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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도서관에는 모비 딕이 있으니까
강화길(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EEWHA(일러스트레이터) 2020-06-15

영화 <마틸다>

도서관에 간 지 오래되었다. 최근 부분적으로 ‘봉쇄’ 가 풀리긴 했지만, 도서관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아쉬운 상황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인지라, 답답한 기분이 들 때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하나둘 떠올리곤 한다. 그러니까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대부분 내 주변 사람들이지만, 그중에는 우연히 만난 사람도 있고, 먼 친척도 있고, 학창 시절 잠시 어울렸던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이들의 얼굴을 드문드문 떠올리며, 그들은 과연 잘 지내고 있는지, 이 시국에 답답하지는 않을지 궁금해했다. 그러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마틸다>를 떠올렸다. 마치 소꿉친구를 기억해내듯. 나는 어린 시절 이 영화를 딱 한번 봤다. 비디오가 있던 시절이었다. 집을 혼자 볼 나이는 되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내게 <마틸다> 비디오를 건네며, 잠시 어딜 다녀올 테니 이걸 보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 그대로 영화와 나만 남았다. 그리고 이후 나는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흔치 않다는 걸 꽤 나중에야 알았다. 기억이 된 장면들 중 일부, 나는 마틸다가 혼자 알아서 뭐든 척척 해내는 모습을 정말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한심한 부모와 오빠를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보는 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신이 난다. 그리고 조금 서글프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그 부분을 좋아하는 이유는, 알아서 밥을 먹고 옷을 갖춰 입은 마틸다가 향하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나는 12살 때 처음으로 도서관에 갔다. 그때까지 학교 도서관밖에 가본 적이 없었던 내게 그곳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매우 ‘굉장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가까웠던 도서관은 매우 높은, 그것도 경사가 상당한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올라가고 나면, 특히 한여름이면,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열람실 한가운데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늘 기대했다. 도서관은 언제나 조금 어두웠고, 묵은 책 냄새로 가득했으며 무엇보다 조용했다. 나는 도서관에 올 때마다 다른 세상으로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일종의 평화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마틸다 역시 그런 것 같았다.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책을 한권씩 읽어나가는 그 아이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 같다.

오히려 마틸다가 쓸쓸해 보이는 순간은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이다. 그들은 마틸다의 끼니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고, 말도 들어주지 않으며, 학교도 보내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들은 마틸다가 책을 읽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아빠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마틸다의 눈앞에서 찢어버린다. 그리고 트렌치불이라는 끔찍한 인간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 입학시킨다. 그녀는 아이들을 공처럼 집어던지고, 억지로 초콜릿케이크를 먹이고, 관처럼 좁고 어두운 방에 가둔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귀찮은 존재로 여긴다. 그렇다. 이 영화는 아동학대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는 것, 아이라는 이유로 그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전혀 관심 갖지 않는 것. 영화는 그런 식으로 아이를 외롭게 두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에 대해 유머러스하지만 날카롭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영화를 처음 봤던 어린 시절, 내가 그걸 전혀 몰랐을까? 그저 똑똑하고 귀여운 여자아이가 못된 어른들을 혼내주는 그런 이야기로만 봤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틸다가 책을 읽으며 “혼자라는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는 대목을 그렇게 오래 기억했을 리 없다. 그리고 그건 내가 특별히 조숙한 탓에 쉽게 남몰래 눈치챌 수 있었던 내용도 아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런 애가 전혀 아니었다.) 마틸다가 부모님과 교장 선생님, 집에 찾아온 경찰들에게까지 듣는 이야기는, 나를 포함한 모든 아이들이 매일매일 모든 어른들에게 듣던, 흔해빠진 소리였다. 말을 왜 이렇게 안 듣냐고, 피곤하게 굴지 말라고, 말대꾸도 하지 말라고, 분수에 맞게 살라고, 헛짓거리는 하는 게 아니라고. 분명 나보다 똑똑하고, 심지어 초능력도 있지만 그런 말 앞에 무기력하게 서 있는 소녀를 보며, 저 애가 나와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마틸다처럼 험악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사랑과 다정함이 늘 곁에 있었다. 하지만 나 자신으로 살려는 마음이 옳지 않다고 배웠고, 쉽게 순응하는 것이 더 예의바른 것이라고 배웠던 것도 사실이다. 성장의 순간마다 통제는 늘 사랑과 같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고, 나는 늘 죄책감을 가졌다. 그 때문에 나는 마틸다를, 이 영화를 그토록 사랑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와 비슷한 이 아이는 결국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니까.

그런데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때와는 조금 다른 걸 느꼈다. 내용은 기억 그대로였다. 자신의 초능력을 발견한 마틸다는 못된 어른들을 마음껏 혼내준다. 한심한 가족들에게서 벗어난다. 친구들의 응원과 환호를 받고, 새로운 가족을 찾는다. 나는 그 전개가 여전히 좋았고, 아주 좋았고, 이 영화를 다시 봐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달라진 점은 이것이다. 나는 마틸다의 새로운 가족, 허니 선생님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마틸다보다 더 끔찍한 유년기를 보냈고,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을 구하지 못했던 사람. 어느 순간부터 나는 허니 선생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보고 있었다. 마틸다가 구해낸 건 자기 자신뿐이 아니었다. 그녀만이 새로운 가족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다. 허니 선생님 역시 구원받았고, 꿈꾸던 가족을 만났다. 그 장면들은 마치, 허니 선생님의 어린 시절이 되돌아와 이제는 괜찮다고, 그래도 너는 잘 자랐다고, 너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유년 시절을 향해, 허니 선생님 본인이 마틸다에게 말했듯,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달라질 거야.” 그러니 다 괜찮을 거야. 때문에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서로를 구해낸 두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끝나는 그 순간을 말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책을 읽는다. 그 책은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고, 이제 누구도 그 책을 찢을 수 없다. 나도 그 책을 읽고 싶다. 도서관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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