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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인터뷰 - 소설 속 인물들이 소속을 갖고 일하는 게 자연스럽다
이다혜 사진 백종헌 2020-03-12

-소설집 작품 수록 순서는 어떻게 정했나.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직장인의 내공을 신뢰하는 의미에서 10년차 편집자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결과적으로 그 순서에 너무너무 만족했다. 독자들도 마지막이 <탐페레 공항>인 게 마음에 든다고 해주시고, <잘 살겠습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이어지는 첫 순서는 나 역시 똑같이 생각했다.

-이 시대의 ‘일’과 관련된 문제는 ‘시류에 빨리 올라타기’와 ‘멀리 내다보기’라는,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가다.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를 선택하면서 ‘당장’과 ‘멀리’ 사이에서 고민이 있었을 텐데.

=나는 ‘당장’만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먼 미래는 생각을 잘 안 한다. 면접이나 면담에서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 “10년 뒤에 이 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 것 같나”였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면서는 당장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컸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데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쪽은 아닌 셈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재취업했다. 첫 퇴직은 어땠나.

=그때는 정확한 마음의 결정이 있었다. 입사 6, 7년차였다. 업계에서 내가 잘 팔릴 때라고 판단했다. 사람 뽑아서 바로 쓰기 좋으니까 6, 7년차는 자리가 많다. 실제로 취업이 바로 됐다. 회사를 다니면서 사이버대학교에서 석사 1년을 온라인으로만 했다. 동시에 편입준비를 해서 편입이 된 뒤 회사를 그만두고 석사를 마치며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내가 그린 가장 큰 그림 중 하나다.

-회사원과 소설가의 가장 큰 차이는 뭔가.

=나는 회사를 다니며 일과 자아를 분리하는 작업을 쭉 해왔고 익숙해졌다. 그런데 소설을 쓰다보니 일과 내가 너무 가까워지더라. 작품에 대한 평가가 나에 대한 평가처럼 느껴지지 않아야 하는데.

-<일의 기쁨과 슬픔>이 처음 온라인에 공개되었을 때 조회수가 40만을 넘겼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읽고 뭐라고 했나.

= 특히 기억나는 것은, 같이 일한 적 있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iOS 개발자가 보낸 장문의 카톡이다. 케빈이 본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고.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며, “제이스, 행복한 개발자가 될게요”라고 썼더라. 지금 생각해도 눈물 난다. 그때 문학 뽕이 차올랐다. (웃음) 이게 소설의 힘인가, 하고. 내가 오랫동안 회사에 소속되어 일했으니까, 소설 속 인물들이 어디에 소속되어 일하는 게 자연스럽다. 일이 소설 전개에 중요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소설 5편 모두 직업이 있고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단편들 끝에 도돌이표를 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은 다음날, 다음 회사, 다음 집에서 비슷한 일을 겪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경험이 녹아 있는 대목도 있을 텐데.

=내가 되게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에서 주인공이 차창에 어제 스케일링한 이를 “이~” 하고 비춰보는 장면. <탐페레 공항>에도 넣었다 마지막에 뺐다. 입사 동기들과 같이 입사 전 건강검진을 받았던 때의 경험이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 마지막에 주인공이 티케팅하려고 퇴근하지 않는 대목은, 내가 페퍼톤스 콘서트표 예매를 하려고 남아 있는데 왜 안 가냐고 회사 사람이 물어봤던 경험대로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를 지유가 아닌 지훈 입장에서 쓴 이유가 있나.

= 후쿠오카에 여행 갔는데 오호리공원이 너무 좋았다. 여기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여기 사는 한국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누구를 초대할까, 결혼했을까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자는 처음부터 남자로 생각했다. ‘신뢰 할 수 없는 화자’를 주인공으로 써봐야지 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무리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단편집을 읽다 생각한 게 있다. 남자주인공들이 객관적으로 어떤 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고 갑자기 여자들하고 자는 거다. 자기 자신에게 심취해 있는 남자주인공이 재미있었다. 최소한 지훈은 외모가 출중하게 설정은 했다. (웃음)

-<새벽의 방문자들>은 아무것도 팔지 않는 사적인 공간에서 성을 사려고 온 남자들을 마주치는 여자의 이야기다. 혼자 사는 여성들의 직접적인 공포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내 남자는 아니겠지’ 하는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는 순간까지 경험하게 한다. 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 제일 많이 고친 게 이 이야기였다. 시작은 단순했다. 원룸으로 이사 갔을 때, 이사가 정말 빨리 끝나더라. 그 공간에 대해 쓰고 싶은 게 첫째였다. 여자 혼자 사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그 공간에 대한 공포를 말하지 않고는 쓸 수가 없더라. 모르는 남자가 현관문의 외시경으로 마주 들여다보는 대목은 실제로 내가 겪은 일이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이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네? 너무 안심이 되어서 따로 신고도 안 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성매매하러 온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사건은 또 있었다. 살던 집 앞길이 나뉘면서 한쪽은 오피스텔, 다른 한쪽은 주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느 날 누가 길에서 아는 척을 했다. 누구시냐고 하니까 여기 일하시는 분 아니냐는 거다. 아니라고 하고 집에 왔는데, ‘미안하다면 끝인가? 저 사람은 여자를 돈 주고 사는 사람인데…’ 싶어졌다. 나는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다른 세계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어느 시점에는 나도 돈 주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겠다 싶었다. 그런 모든 생각이 결합되어 이 이야기를 구상하게 되었다.

-결정을 내릴 때 기쁨과 슬픔 중에 어느 쪽을 더 중요시하나.

= 나는 감정 기복이 큰 편이다. 금방 기뻐했다가 금방 크게 실망한다. 거기서 오는 진폭, 낙차 같은 에너지로 삶이 굴러가는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결정할 때는 정신승리를 한달까. 내 생각은 내가 제일 많이 하니까, 나라도 잘된다고 생각해야지 하는 식으로 낙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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