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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아사야스 (Olivier Assayas)

1955-01-25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7.2

/

네티즌7.2

| 수상내역 1

기본정보

  • 다른 이름올리비에 아싸야스; 올리비에 아사이야; 올리비에 아사이아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55-01-25
  • 성별

소개

비평에서 창작으로 옮아간 과정에 대한 아사야스의 회고는 흥미롭다. “단편을 찍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장편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뒤에 깔린 이론에 괘념하지 않게 됐다. 테크닉, 형식, 추상적 개념을 망각하기 시작했을 때 진짜 필름메이커가 된 것 같다. 내가 신경 쓴 문제는 단지 내가 느낀 감정을 재창조할 수 있을까, 내가 보는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까였다.” 그러나 이 말은 이론 전반에 대한 회의라기보다 다른 언어를 통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뜻에 가깝다. 또한 인용의 뒷부분은 아사야스가 예술로서 영화가 세계를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사적인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록밴드 멤버들의 우발적 살인을 그린 장편 데뷔작 <혼란>부터 10대 커플의 일탈을 묘사한 <차가운 물>까지 아사야스의 초기작들은, 발버둥치는 청춘남녀에 집중됐다. 본인이 익히 아는 좁은 세계에서 출발한 것이다. 아사야스는 이 영화들을 통해, 방향성을 상실한 젊은이들의 노이로제에 주목한 미국 X세대 영화와 달리 현대사회에 대한 근본적 비판에 도달하려 했다. “사회는 개인성에 적대적이고 개인이 공동(空洞)이 될 것을 기대한다. 지금 젊은이들에겐 공산주의자가 될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보존하면서 사회 속에 살아갈 방법을 찾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투쟁이다.”

영화에 관한 영화’의 명작 <이마베프>

1996년 겨울 100만달러 예산으로 4주간 촬영된 <이마베프>는, 그를 위해 예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던져진 인물을 중심에 놓았다는 점에서 아사야스의 초기영화들과 연결된다. 영화탄생 100년에 즈음해 발표된 이 작품은 ‘영화에 관한 영화’의 명작으로 평가받으며 올리비에 아사야스를 세계 영화 지도 위에 올려놓았다. 홍콩 스타 장만옥은 영락한 누벨바그 감독이 찍는 무성영화 리메이크의 주연으로 캐스팅돼 파리에 오지만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지친 감독과 스탭들의 자괴감과 분열뿐이다. 인터뷰 하러 온 기자는 본분을 잊고 “제 배꼽만 응시하는 프랑스 지식인 영화”를 욕하고 할리우드 액션영화 예찬에 침을 튀긴다. 프로덕션은 아수라장으로 치닫고 몇 가닥의 내러티브는 맺어진다기보다 각각의 길로 해산한다. 일단 <이마베프>는 영화의 현실에 대한 아사야스 감독의 양가감정이 드러난 일종의 에세이로 관심을 끌었다. 여기서 아사야스는 ‘액션의 영화’만이 보고 만들 가치가 있다는 합의에 저항하면서도, 자신이 속한 작가영화의 세계를 씁쓸히 자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마베프>의 절정은 도중하차한 감독의 편집본을 영사하는 결말부에 있다. 지리멸렬한 아귀다툼 속에 엉터리로 찍고 붙여낸 필름 속에서 한순간 이해 불가능한 아름다움이 현현한다. 아사야스는 마치 “이 기적을 위해 우리가 영화를 찍고 있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마베프>에서 드러나는 아사야스 감독의 또 다른 관심사는 언어의 작동 방식이다. 프랑스어가 서툰 장만옥과 광둥어를 모르는 프랑스 스탭들은 제3의 언어인 영어로 더듬거리며 대화하고 때로 상대가 모르는 언어로 푸념한다. <이마베프>를 찍을 당시 “우리는 외국어를 말할 때 좀더 모호하고 거칠게 말하며, 때로는 모국어로는 털어놓지 않을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고 지적한 아사야스 감독은 이후 <데몬 러버> <클린>에서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며 실험을 계속한다.

무엇보다 <이마베프>는, 홀로 끝없이 움직이는 현대의 개인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고 모종의 관계를 형성하는 미묘한 양상을 스케치하는 아사야스의 재능을 과시했다. 통상 소설이 가장 잘하는 이 작업을 영화로 해낸 집중력에 대해 평론가 마놀라 다지스는 “단 하나의 틀린 음정도, 낭비된 이미지도, 잉여분의 카메라워크도 없다”고 감탄했다. 이 미덕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1998년작 <8월초 9월말>는 한 작가의 죽음이 그의 주변에 끼친 여파에 대한 일지다. 아사야스는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세 친구를 에이즈로 잃고 지인들 사이에 오간 대화에서 이 영화를 착안했다. 죽은 자가 주인공이었다면 필시 멜로드라마가 됐을 <8월초 9월말>는, 대신 그들에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작가의 쇠락과 죽음을 지켜보며 1년 동안 실연하고 아파트와 직장을 바꾸는 파리 남녀의 일상을 좇음으로써, 집단적 자서전의 문체를 획득한다. <8월초 9월말>를 지배하는 정서는 에릭 로메르식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감정이입인데 이같은 동화 작용은 기묘하게도 조용한 페이드 아웃과 자막으로 구성된 분절 형식을 통해 작동한다. 하루, 한달, 반년 등 불규칙한 간격으로 배치된 여백은, 몰입을 억제하기는커녕 관객이 극중 인물이 그간 통과한 심리적 흐름을 상상하면서 감응하게 만든다.

웅장한 대하극 <감정의 운명>, 난해한 스릴러 <데몬 러버>

<감정의 운명>
몇번의 포기와 기다림 끝에 2000년 완성된 대작 <감정의 운명>은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무관해 보였던 요소들- 거대예산, 국제적 스타(에마뉘엘 베아르, 이자벨 위페르), 시대극- 의 결정체였다. 자크 샤르동의 대하소설을 각색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여명기를 통해 감정의 생로병사를 그린 이 작품은 그 위용이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 마리오 푸조의 <대부>, 혹은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을 연상시킨다. 20세기 초 프랑스 리모쥬에서 도자기 공장으로 부를 축적한 신교도 바르네리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쟝은 목회자의 길을 택하지만 첫 아내와의 불화와 두 번째 아내가 가져다준 필생의 사랑은 그를 낭만적 은둔자의 삶으로 이끈다. 그러나 부친의 죽음과 공장의 위기는 그를 다시 자본가의 자리로 불러들이고 전쟁과 대공황을 겪으며 임종의 침상에 누운 그에게 남은 것은 아내의 손과 어린 날 소꿉놀이에 접시로 쓴 꽃잎과 닮은 아름다운 도자기다. 겉보기의 육중한 무게감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운명>은 아사야스가 가장 자유롭게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아사야스는 줄곧 동세대 이야기에 매달려온 자신을 “개방하고 확장하기 위해” 각색을 택했고 <겨울의 심장>의 작가 자크 피에쉬의 도움을 받았다. 미더운 원작에 스토리텔링의 부담을 넘기고 ‘작은’ 영화에서 발휘한 아사야스의 장기를 감정과 시간의 영화적 재현에 집중시킨 결과물은 황홀하다. 현대극처럼 긴장이 흐르는 대사는 느즈러진 노스탤지어를 허용치 않고, 모럴과 관능을 상징하는 위페르와 베아르는 당대 회화 속 모델들처럼 프레임을 사로잡으며, <8월초 9월말>에 선보였던 비약과 생략의 분절 양식은 좀더 웅장한 톤으로 구사된다. 화면이 암전되었다 밝아질 때마다 관객은 가족 중 누군가가 사라졌음을, 생동하던 사랑과 증오가 소멸했음을 발견한다.

통틀어 8년을 쏟아부어 급기야 “전생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하기에 이르렀던 영화 <감정의 운명>에서 벗어나자,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그간 이루어진 21세기의 변화를 한달음에 따라잡으려는 듯 산업 스파이에 관한 사이버스릴러 <데몬 러버>를 내놓았다. 그러나 2002년 칸영화제에 열린 프리미어는 스캔들이었다. <데몬 러버>는 일본 성인 아니메의 세계 배급권을 협상하는 프랑스 다국적 기업의 여성 간부가 거대 인터넷 기업의 사주를 받아 스파이 활동을 하며 야심을 키우다가 온라인 SM클럽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이야기. “사람들은 유럽영화가 관객을 잃었다고 불평하지만 할리우드가 현대적 삶의 에너지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이 에너지를 독립영화에도 불어넣을 수 없을까?”라고 고민했던 아사야스는 <데몬 러버>에서 전반부에 할리우드 스릴러의 자극과 파괴력을 끌어들인 다음, 영화의 뒷부분에서 스릴러의 모든 구조를 해체하고 날려버리는 전략을 택했다. 심지어 막판에 이르면 캐릭터의 성격이나 성적 취향조차 게임 캐릭터처럼 갈아치워버린다. 그러나 관객과 평론가들은 <데몬 러버>의 형식적 ‘자폭’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영화가 포르노적 이미지를 비판하는 것인지 탐닉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고 꼬집었다. 아사야스의 대응도 전례없이 공격적이었다. 인터뷰에서 그는 <마지막 수업> 같은 다큐멘터리를 예로 들며 “노스탤지어에 호소하는 최근의 독립영화들은 현대사회로부터의 도피처 역할이나 하고 있다. <파이트 클럽> 같은 주류영화가 오히려 눈여겨볼 만하다. 복잡해진 오늘의 세계에서 단순화의 미학은 사기다”라고 강변했다. 어쨌거나 <데몬 러버>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비평가가 만들 수 있는 최악의 영화’ 청사진에 딱 들어맞는, 다시 말해 감독의 해설 없이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불운한 영화였다.

한 여인을 묘사한 세심한 손길, <클린>

<데몬 러버>의 소동 이후 2년 만에 나온 <클린>은 음악산업의 주변부에서 청춘을 탕진한 여인이 느리고 고통스럽게 마약중독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스토리로 치면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할리우드 갱생드라마의 내러티브와 다를 게 없다. 기다려도 소용없다. 기발한 대사, 쿨한 정서, 반전의 역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에밀리 역의 장만옥과 주변 사람들은 꺼낼 만한 대사를 그럴 만한 타이밍에 말하고, 예측 가능한 행동을 그럴 만한 시점에 취한다. 영화는 온타리오, 파리, 런던, 샌프란시스코를 유랑하고, 에밀리는 그네를 바꿔타듯 다른 언어와 도시 속으로 투신하며 여성복 판매원, 엄마, 웨이트리스의 아이덴티티를 갈아입는다. 유일하게 지속되는 것은 감정이다. <클린>은 이상한 영화다. 회화의 이미지, 문학의 이야기와 경쟁하는 데에 처음부터 관심을 끊고 영화만이 가진 무기로 무모한 승부를 건다. 그 무기는 시간과 감정의 퇴적이다. 에밀리가 고통받고 객기를 부리고 모욕당하는 <클린>의 시퀀스들은, 매번 음악으로 치면 ‘벗어난 마침’으로 석연치 않게 종결되며 찌꺼기를 남긴다. 아사야스 감독은 자기혐오와 모멸감과 피로를 해소시키지 않은 채 축적해나간다. 그래서 마침내 환각을 이기고 현실과의 관계를 회복한 에밀리가 갓 태어난 아기 같은 눈으로 커피잔을 응시하는 순간, 감정의 모래시계는 마지막 알갱이를 떨어뜨리고 툭 기울어진다. 그때 관객은 에밀리와 함께 심호흡을 하며 심장에서 손끝으로 혈관을 타고 번져가는 맑아지는 생의 조짐을 교감한다.

<클린>은 너무 강조하면 사라져버리는 종류의 진실을 붙잡기 위해 손의 힘을 세심히 조절하며 한 여자의 살갗을 더듬는 영화다. <이마베프>, <8월초 9월말>, <감정의 운명>을 거쳐 <클린>에서 하나의 포즈에 다다른 이 태도는 올리비아 아사야스가 <감정의 운명> 발표 직후 인터뷰에서 예찬했던 인상주의 미학을 상기하게 만든다. “누구나 인상파는 알지만 그 의미는 잊고 있다. 인상주의는 세계와 자연과 감정을 바라보는 직접적이고 단순하며 깊고 아름다운 방식이다. 나는 인상주의의 가치로 돌아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모든 예술의 목적은 그러한 수월함과 가벼움을 성취하는 것이다.” 두 시간의 인내 끝에 터져나오는 한번의 심호흡을 가장 자연스럽게 만드는 한없이 가벼운 터치. 그것이 지금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구하는 영화 예술의 경지인 듯하다. / 글: 김혜리 씨네21 No. 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