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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 이선균, 말의 왕
임수연 사진 백종헌 2021-12-22

서창대는 그림자이지만 그림자여서는 안되는 캐릭터다. 전설의 ‘선거판의 여우’는 60~70년대 정치판의 판도를 바꾼 스타 김운범(설경구)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도록 기상천외한 전략을 짜냈지만 일급 참모의 존재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그는 명함조차 없이 일한다. 하지만 <킹메이커>는 대의를 위해 뒤에 숨어야만 했던 서창대의 일대기에 주목하며 그를 격동의 근현대사에 파원을 만든 장본인으로 조명한다. 이선균은 “선균이를 확 바꿔봤으면” 하는 설경구의 제안으로 성사된 캐스팅이다. 언제나 작품의 전체 그림을 우선시했던 이선균이, 변성현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에 필요한 기초공사도, 그 앞에 반짝이는 간판 역할도 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거쳤던 고민을 들었다.

- 변성현 감독이 지금까지 영화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배우일 것이라는 말을 전해줬다.

= <킹메이커>는 시대극이고 편안한 일상 연기를 하는 작품이 아니다. 엄창록이라는 실존 인물이 모티브가 됐지만 선거 전략의 귀재라는 것과 이북 출신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정보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20대부터 60대까지 밸런스를 맞추면서 깊이 있게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서 내가 느끼는 부담감과 캐릭터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 <킹메이커>는 실존 인물과 다른 이름을 쓰지만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을 토대로 한다. 실제 역사를 공부하며 캐릭터에 접근했나 아니면 오히려 열어두고 갔나.

= 처음엔 유튜브나 팟캐스트 방송도 찾아봤는데, 말하는 사람마다 입장 차가 있어서 그 인물을 둘러싼 논란보다는 내면 심리 분석을 더 고민했던 것 같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그림자로 있어야만 했을까? 김운범이 ‘빨갱이’라고 공격받는 상황에서 이북 출신의 전략가가 앞에 나서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림자 같은 사람인 것치고 영화에서는 좀더 앞에 나서는데, 청년 시절을 보여줄 때는 그렇게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감독님과 경구 형의 관계에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 둘의 관계가 굉장히 묘하고 재밌다. 서창대와 김운범 같다. 둘이 술을 마시면 톰과 제리처럼 맨날 싸우는데, 그러면서도 굉장히 잘 맞는다. 그래서 서창대 캐릭터를 감독님처럼 연기하고 싶다고 내가 얘기했었다. 본인이 쓴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 서창대는 왜 많고 많은 정치인 중 김운범을 따랐을까.

= 반했겠지, 처음 연설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나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을 보고 감동을 받았을 거다. 서창대는 이북 출신으로 차별을 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함께 꿈을 발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어떻게든 자기의 출신을 감추고 싶어서 사투리도 쓰지 않는다. 딱 한번, 서재에서 김운범과 대화할 때 빼고는.

- 창대는 그림자 같은 존재지만 <킹메이커>에서의 존재감은 그림자가 돼서는 안된다.

= 앞에 나서지 못하고 뒤로 빠져 있어야만 하는 창대의 심리는 촬영과 조명팀이 음영을 통해 너무 잘 만들어줬다. 내가 굳이 뭘 하지 않아도 창대의 마음이 잘 전달됐다. 연기의 톤 앤드 매너는 감독님과 함께 맞춰가는 거니까 내가 너무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조화를 생각해야 한다.

- 설경구처럼 에너지가 대단한 배우와 팽팽한 텐션을 만드는 작업은 어땠나.

= 어릴 때 롤모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송)강호 형이나 (설)경구 형처럼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배우들을 언급하곤 했다. 나는 그들이 연극하다가 스크린으로 넘어와 주연배우로 자리 잡는 과정을 보면서 감탄했던 세대라서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 나도 저렇게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항상 있었다. 경구 형은 <지하철 1호선> 초연할 때부터 봤다. 대학로 시절에 술자리에서 몇번 인사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함께하는 것 자체가 너무 설레고 떨린다. 일단 슛 들어가면 최대한 편하게 연기하려고 하는데, 내가 진심을 다해 던지면 형이 진심을 다해 받아줘서 너무 좋았다.

- 지금까지 이선균은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와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배우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 <킹메이커>에서는 박 비서(김성오)나 이 실장(조우진), 결정적으로 김운범과 갈등을 겪으며 캐릭터의 존재감을 보여줘야 한다.

= 그동안 내가 일부러 받쳐주려고 해서 상대를 받쳐준 게 아니라 그냥 대본에 충실했던 거다. 나를 두고 여배우들을 잘 받쳐주는 배우라고 하는데, 여배우들이 더 돋보이는 작품이니까 굳이 내가 더 보이려고 하지 않는 거다. 정해진 시퀀스를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할 뿐이지 같이하는 배우를 이기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배우라고 하면 나서는 걸 좋아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다르지만, 지금도 내가 좀더 어필되는 것보다는 그 안에서 캐릭터로 함께 호흡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 드라마 <하얀거탑>이 끝나고 <씨네21>과 했던 인터뷰를 읽다가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 블록버스터보다는 홍상수, 봉준호, 김지운 감독의 작품을 하고 싶다고. 홍상수 감독과는 금방 작업했고, 최근 몇년 사이에 당시 말했던 걸 다 이룬 거 아닌가? (웃음)

= 내가 요즘 <Dr.브레인> 하면서 김지운 감독님 너무 팬이었다고 하고, <킹메이커> 하면서 경구 형 너무 팬이었다고 하면 그냥 하는 말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 인터뷰만 봐도 알 수 있듯 진짜 진심이다! (웃음) 그리고 당시 인터뷰 덕분에 홍 감독님의 <밤과낮>에 출연하고 이후에도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감독과 배우들과 함께 일하고 싶은 로망이 오랫동안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 그럼 다음의 꿈은 무엇인가.

= 요즘 <행복의 나라>에서 (조)정석이랑 연기하는데, 와…. 너무 잘하더라. 지금까지는 형들을 보면서 많이 배웠다면 지금은 잘하는 후배들과 호흡하면서 배우고 싶다.

스타일리스트 이현하·헤어 최동욱·메이크업 함경식

의상협찬 폴스미스, 띠어리, 손신발, 더헌트맨, 존바바토스, 오피신제너럴, 토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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