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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선언> 후속 취재] 낭희섭 독립영화협의회 대표, <본명선언>의 <흔들리는 마음> 도용 논란이 벌어졌던 1998년을 회고하다

지금이라도 명확히 밝혀야 합니다

22년 만에 양영희 감독과 신뢰를 보내주었던 지인들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저는 얼마 전 SNS에서 홍형숙 감독의 다큐멘터리 <본명선언>에 참여했던 공미연 감독이 양영희 감독에게 보내는 사과문을 접했습니다. 그 글을 보고, 사실 확인도 없이 부정과 타협으로 침묵하고 동조했던 저 자신을 되돌아보고 거듭나기 위해 반성하면서 22년 만에 양영희 감독에게 사죄드리고자 이 글을 씁니다.

한참 지난 사실을 기억하는 것, 진실 여부를 검증하는 건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과거의 저는 <본명선언>과 <흔들리는 마음> 표절 논란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당사자는 아니었으나, 제3자로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이해관계에 의해 한쪽 편에서 진실 여부를 외면하고 객관적 입장에서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 우를 범했습니다. 또 저는 진실을 마주할 몇번의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진실이 아닌 거짓의 공범자라는 드라마의 조연 혹은 엑스트라로 남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참회하는 마음으로 저는 1998년 당시 겪었던 일을 회고하려 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홍형숙 감독이 <본명선언>으로 운파상을 수상한 지 2주도 지나지 않아 영화는 표절 시비 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독립영화협의회를 이끌고 있었던 저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진위 여부를 떠나 독립영화가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시점에 설마 표절 같은 문제가 실제로 일어났을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문제를 제기한 양영희 감독과는 일면식도 없었고, 표절한 부분이 무엇인지 비교할 수도 없었기에, 저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한편 표절이 아니라는 입장들로 문제가 정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양영희 감독은 문제 제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부산국제영화제 관계자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지독한 독감을 앓고 있던 저는 막연하게 만남의 이유가 <본명선언>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짐작하며 아픈 몸을 이끌고 찬바람이 부는 추운 밤 종로 정독도서관 앞에 있는 허름한 호프집의 텅 빈 2층에서 부산국제영화제 관계자 2명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은 1시간 전에 독립영화하는 김OO 선배와 먼저 1층에서 만나고 저를 이어서 보는 거라 말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본명선언>의 표절 시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취지로 30여분간 얘기했습니다. 저는 중립의 입장에서 지켜보겠다고 말하고 빨리 쉬고 싶은 마음으로 헤어졌습니다. 그로부터 1주일 뒤, 저는 한 영화 저널에 <본명선언>의 표절 시비에 있어 진위 여부가 밝혀지기까지 영화인들이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객관적으로 이 사안을 지켜보자는 취지의 글을 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의 입장은 애매모호하게 정리되었고, <본명선언> 표절 논란은 무엇이 진실인지 밝혀진 것도 없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됩니다.

다음해 봄, 저는 미국 뉴욕으로부터 발송된 우편물을 받았습니다. 뜯어보았더니 VHS비디오테이프와 서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본명선언> 표절 시비에 대해 테이프의 영상을 보고 판단한 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줬으면 한다는 취지의 글을 보았습니다. 순간 저는 망연자실함을 느꼈습니다. 양영희 감독 본인이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건 아직 논란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였고, 또 설사 <본명선언>이 <흔들리는 마음>을 표절한 것이 맞다 하더라도 이 문제를 한국 독립영화판에서 거론하는 건 소수의 입장으로 비치거나 금기시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흔들리는 마음>을 보고 진위 여부를 확인할 생각을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테이프를 봉인하듯 어디에 처박아놓았습니다. 비겁하게도 진실을 마주하지 않고 회피한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본명선언>에 관한 기억을 하나둘 지웠습니다. 하지만 영화와 관련된 표절 논란을 22년 만에 양영희 감독이 재론했고, <본명선언>에 스탭으로 참여한 공미연 감독은 책임이 있다는 것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사과를 했습니다.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음에도 논란의 중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면하고 기회주의자처럼 처신한 저에게 지금까지 신뢰와 지지를 보내준 지인들 앞에 늦었지만 사죄를 드립니다.

다음 세대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며칠 밤을 고민하고 기억을 소환하여 마음의 짐을 내려놓듯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비롯된 생각을 글로 옮겼습니다. 저는 사죄의 말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이제부터라도 진위 여부에 대해 더이상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외면과 침묵에 타협하지 않고 소수의 정당함과 연대하기 위하여 진실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독립영화판에서 세월호 참사와 블랙리스트의 진실을 거론하는 것은 허위의식과 자기기만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독립영화의 존재의미조차도 없으니까요.

여기서 저는 진영논리로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저 역시 집단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22년 전에 바로잡을 수 있었을 문제를 묵시적 방관에 의해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두게 한 공범 중 한명이니까요. 저는 또한 이 문제로 누군가 반사이익을 얻어가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본명선언>이 정말로 <흔들리는 마음>을 표절했는지 혹은 도용했는지 지금에서라도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문제가 설령 한국 독립영화에 있어 흑역사로 남을지라도 독립영화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음지에서 자긍심 하나로 묵묵히 역할을 수행하다가 병마로 쓰러진 고인들과 열악한 상황에도 이 길에 입문하는 다음 세대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2월 7일에 극장도 아닌, 이름도 의미심장한 서울기록원이라는 곳에서 22년 만에 홍형숙 감독의 <본명선언>과 표절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인 양영희 감독의 <흔들리는 마음> 비교 상영회를 연다고 합니다. 이제 독립영화의 거듭남을 위해 되돌아보고 진실에 대해 기록할 시간만 남은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독립영화를 지켜야 하는가”를 자문하면서 그동안 힘들었고 앞으로 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독립영화는 계속 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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