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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들의 이름으로' 배우 안성기·윤유선 - 미안한 마음, 공부하는 마음
김소미 2021-05-13

안성기, 윤유선(왼쪽부터).사진제공 엣나인필름

1980년 5월의 광주를 잊지 못하는 대리운전 기사 오채근(안성기)은 아버지의 양심을 촉구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되새기며 복수를 다짐한다. 5·18 당시의 주요 가해자들을 단죄하려던 채근은 광주 출신의 식당 종업원 진희(윤유선)의 삶에 개입하면서 그의 비밀 또한 점차 드러낸다.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해 광주시의 제작 지원을 받아 탄생했다. 70년대 말 광주 학생운동을 조명한 <부활의 노래>(1990), 멜로드라마 <편지>(1997) 등으로 주목받았던 이정국 감독의 신작이다.

지난해 <종이꽃> 개봉 후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휴식기를 가졌던 배우 안성기가 스크린 속 건재함을 알리고, 영화 <간이역>(2020)을 비롯해 웹드라마와 연극, 예능까지 착실히 소화 중인 배우 윤유선이 피해자 가족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렸다. 각기 데뷔 64년차, 47년차를 기록한 베테랑들의 연기 경력이 도합 111년. 길고 험한 세파를 뚫고서 이들이 도착한 곳은, 우리가 여전히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복판이다.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부터 공통점이 많은 동료이자 여전히 서로를 깍듯이 대하는 선후배인 두 사람에게 대화를 청했다.

-마침 올해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난 3월에, 당시 공수부대원이었던 민간인이 특정 희생자 유족을 찾아서 직접 사과한 건데요. 41년 만의 첫 사례였습니다. 영화 개봉 앞두고 소식이 들려와 남다르게 기억하시죠?

안성기 ‘이제 그럴 수 있는 때가 드디어 온 건가’ 하는 그런 생각부터 들었어요. 그동안 쌓아만 두고 있던 죄책감이 이제 하나둘씩 고백으로 이어질 것 같고, 이런 사례도 더 많이 나오겠다 싶었지요. 우리 영화가 그런 현상을 조금이나마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면 좋겠어요.

윤유선 그분도 엄청 용기를 내신 거잖아요. 그렇죠 선생님? 이제 다른 분들도 사과를 하고 오랜 짐을 내려놓았으면 싶어요.

-<부활의 노래>를 만들 때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이정국 감독이 30여년 만에 다시 제작한 광주 영화라는 점에 눈길이 갔습니다. 두분에겐 어떤 요소가 작품 선택에 영향을 끼쳤습니까.

안성기 원래는 감독님이 이름은 없어도 연기 잘하는 배우를 물색하려 했던 모양이에요. 저예산 독립영화다 보니까. 그런데 주변에서 누가 내게 한번 시나리오를 줘보라고 했대요. 메일로 책을 보냈길래 열어보고는 곧바로 그다음 날 만나자고 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내용이 좋았어요. 무겁고 아픈 이야기지만 오채근이라는 한 인간의 궤적을 따라가는 과정에 영화적인 매력도 있다고 느꼈지요.

윤유선 제가 과거에 <두 여자 이야기>(1994)로 이정국 감독님과 작업한 적이 있어요(<두 여자 이야기>로 대종상영화제 신인여우상을 수상한 이후 윤유선은 이정국 감독과 27년 만에 한 작품에서 만났다.-편집자). 어렸을 때 만난 감독님이라 편하기도 했고, <아들의 이름으로>를 만들기 1~2년 전에 감독님이 같은 주제로 작업하던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오랜만에 감독님을 만났는데, 비슷한 내용으로 극영화를 제작하고 싶다는 이야길 들었죠. 걱정 반, 응원하는 마음 반이었는데 안 선생님이 수락하셨단 말을 듣고 저도 용기를 얻었어요.

-두분의 인연은 언제 처음 시작되었나요.

윤유선 저는 영화쪽으로 좋은 작품을 할 기회가 많이 없었어요. 선생님과도 시상식장이나 영화제에서 어쩌다 마주친 게 전부인데, 그때마다 반갑게 인사해주셨어요. 같이 작품할 수 있다는 게 저에겐 여러모로 꿈같은 일이죠.

안성기 윤유선 배우는 뭐라고 할까, 한마디로 참 참한 인상이었지요. 자길 앞세우지 않는 태도가 늘 돋보였어요.

윤유선 아무래도 제가 좀 그렇죠, 선생님? (웃음)

사진제공 엣나인필름

-죽지 못해 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것 같은 남자 오채근은 아들과 맺었던 모종의 약속을 지키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계획하는 인물입니다. 오채근의 정체나 그의 심리가 베일에 싸여 있는 터라 연기할 때도 표현을 덜어내는 과정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안성기 “고통은 그것을 철저히 경험함으로써만 치유된다”라는 극중 대사도 있듯이 오채근은 고통, 분노와 같은 감정에 휩싸여 살아왔겠죠. 우선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후반부에 이 사람이 양심 고백하는 부분이 무척 중요하지만 표현이 과해지면 관객에게 자칫 반감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감정을 안으로 품어내자고 마음먹었어요.

윤유선 저는 채근이 무등산(광주를 대표하는 산으로 극중 주요 장소다.-편집자)에 오를 때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보였어요. 양심이나 선의가 점점 더 귀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영화 속 상황을 보면서 새삼 느꼈고요.

-채근의 단골 식당에서 일하는 진희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겪은 폭력으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는 아버지를 돌보며 살아온 인물인데요. 아픔이 있지만 삶을 밝고 의연하게 살아가려는 제스처가 있습니다. 그런 건강함은 배우 본연의 기질에서 힘입은 바도 있어 보였는데요.

윤유선 제가 바랐던 대로 인물이 전달된 것 같아서 굉장히 기쁘네요. 광주에 내려가서 촬영하면서 유가족들을 많이 만났는데 다들 정말로 그러세요. 사람이 계속 분노만 하면 제대로 살 수 있을까요? 너무 충격적인 부분은 때로는 잊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어떤 부분은 흘려보내야 살죠. 제가 만난 피해자, 유가족들은 삶을 굉장히 씩씩하게 살아내고 있고 밝은 모습이어서 저 역시 진희를 슬프게만은 표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그분들답게 하고 싶었어요.

-촬영하는 동안 광주에는 얼마나 머무셨어요.

안성기 두달 남짓이었죠. 촬영하며 광주민주화운동의 피해자, 유가족들과 만남을 가졌고 그분들과 함께 영화에서 연기한 것이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우리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들려주진 않았어요. 그저 담담한 모습이었죠.

-시계를 조금 거꾸로 돌려볼까요. 1980년을 두분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요.

안성기 그때 나는 <바람불어 좋은 날>을 찍고 있었던 것 같아요. 5월에 한창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그냥 무슨 큰 사건이 났구나, 하는 정도로만 인식하고 광주의 실상이 얼마나 참혹한지는 영화 다 찍고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그래서 이후로 쭉 미안한 감정이 있어요.

윤유선 저는 중학교 1학년이었나? 어렸어요. 상황을 잘 모르니 얼핏 해외에서 한국 상황을 많이 걱정한다는 이야길 듣고 의구심을 가진 적도 있어요. 제가 87학번인데요. 대학 때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분위기 속에서) 5·18 당시 광주 사진을 접하고 깜짝 놀랐어요. 얼마나 부끄럽고 미안했던지 요즘에 미얀마 소식을 접할 때마다 더 미안하고 아픈 마음이 들어요.

-서울 변두리 개발 지역에 터를 잡아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어리숙한 중국집 배달부 덕배(<바람불어 좋은 날>)를 필두로 1980년대 한국영화계는 안성기의 시대였습니다. <바람불어 좋은 날>로 그해 대종상영화제 신인상도 수상했고요. 임권택·배창호·이장호 감독 등과 작업하면서 20대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받았을 텐데요. 마침 민주화 바람도 불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변혁을 한꺼번에 마주했을 듯합니다.

안성기 <바람불어 좋은 날>을 시작으로 <만다라>로 임권택 감독님과 작업했고, <고래사냥>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깊고 푸른 밤> 같은 뉴웨이브라 불릴 만한 작품들을 참 잘 만났죠. 좋은 분들과 인연도 많이 맺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1980년대 들어 70년대에 못했던 이야기들, 유신 정권 때는 건드리지 못하고 지나간 주제들에 참여할 수 있어 의미가 있었지요.

-1990년대에 정지영 감독의 전쟁영화를 선택하고, 최근까지도 베트남전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벌레의 눈물>(2016), 광주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에 출연하는 등 사회참여적인 영화에 적극적인 성향은 그 시절의 영향일까요.

안성기 영화의 현실 참여가 어려운 유신 정권 시절을 경험했으니 앞으로는 작품을 결정할 때 그 부분에 신경을 좀더 쓰자는 생각은 있었죠. 그래서 1980년대에 사회비판적인 색채가 있는 영화에 많이 합류한 것도 같고…. 1980, 90년대에 시대가 어디까지 열려 있는지 알고 싶으면 영화를 보면 됐어요. 영화화가 허용되는 범위가 곧 시대상을 보여주는 척도였다고나 할까. 여러모로 내게는 중요한 때였지요.

-시대정신의 창구로서 영화가 가진 대중문화적인 힘을 체감한 것이 선생님에겐 자극제였군요.

안성기 그래요. 문학이나 다른 예술이 아무리 앞서가더라도 영화는 좀 달랐어요. 영화 한편이 극장에서 개봉되는 순간, 딱 그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까지 우리가 자유로워졌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시절이었지요. 그러니까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에선 빨치산이 주인공이잖아요. 국방군이 적이고. (웃음)

윤유선 정말 그러네요, 선생님.

안성기 예전 같으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잖아요. <하얀전쟁>(1992)도 그래요. 베트남전 참전 후 후유증에 시달리는 병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한국에서 반전영화라고 할 만한 작품이 이전까지는 거의 없었다가 그즈음에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러니 배우로서는 의미 있었던 작업들이라고 생각해요.

-사회변혁의 경험을 스크린의 최전선에서 겪으신 건데요. 원로 배우로서 요즘의 한국영화계를 보며 드는 생각이 있으신가요.

안성기 비교할 수 없이 너무 좋지요. 자유롭고. 그런데 배우 입장에서는 선택의 각도가 너무 열려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더 어려운 게 아닐까 해요.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요. 참 요즘 배우들 어렵겠다, 그런 생각을 하긴 해요. (웃음) 예전에는 사실 암묵적인 약속이 확실했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일단 관객을 감동시키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 게 아닐까 싶고.

사진제공 엣나인필름

-안성기 배우는 6살(1957년 <황혼열차>), 윤유선 배우는 5살(1974년 <만나야 할 사람>)에 스크린 데뷔해서 남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연기자의 정체성을 갖고 세상을 바라봤습니다. 알게 모르게 두분 사이에 공감대나 유대감이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되는 조합입니다.

안성기 (웃음) 뭐라 그럴까, 마음으로 좀더…. 이를테면 동료 의식 같은 게 있었다고 할까.

윤유선 하하하.

안성기 아무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으니 따로 말은 안 했지만 가족같이 미더운 느낌이 있었어요.

-두분 다 약속을 잘 지키고 작품 준비에 성실한 것으로 주변에 평판이 나 있습니다. 일찍이 프로페셔널의 세계에 진입해서 직업인의 태도를 고민한 결과일까요. 철칙 같은 것을 세워둔 편입니까.

안성기 철칙, 그런 건 없어요. 그저 초심. 그것을 잃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했어요. 처음에 영화 시작할 때 마음먹었던 것을 변하지 않게 하자, 그러면 좀더 겸손할 수 있고, 좀더 성실할 수 있고. 그것뿐입니다.

윤유선 저는 시간 약속을 잘 지키기만 하는데요. 선생님은 항상 일찍 오시기까지 해서 제가 좀…. (웃음) 그리고 현장에서 정말 다 맞춰주세요. 실은 저도 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도요. 분장, 의상이 따로 없어서 선생님이 일일이 다 직접 챙겨가며 찍은 영화예요. 그 밖에도 만약 선생님이 불편한 표시를 하면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의 열악한 환경이 꽤 있었는데 일절 내색이 없으셨어요.

-얼마 전 윤유선 배우가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에서 들려준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최고를 고집하기보단 ‘건강한 선 긋기’를 실천하며 주어진 배역에 그저 최선을 다해왔다고요.

윤유선 저는 작품을 고를 때 야심이 적은 편이에요. 일하는 게 감사하고, 저보다 좋은 배우들이 업계에 훨씬 많다는 걸 인정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기본으로서 우선 성실하고 약속을 잘 지키기로 했고요. 선생님이 언젠가 흥행이 중요한 상업영화만 하지 않고 진정성 있는 독립영화에도 출연하며 계속 공부하는 자세로 연기한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 말씀이 참 좋았어요. 오래 일하다 보면 연기가 잘되는 것 같다가 갑자기 안 되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거든요. ‘선생님도 아직 공부하는 마음으로 하는시구나’ 생각하니 저도 힘을 얻죠.

-지난해 개봉한 독립영화 <종이꽃>에 이어 <아들의 이름으로>가 나왔고, 차기작으로는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을 보게 될 듯합니다. 작품 규모나 성향 면에서 여전히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계신데요, 독립영화에 힘을 실어주고자 하는 책임 의식도 느껴집니다.

안성기 배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더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면 공부하는 계기가 되니까. 특별히 내가 뭘 감수한다, 그런 건 없어요. 작품 보고 ‘아, 이거 해야 되겠구나’ 싶으면 그냥 하는 거죠.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손을 머리에 짚으며) ‘뭐지? 뭐지?’ 하면서 일단 따라가는 거예요. 그런 겁니다. (일동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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