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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 수상자 김철홍 이론비평 - 문이 묻는다
김철홍(평론가) 2020-07-23

영화가 지연(遲延)함으로써 지키려는 것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이라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아이리시맨>에는 그렇지만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유의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눈에 띄는 것은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니로)의 내레이션 시점을 기준으로 이미 다 세상을 떠나버린 인물들의 정확한 사망 연도이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언제 보았는지에 따라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공간일 테지만, 이때 등장하는 자막에서만큼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숫자엔 해석의 여지가 없다. 영화의 말미엔 이제 곧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낀 프랭크가 직접 자신의 납골당 자리를 준비하는 모습이 나온다. 프랭크가 위치를 고르자 관리인이 ‘1948’이라는 숫자를 말하는 이 장면은, 죽는다는 것은 곧 사람이 숫자가 되는 것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게 영화는 프랭크도 머지않아 숫자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때 문제의 문이 등장한다.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이 죽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프랭크뿐이다. 그와 면담을 하던 신부는 다음을 기약하며 프랭크를 떠나려고 한다. 신부가 이제 곧 크리스마스라고 하자, 프랭크는 자기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 프랭크가 문을 발견한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프랭크의 표정이 분명 변한다. 이 문이 닫히면 앞으로 영영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프랭크는 신부에게 문을 다 닫지 말고 조금 열어두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영화는 그대로 끝이 난다. 그 순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프랭크의 모습이다.

여기서 이 문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은 문을 삶과 죽음의 경계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프랭크가 이때 열어둔 문은 생사의 경계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원간의 통로를 하나 열어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현실과 영화이다. 왜냐하면 이 닫지 않은 어떤 가능성을 통해, 실존 인물 프랭크 시런이 결국 한 변호사(찰스 브랜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게 된 것이고, 그것이 이 영화의 원작 의 토대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살려둔 불씨가 현실에 영향을 주고, 그 현실이 다시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결말. 그 시작과 끝에, 문이 있다.

영화에서 문이 무언가 특별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로서 사용되는 것이 흔치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별하다고 인식하지 않은 경우에도, 문은 항상 그 문을 마주친 인물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문을 열 것이냐, 열지 않을 것이냐. 그런데 사실은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문은 원래부터 닫혀 있는 존재인 것인가. 만약 열려 있는 문이 있다면, 그것은 문이 아닌 것인가. 그리고 질문들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문은 공간을 구분 짓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연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문은 쉽게 열려야 문일까. 아니면 굳건히 잠겨 있는 것이야말로 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은 중요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매트릭스2: 리로디드>). 아니면 언젠가 열림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탈출구인가(<트루먼 쇼>). 그렇다면 벽 없이 홀로 서 있는 문은 과연 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계속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여기 <아이리시맨>의 문 앞에 이르렀다. 아니 이 문 앞에 서자 비로소 지금까지 놓쳤던 질문들이 떠오른 것일 수도 있겠다. 여기 근래에 공개된 몇편의 영화가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하 <할리우드>), <포드 v 페라리>(이하 <포드>), 그리고 <언컷 젬스>. <아이리시맨>을 포함한 네편 모두 미국 감독의 연출작이며, 전부 실화와 연결고리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모든 영화엔 이 영화가 실화에 근거한 영화라는 자막이 나오지 않으며, 대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정확한 시점을 드러내는 숫자들이다. 그리고 문이 나온다. 어떤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문이 영화에 있고, 그 질문을 받은 인물은 전부 프랭크처럼 죽음과 가까운 상태에 있다. 그때 그곳에 문이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 영화들이 모두 실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문은 왜 이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일까.

<할리우드>의 문 너머의 인물들은 모두 죽은 인물들이다

모든 소동이 끝난 뒤, 집 앞마당에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서 있다. 카메라는 그의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가 누워 있는 앰뷸런스가 떠나갈 때부터 릭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다음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의 초대를 받은 릭이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리고 여기에 문이 있다. 이 결말은 언뜻 해피엔딩처럼 보인다. 살아남은 인물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 있는 결말. 그런데 이 장면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인 느낌, 그러니까 이들이 사실은 모두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이 엔딩 신의 시작에 있는 점프컷 때문이다. 릭의 뒷모습을 조금 멀리서 담고 있던 카메라가(니숏) 순간 위치를 바꾸어 릭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웨이트숏) 숏의 연결. 이때 릭의 등에서 등으로 중간 과정 없이 바로 숏이 이어지는 순간 부자연스러운 단절이 발생한다. 그러자 바로 다음 순간 이를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어느새 나타난 제이 세브링이 릭을 부른다. 제이는 언제부터 릭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또한 이때 단절이 있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프컷엔 말 그대로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점프가 담겨 있는 것만 같다.

<할리우드>엔 두 종류의 캐릭터가 있다. 첫째는 정말로 실화에 존재했던 실존 인물 캐릭터이고, 둘째는 릭과 클리프 등을 위시한 가상의 캐릭터들이다. 첫째를 폴란스키 그룹이라 하고 둘째를 릭 그룹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할리우드>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두 그룹을 서로 만나지 않게 한다. 물리적인 만남뿐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두 그룹은 자막으로 정확히 명시된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하나의 영화 속 공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한번쯤 서사적으로 엮일 법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할리우드>는 타란티노의 전작들에서 흔히 사용되는 챕터의 구분이 없는데도, 마치 그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두 그룹이 한숏에 담기는 장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초반부,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릭과 클리프 옆으로 폴란스키가 차를 몰고 등장한다. 이때 릭은 당시에 이미 <악마의 씨>의 감독으로 유명한 폴란스키를 단번에 알아보지만, 폴란스키는 릭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이 신은 엔딩 신을 제외하곤 두 그룹이 한 장소에 존재하는 유일한 신인데, 어떤 측면에서 두 그룹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바로 릭 그룹은 폴란스키 그룹을 보지만, 폴란스키 그룹은 릭 그룹을 보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가상인물은 실존 인물을 볼 수 있지만 그 반대는 그렇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보지만 못하는 것일까. 영화 내내 챕터로 나눠진 듯 마주치기는커녕 서로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는 두 그룹. 그리고 마침내 엔딩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꼭 필요하다는 듯 등장하는 하나의 점프. 혹시 그들이 만날 수 없었던 것은 둘이 애초에 다른 세계에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폴란스키의 세계엔 릭과 클리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 질문은 이상하다. 당연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인 ‘폴란스키의 세계’엔 릭과 클리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릭이 제이의 부름을 받기 바로 전 필연적으로 들어가 있는 점프컷은,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지금껏 당연하지 않게 느끼고 있던 관객을 위한 타란티노의 챕터 나눔과도 같다. 이 나눔의 순간에 있는 것이 문이다. 릭의 집과 달리 폴란스키의 집에는 하나의 관문 같은 문이 있다. 릭은 제이와 대화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샤론의 초대를 받는데, 곧이어 문이 열리고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러운 음악이 깔린다. 집주인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채 그 집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이 엔딩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또 다른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반대로 뒤집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위대한 개츠비>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여기선 방문자가 끝내 주인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할리우드>가 그러한 결말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집주인은 ‘여기’에 있고, 릭은 ‘여기’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69년 8월 9일 토요일에 릭이 마침내 그 문을 지나 영화의 경계를 넘어버렸을 때 그래서 현실의 그 시간에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을 만날 때 릭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한번 더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카메라의 마지막 움직임이다. 릭이 그곳으로 걸어 들어갈 때, 카메라는 릭을 따라서 문을 통과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대신 외벽을 타고 올라가 벽 너머의 자리에서 그들이 마침내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지켜본다. <할리우드>는 철저히 현실의 자리에서 영화를 바라본다. 절대로 폴란스키의 세계와 릭의 세계를 함부로 넘나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곳엔 반드시 문이 있어야 했다. <할리우드>가 끝내 슬플 수밖에 없는 것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타란티노가 이번 영화에선 결국 영화의 한계를 인정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포드>의 문은 죽음을 경고한다.

<포드 v 페라리>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포드>에도 현실과 달리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고 있는 순간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영화 후반부, 마지막 레이스의 우승자가 결정되는 장소에 실은 엔조 페라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정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엔조 페라리뿐이었을까.

켄 마일스(크리스천 베일)는 억울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규칙에 의해 우승을 빼앗긴다. 모두가 켄이 아닌 우승자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는 상황에서, 켄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엔조 페라리를 발견한다. 영화 내내 완벽한 연기를 보여줬던 크리스천 베일이, 여기서 엔조 페라리를 우연히 발견한 척하는 이 연기만큼은 부자연스러웠다고 한다면, 그건 지나친 주관적 감상일까. 그런데 만약 통칭 ‘실화 영화’에서의 완벽한 연기가 실존 인물과 최대한 같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이때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를 진짜 같다고 느끼지 못한 것은 주관적인 감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1966년 르망24시의 현장엔 엔조 페라리가 없었으므로, 여기에 ‘엔조를 바라보는 켄’ 또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재했던 것을 실재했던 것처럼 하는 과정에서, 연기가 부자연스럽게 보인 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봄으로써 켄 역시 잠깐 동안 그러한 존재가 되는 이 장면은, 그가 죽음과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강력히 암시한다. 그로 인해 이 순간도 <할리우드>의 엔딩처럼 비극의 기운이 서려 있다. 이 결말은 멋진 승부를 펼친 켄에게 경쟁자가 존중을 표시했다는 점, 또는 아쉽긴 해도 켄의 진가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점에서 해피엔딩에 가까운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해피’해 보이지만 실은 ‘해피’하지 않은 상태. 속도를 낮추어 자신의 소신을 죽여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Happy”라고 노래하는 켄의 모습은 그러한 자신의 미래를 이미 예견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에 앞서 켄의 죽음을 예고한 장치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문이다. 경주의 시작을 알리는 깃발이 펄럭이고, 켄이 차를 향해 달린다. 그 뒤로 수많은 경쟁자들이 각자의 차로 달리고 있고, 켄을 포함한 모두가 거의 같은 타이밍에 차에 탑승한다. 그런데 켄의 차문이 닫히지 않는다. 당연히 닫혀야 할 문이 닫히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사실은 이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낼 때, 불길함이 감지된다. 죽어야 할 것(the dead)이 죽으려하지 않는(don’t die) 세계를 그리고 있는 영화 <데드 돈 다이>에서 끊임없이 ‘끝이 좋지 않을 것’이 예고되는 것처럼. 그래서 닫히지 않는 문이 등장하고 그걸 켄이 계속해서 닫으려 하지만 문이 끝끝내 그걸 거부할 때, 이 이야기의 끝 또한 좋지 않을 것이 예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은 왜 닫히지 않으려고 했을까. 문은 켄이 경주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일까. 그래서 이 경기를 끝낸 켄이 예정된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던 것일까. 사실 <포드>에서의 문의 오작동, 즉 닫혀야 할 문이 닫히지 않거나, 열려야 할 문이 열리지 않음을 통해 켄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순간은 이때뿐만이 아니다. 켄과 캐롤 셸비(맷 데이먼)가 영화에서 첫 대화를 나눌 때, 이곳에 닫히지 않는 트렁크가 있다(닫혀야 하지만 닫히지 않는다). 문은 이때 켄이 실격을 당해 경주에 나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다음 문은 켄의 차고에 있다. 문은 아직 경주에 미련이 남은 켄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 잠겨 있다(열려야 하지만 열리지 않는다). 그로 인해 켄은 아내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문의 오작동이 즉각적으로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은 인물간의 대화에서 그것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이는 켄의 아들 피터의 질문에서부터 비롯된다. 켄이 주행 테스트 중 사고를 당한 날, 피터는 켄의 동료 기술자에게 사고를 당했을 때의 생존 조건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그는 차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차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살 수 있다고 답한다. 다시 말해 결정적인 순간에 열려야 할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켄은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이 할 수 있는 것은 경고를 통해 결말을 딜레이하는 것뿐, 결말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켄의 마지막 순간이 담긴 시퀀스에선 감독 역시 그 한계를 인정하고 있는 것 같은 선택들이 확인된다. 제임스 맨골드의 선택은 켄의 죽음의 순간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최후의 순간에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만큼은 상상해선 안된다는 것처럼, 영화는 차 안의 소리를 낮추고, 대신 캐롤의 내레이션을 되풀이해서 들려준다. 그러나 이 시퀀스에서 설명되지 않는 가장 핵심 정보는 켄의 정확한 사인이다. 영화에 주어진 단서에 따라 추측을 해보면, 켄의 죽음은 차의 문에서부터 빠져나오지 못함으로 인한 질식사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현실과 다른 마지막 지점은, 현실의 켄은 사고 당시 차에서부터 튕겨져나가 즉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문은 정상 작동한 것일까, 오작동한 것일까. 혹시 켄이 탄 마지막 차의 문 또한 잘 닫히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켄뿐이다. 그것만큼은 영화가 꾸며낼 수 없다고 생각한 감독은 그래서 영화에 켄이 문을 닫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켄이 차에 타는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켄이 막 문을 닫으려는 찰나에 고개를 돌려 켄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비춘다. 그것을 보지 않는 행위는 포기 혹은 체념과 다름없다.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에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는 결론. <포드>는 문의 반복과 생략을 통해 그것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실화와 영화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측면에서 <할리우드>와 <포드>는 결국 같은 영화이다. 차이가 있다면 엔딩에서 그 한계를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다. <할리우드>의 카메라는 문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것을 표현했고, <포드>는 마지막에 문을 외면한다. 다만 <할리우드>엔 조금 더 그때 그 시절을 바꾸고 싶었다는 의지가 느껴지는데, 그런 점에서 <할리우드>는 타임슬립 영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영화는 결국 역사에 기록된 비극적인 사건의 결과를 바꾸고 싶은 감독이, 1969년으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를 보낸 (그리고 실패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포드>에 상대적으로 그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의지를 가진 존재가 사람이 아닌 문이었던 것이 원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단 맨골드가 이 실화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가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감독이 한 사건을 해피엔딩으로 보았는가 새드엔딩으로 보았는가가 ‘실화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다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두 영화에서 차이가 느껴지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타란티노는 사건을 새드엔딩으로 본 반면, 맨골드는 사건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은 것이다.

맨골드가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그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두 존재의 태도 차이 때문이다. 이는 엔조는 켄의 레이스에 존경을 표하지만, 문은 켄의 레이스를 막는다는 것이다. 한쪽은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오른 켄을 얘기하고, 한쪽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켄을 얘기한다. 이 대조적인 감정은 엔딩 시퀀스까지 이어진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눈을 선글라스로 가린 채 길을 떠나는 캐롤 위로, 켄이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는 자막이 떠오른다. 맨골드는 끝까지 어느 것이 더 좋은 결과인지에 대해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판단해도 되는가

<언컷 젬스>

그러나 과연 어느 누가 현실을 판단할 수 있을까. ‘켄 마일스의 죽음’은 해피엔딩인가, 새드엔딩인가. 그런데 사실은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은 정말 엔딩인가. 그럼 죽음으로써 시작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은 다 무엇인가. 어디서부터가 시작이고 끝인지조차 규정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이 가능은 한 것일까. 그렇다면 영화는 영화니까 그래도 되는 것인가.

<언컷 젬스>에는 현실을 멋대로 판단한 죄로 죽게 되는 한 인물이 나온다. 그런 그는 말 그대로 도박꾼이다. 이 영화는 앞서 언급한 두 영화처럼 실화와 연결은 되어 있지만, 그것이 서사의 메인 줄거리를 이루지 않다는 점에서 다르다. 무엇보다 <할리우드>와 <포드>는 실화에 영향을 받은 감독이 그것을 재료로 새로운 가상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 확실한 반면, <언컷 젬스>는 그것이 불분명하다. 영화의 이야기를 만들어놓은 다음 실존 인물인 케빈 가넷(KG)의 실제 경기에 얽힌 이야기를 덮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경기 영상에 영화의 서사를 맞춘 것인지 확인하기 힘들다. 물론 감독의 말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순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그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 영화엔 2012년 5월 26일에 벌어진 셀틱스와 세븐티식서스(76ers)의 경기에 대한 사프디 형제의 판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에 벌어진 수많은 경기 중 한 경기를 ‘채굴’했을 뿐 그 결과를 바꾸려거나 혹은 이 경기가 기억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현실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 하워드 래트너(애덤 샌들러)는 그것을 가지고 도박을 하기까지 한다. 채권자 무리가 자신의 가게에 찾아왔을 때, 하워드의 선택은 눈앞의 KG에게 자신의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그는 마치 KG의 경기 결과를 완벽히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한다. 그리고 이 경기가 자신에게 떼돈을 벌게 해줄 해피엔딩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곳엔 문이 있다. 다시 한번 오작동되는 문이 있다. 문이 오작동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채권자들이 첫 번째 문을 통과했을 때 문 위에 올려두었던 도구가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채권자들이 가게에 남지 않았더라면, 하워드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문은 너무 쉽게 현실을 한 가지 의미로 규정해버린 하워드에게 심판을 내린다. 하워드가 현실에 존재하는 무궁무진한 해석의 가능성을 죽여버렸으니, 그 자신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야말로, 현실에 대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사프디 형제의 대답이다.

그 죽음을 사프디 형제는 영화의 마지막에 유심히 쳐다본다. 그러나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하워드의 얼굴이 아니다. 감히 현실을 재단하다 죽은 그의 얼굴엔 해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더이상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하워드의 얼굴에 생긴 작은 틈이다. 이 구멍은 죽어버린 영화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문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그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곳엔 수많은 가공되지 않은 보석들이 있다. 이 ‘언컷 젬스’의 바다에서, 사프디 형제는 지금 다음 영화의 재료가 될 원석을 찾고 있는 것만 같다. 카메라는 그곳을 유영한다.

프랭크가 지연하며 지키려 하는 것

화면이 다시 밝아지면, 카메라는 여전히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다. 이곳은 미국의 한 요양병원. 영화 <아이리시맨>이 시작되고, 카메라는 저마다 숨겨진 원석 같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을 사람들을 지나 프랭크에게 도착한다. 그리고 또 모두가 죽는다. 문에 들어간 릭도, 문을 닫는 켄도, 문을 연 하워드도 전부 죽은 뒤, 살아 있는 것은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문틈 사이에서 가냘픈 숨을 쉬고 있는 프랭크뿐이다. “모두 죽었습니다, 프랭크씨. 다 죽었다고요. (중략) 도대체 누구를 보호하는 건가요?” 프랭크가 이곳에 남아 문을 열지도 닫지도 않음으로써 지키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실화 영화’란 결국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 두 가지를 맨 앞과 맨 뒤에 놓고, 끊임없이 양쪽 끝을 늘린 것의 결과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아이리시맨>의 타이틀 시퀀스는 실화를 최대한 늘려보겠다는 감독의 의지 표명이다. 스코시즈는 ‘I Heard’와 ‘You’ 그리고 ‘Paint Houses’ 사이에 아무 의미 없는 도로 위의 하얀 선들을 끼워넣어, 하나의 문장이 완성되어 의미를 생성하는 것을 지연시킨다. 그러나 아무리 늘리고 지연시키며 실제 있었던 일에 대한 판단을 불가능하게 하려 해도, 두 사건의 배치로 인해 생기는 인과관계의 끈을 완전히 끊어낼 수는 없다. 그렇게 그곳에 또 하나의 판단이 탄생한다. 그 한계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역할은 계속해서 그곳에 있는 판단을 덜어냄으로써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다. 아니 애초에 모든 판단을 100%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 한계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 한계를 알고 있는 네편의 영화엔, 그래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자막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프랭크 또한 그 한계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그곳에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모든 진실(실화)을 알고 있는 그가 그곳에서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끝까지 자신은 아무 데도 아닌 바로 여기, 에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가 문을 열지도 닫지도 않은 것은 현실이 판단되는 것에 대한 걱정과, 하지만 그것이 영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 아닐까. 프랭크는 현실과 영화, 그 둘 모두를 지킬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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