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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시간' 이수정 감독 - 시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면
배동미 사진 백종헌 2021-04-01

시위 현장과 상업영화 현장 사이를 오갔던 이수정 감독이 잔잔한 한편의 시 같은 다큐멘터리로 돌아왔다. <시 읽는 시간>은 보통의 다섯 사람들을 통해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사회에서 쉼표를 찍고 시를 읽으며 호흡을 가다듬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고찰하는 다큐멘터리다.

이수정 감독은 기실 충무로에서 오랫동안 거론됐던 인물이다. 대학 시절 영화운동을 통해 한국 사회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고, 후에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면서 <미술관 옆 동물원>의 제작실장 역할을 했다. 그는 또한 밝은 눈으로 강형철 감독의 <과속스캔들>의 초기 기획 개발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 한국영화사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꼽히는 이정하 영화평론가의 절필 사건을 아내 입장에서 가까이 지켜본 인물이기도 하다.

-그동안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다큐 작업을 많이 해왔는데, <시 읽는 시간>은 어떻게 탄생했나.

=20대 중후반에 민족영화연구소에서 영화운동을 하면서 독립다큐멘터리 작업을 했었는데, 상업영화를 하면서 20년 동안 떠나 있었다. 그러다가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운동을 통해 다큐의 한복판에 들어왔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 동안 거리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쉴 틈 없이 찍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악다구니하는 소리, 경찰과 몸싸움하면서 울부짖는 소리, 계속해서 항의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가 읽고 싶어졌다. 그런 방식으로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담는 작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시적으로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시를 읽는 게 어떤 도움이 되었나.

=소외된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작업임에도 주류 언어와 지식인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약자의 언어 그 자체이고, 소수자의 언어이자 들리지 않던 언어였다. 어쩌면 시라는 게 바로 그런 형식인지 모른다. 익숙하고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질서의 대척점에서 새로운 언어를 창안하는 게 결국 시다. 콜트콜텍 천막 시위 현장의 임재춘이 촛불문화제에서 ‘시 읽어주는 남자’란 호칭으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말을 더듬는 임재춘이 그때부터 시 읽는 연습을 했는데 그 모습이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목소리도 좋고 그때의 표정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말들을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끌어내보고 싶었다. 애초 기획에서는 대학 시절 문학회 선배였던 기형도 시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나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구성안을 짜면서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로만 가기로 결정했다.

-영화의 초반을 등장인물들의 사적인 이야기로 채우고, 인물들이 시를 낭독하는 모습은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이런 구성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원칙은 노래방 영상, 뮤직비디오처럼 만들어선 안된다는 거였다. (웃음) 동떨어진 이미지를 찍어놓고 외화면사운드로 시를 낭독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시는 결국 사람을 통해서 읽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을 통해 읽힐 것인가가 중요했다. 시만 읽을 수는 없기에 사적인 이야기를 풀었는데 시인도 전문가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소소한 고민들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좋았다. 주인공들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시간이 이음매에서 벗어났도다”(Time is out of joint)라는 유명한 문장처럼, 어느 날 인생에 균열이 온 사람들이다. 매끄럽게 흐르던 시간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 다시 일하게 해달라, 일하고 싶다고 구호를 외치는 임재춘이 있는가 하면, 일하기 싫어 그만두는 오하나가 있고, 김수덕씨처럼 잘릴 걱정이 없지만 빚진 기분이 드는 경우도 있다. 하마무는 예술 작품 활동을 하면서 타자의 고통을 민감하게 생각하고, 안태형은 늘 불안해하고 어딘가로 도피할 때도 있는 인물이다.

-보통 시를 낭독할 때 제목과 시인을 먼저 이야기하고 행을 읽어나가는데, 이 영화는 시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시를 읽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이 좋은 시를 쓴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시는 듣자마자 심보선 시인의 작품이라고 직감해 시집을 꺼내 들기도 했는데 <슬픔이 없는 십오초>에 실린 <오늘도 나는>이더라.

=시인의 이름은 일부러 뺐다. 시인 이름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꼭 유명한 시인의 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마무가 읽는 시는 직접 자신이 쓴 것이다. 김수덕씨가 읽는 <지금>은 절필한 이정하 영화평론가가 쓴 시인데, 100부밖에 출판되지 않은 한정판 시집에 실린 것이다. 심보선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사실 심보선 시인을 인터뷰하고 촬영했지만 그 부분은 눈물을 머금고 뺐다. (웃음) 심보선 시인이 달변가인 데다 시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이야기하다보니 보통의 사람들과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첫 다큐멘터리 <깔깔깔 희망버스>는 철저히 개인 작업이었는데, 여러 다큐 작업을 거치면서 이번에는 어느 정도로 스탭을 꾸렸나. 촬영이 눈에 띄게 안정적이었다.

=촬영을 잘하고 싶었다. 다큐멘터리 <동물원>의 왕민철 감독이 촬영을 담당했다. 이미지가 시적이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왕민철 감독과의 담담한 대화가 좋았고 서로 기질이 맞았다. 당시 왕민철 감독은 방송다큐멘터리 작업 중이었는데, 그 작업을 끝내고 30회 만에 압축적으로 촬영했다. 울산 태화강의 까마귀 떼, 석유화학 공단 신, 경주의 한 논밭에서 김수덕씨가 걷는 이미지는 왕민철 감독이 촬영한 것이다. 다만 개미마을 풍경과 소낙눈 이미지는 상황이 벌어진 당시 내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었다.

-<시 읽는 시간>으로 자신에 대해 발견한 지점이 있나.

=다큐멘터리 작업자로서의 태도와 작품을 만드는 방식에 있어서 변곡점이 됐다. 폭력적인 카메라가 되지 않도록, 시선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이슈 중심의 다큐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표현하고 싶은 오랜 욕구를 인터뷰이들과의 편안한 관계 속에서 담아낼 수 있었다. 해외영화제 상영 때도 유럽 관객은 카메라 앞에서 편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하는 인터뷰 장면들을 특히 좋아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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