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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기자의 2020년 토론토국제영화제 온라인 참관기②
김혜리 2020-10-27

그래도 스토리텔링은 계속된다

본 기사는 <김혜리 기자의 2020년 토론토국제영화제 온라인 참관기①>에서 이어집니다.

2020년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영화제를 조직하는 사람들에게 창의력이 요구되는 시기다. 온타리오주에 2억달러의 경제 효과를 가져다주는 북미 최대 영화제로서 오스카를 비롯한 시상식 시즌의 풍향계 역을 맡아온 토론토국제영화제도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상영작을 50편으로 축소하고, 해외 언론과 영화산업 종사자를 위한 모든 상영과 행사, 미팅을 소프트웨어 기업 시프트72사(Shift72)와 함께 구축한 온라인 시스템으로 돌렸다(캐나다 국내 관객과 언론을 위한 실제 상영도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적용해 병행됐다). 9월 10일부터 19일까지 2020년 제45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에디션을 ‘방구석’에서 체험한 김혜리 기자의 일기를 싣는다.

토론토국제영화제 드라이브 인 상영.

9월 14일

매일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하며 과연 이것을 영화제 체험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자문한다. 하루에 네편씩 영화를 보기에, 30분씩 줄을 서기에 너무 늙었다고 투덜거리던 수많은 기자들도 각자의 도시에서 편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영화제의 부차적 기능 중 하나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병소(病所)를 스크린에 올려 공론의 장을 여는 것이다. 한편 보편적인 경험을 다룬 이야기는 출구의 대화로 완성된다. 우연한 대화와 입소문이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내년에도 코로나19 국면이 이어진다면 온라인 게시판이나 채팅룸이라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함께 하기 위한 준비들>(Preparations to Be Together for an Unknown Period of Time)이라는 근사한 제목을 가진 릴리 호바트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은, 타계한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 연작을 연상시키는 헝가리영화다. 뉴욕에서 신경외과 의사로서 성공적으로 활동하던 헝가리 여성 마르타(나타샤 스토크)는 미국 학회에서 만난 고향 출신 학자 야노스(빅토르 보도)와 재회 약속을 한다. 서슴없이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부다페스트로 날아온 마르타에게 야노스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일축하고 마르타는 야노스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이직해 사랑과 광기를 구분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학구적인 여정에 돌입한다.

마르타의 결단은 스토킹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그것을 감행하는 여자의 태도에는 어느 날 밀려온 파도에 나머지 생을 맡겨보기로, 차가운 머리로 판단한 사람의 결의가 있다. 회화적인 숏과 리듬은 사실주의를 전제한 이 영화를 자각몽처럼 보이게 만든다. 코르넬 문드루초 감독의 캐스팅 디렉터였다는 감독의 이력이 무색하지 않게, 나타샤 스토크의 얼굴은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읽어내기 어려운, 그래서 끈질기게 바라보게 되는 암호다.

<아이 엠 그레타>

9월 16일

영화제의 구색(?)은 다 갖추려는지 영사 사고가 터졌다. 물론 내가 저지른 사고다. 이사 하루 만에 인터넷과 TV를 이전 설치했다는 자만심과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겹쳐 있던 멀티탭 코드가 화를 불렀다. 며칠 전 습득한 생활의 지혜를 활용해, 공개 만료 시간이 되기 30분 전에 러닝타임 275분짜리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시티홀>(City Hall)을 플레이하는 데 성공한 나는 시간을 두둑이 벌었다는 기쁨에 취해 있다가 전선을 건드리고 말았다. 재차 로그인한 시각은 시한 만료 후였고 나는 고대했던 <시티홀>을 한 시간 남짓만 구경하고 문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1/4도 보지 못했지만 <시티홀>은 영화 인류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와이즈먼의 최신작으로 2018년 가을부터 2019년 겨울까지 보스턴시의 시정을 관찰한다. 내레이션도 주인공도 인터뷰도 없이 공무원들의 회의, 구내식당, 동성 결혼식 등 매일의 시청 업무를 유려한 리듬으로 엮어가는 이 영화는 민주주의라는 기계 장치의 해부도이기도 하다. <시티홀>은 40편이 넘는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와이즈먼이 세 번째로 고향 매사추세츠에서 찍은 작품이다.

과거를 아카이빙하는 노장의 다큐멘터리에서 튕겨져나온 나는 미래가 보내는 경고와 같은 다큐멘터리 <아이 엠 그레타>(I Am Greta)로 옮겨 탔다.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금요일 학생 파업에서 전 지구적 지도자가 되기까지를 담은 네이선 그로스먼 감독의 영화는 환경 위기 심각성 자체보다 툰베리의 신념과 퍼스낼리티에 초점을 뒀다. 보수 언론들이 비겁하게도 폄하 근거로 삼는 툰베리의 아스퍼거증후군은, 한번 인식한 문제에서 결코 눈을 돌리지 않는 액티비스트의 무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통령 관저의 화려함과 유엔의 위험에도 한눈팔지 않는 툰베리는 기후위기가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반대진영보다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한다”고 끄덕이며 신통한 소녀와 기념사진을 찍고 실질적 대책을 내놓지 않는 각국 지도자에게 더 분노한다. “티백을 잎차로 바꾸고 일주일에 한번 채식하는 정도로 해결되면 그건 애초에 위기도 아니었을 거예요.” 그레타 툰베리의 일갈은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믿는 서구 중산층을 향해 직격으로 날아간다. “메이크 더 월드 그레타 어겐!”을 외치는 10대들에게 확실히 툰베리는 그레이트의 동의어다. 그리고 <테넷>의 미래인들과 달리 그들은 아직 현재 성인 세대와 협상할 의사가 있다. 나는 이사 후 새집에 필요한 물품을 적어둔 메모를 슬그머니 치웠다. 아마 이것이 툰베리가 미온적 대응이라고 부른 행동이겠지.

9월 17일

술이 인류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그것을 다룬 영화의 편수는 현저히 적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공식 선정작인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어나더 라운드>(Another Round)는 중년의 위기를 맞이해 알코올이 직업적 성취와 자신감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실험하는 네 남자 친구의 수기다. 한때 촉망받는 역사 교사이자 사랑받는 남편이었던 마르틴(매즈 미켈슨)의 중년은 실망스럽다. 학생과 학부모조차 그의 수업 능력을 의심한다. 마르틴의 생일을 맞아 모인 침체된 중년 교사 친구들은 어느 노르웨이 학자가 주장했다는,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최적 수준보다 부족하게 태어난다는 가설에 경도돼 낮술 실험에 돌입한다. 아무쪼록 저녁 8시 이후에만 금주하면 일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헤밍웨이의 법칙도 가이드라인으로 채택된다. 역사 교사 마르틴의 영웅은 술고래 처칠이고 반면교사는 술을 마시지 않았던 히틀러다. 과연 교실을 통솔하는 교사들의 카리스마와 자신감, 말발과 성적인 활기가 일시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리지만, 이상적 혈중 알코올 농도를 찾겠다는 목표는 이내 취기에 표류하기 시작한다.

알코올 중독이라는 위태로운 이슈를 도발적으로 다루는 듯했던 <어나더 라운드>는 마지막 라운드에 접어들면서 적당히 계몽적인 안전지대로 연착륙한다. 그러나 빈터베르그 감독은 음주에 대한 청교도적 공포심에 낮게 항의하며 알코올이 계발하는 인간성의 잠재된 측면에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보니 매즈 미켈슨은 덴마크 맥주 광고 모델 아니었나?

9월 18일

영화제 도중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으로 결정된 클로이 자오의 <노마드랜드>(Nomadland)가 마침 토론토 상영 일정에 있어 쾌재를 부른 것도 잠깐, <노마드랜드>를 클릭하자 “계신 지역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라는 쌀쌀맞은 안내가 떴다. 예년처럼 물리적 영화제가 이루어졌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을 이 조치는 어떤 이유로 취해졌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심야 상영 섹션에서 출발한 나의 토론토영화제는 같은 자리에서 끝나게 되었다.

중국계 뉴질랜드 감독 로잔 리앙의 <섀도 인 더 클라우드>(Shadow in the Cloud)는 복합 장르 아드레날린 펌프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여성 파일럿 모드 가렛(클로이 머레츠)은 일급기밀로 분류된 짐을 안고 뉴질랜드에서 사모아로 가는 전투기에 탑승한다. 기체 하부 저격수용 콕핏에 앉은 모드의 헤드폰에는 상대가 듣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는 남자들의 여성 혐오와 성희롱이 난무한다. 이것만으로도 단일 폐쇄공간 호러라고 생각하는 순간 관객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제2의 적이 기체 밖에 출현한다. 모드는 그가 목격한 것을 믿지 않는 한 무리 남자들의 멱살을 잡아끌고 괴물과 대적하며 2만 피트 상공에서 살아남아야만한다.

‘2차대전으로 간 <에이리언>’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이 영화는 배우 클로이 머레츠의 역량을 보여주는 쇼케이스며 –생각해보면 그는 소싯적에 악당의 엉덩이를 차던 슈퍼히어로 였다- 팝콘 페미니스트 액션영화다. 물론 엄연히 전쟁에서 활약했지만 존재가 지워진 여성 파일럿들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다. <크로니클>과 <아메리칸 울트라>를 쓴 맥스 랜디스가 초기 시나리오를 썼지만 성추문 이후 제작진은 랜디스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애썼다고 전해진다. 연출자인 중국계 뉴질랜드 감독 로잔 리앙은 첫 장편으로 2011년 뉴질랜드영화 중 최고 수익을 올린 유망주. 그가 고친 시나리오는 모성과 이성애는 결코 같은 정도로 여성에게 절박한 무엇이 아니라는 태도가 눈길을 끈다.

<겟 더 헬 아웃>

9월 20일

영화제의 폐막과 함께 결산서가 날아왔다. 매해 오스카 수상 지표로 주목받았던 관객상(people’s choice award)은 클로이 자오의 <노마드랜드>에 돌아갔고, 2등은 리자이나 킹의 <마이애미의 하룻밤>이, 3등은 퀘벡주 모호크족 소녀의 시각으로 백인과의 1990년 영토 분쟁을 그린 트레이시 디어 감독의 <빈스>(Beans)가 차지했다. 트럼프 시대를 가장 잘 포착한 인종갈등 드라마 <왓치맨>의 히로인이었던 리자이나 킹의 <마이애미의 하룻밤>은 무하마드 알리가 되기 전 카시우스 클레이와 맬컴 엑스, 샘 쿡, 짐 브라운이 1964년 한 호텔방에서 만나 대화를 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이 연출한 영화로서 최초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됐으며 고른 호평을 받았다. 다큐멘터리상은 미셸 라티머 감독의 <불편한 인디언>(Inconvenient Indian)에 돌아갔고, 미드나이트 매드니스상은 <섀도 인 더 클라우드>의 몫이 됐다. 전체 상영작의 46%가 여성 영화인에 의해 연출, 기획된 2020년 토론토영화제는 주요 상을 여성감독의 작품이 휩쓴 해로도 기록되었다. 올해 영화제의 디지털 참가자는 총 3926명으로 집계됐다.

그래도 영화제는 계속되었다고 쓸 수 있어 기쁘다. 악조건을 무릅쓰고 세계 도처에서 새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확인, 사랑하는 예술의 위기를 우리는 같이 넘어설 거라는 호기로운 다짐이 있어 열흘간의 스트리밍이 외롭지만은 않았다. 마지막 로그아웃을 누른 나는 13시간 느리게 맞췄던 영화제용 알람 시계를 바로잡으려다가 한동안 그대로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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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토론토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