라 몸을 키운 상태라 내가 위협적으로 보였나보다. 살면서 누군가가 나를 무서워한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이미지도 강해서, 다들 친근하고 만만하게 생각하는데. 생소한 경험이었다.

-2020년엔 또 어떤 작품들로 만날 수 있나.

=영화 <오! 문희>에선 나문희 선생님의 아들로 출연하고, 박해수·수현 배우와 드라마 <키마이라>를 찍었고, 연극 <나와 할아버지>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리고 곧 영화 촬영차 해외에 간다. 워커홀릭이라 가만히 앉아서 쉬지 못하고 나를 몰아붙이는 편인데, 올해는 조금이나마 나의 행복을 우선시하면서 스스로를 편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게 새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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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곽기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