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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서>는 출판 금지가 횡행하던 1970~8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출판도시, ‘파주’의 탄생을 꼼꼼히 되짚는다. 출판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오로지 책을 위한 도시를 꿈꾸는 사람들. 출판인들과 건축가들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꿈꾸고, 그들의 계획은 당시 군사 접경 지역의 늪지대였던 파주에서 펼쳐진다.
이례적으로 민간 주도의 출판도시를 추진하며, 이들은 당대 도시에 요구되던 효율성 대신 공공성을 생각한다. 또 파주의 늪지 등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고민한다. 이런 과정이 파주출판도시 시범지구 건축설계 계약이라는 성과를 맺는다. 차라리 선언문에 가까운 이 계약을 두고 그들은 ‘위대한 계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화는 인터뷰 영상, 과거의 사진과 신문 기사를 번갈아 보여주며 지나간 역사를 소환해낸다. 각자의 말과 기억이 모여, 여러 명의 꿈이 실제 도시로 현실화된 과정이 그려진다. 그렇게 영
[리뷰] 도시의 기원을 회상하는 담백한 말들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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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옹성 같은 빌딩에 사는 유지(김유나)는 또래 가정부 서진(정민정)이 아무런 말없이 사라져 서운하다. 빌딩 속 삶에 갑갑함을 느끼던 유지에게 ‘하촌’에 사는 서진과 어울리는 건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일이었다. 남들은 하촌은 상종 못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옥 같은 곳이라고 말하지만, 유지는 그런 하촌에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끼며 반드시 당도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 유지가 서진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불어닥친 기상이변이 빌딩과 하촌을 쓸어가버린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채 생존자 집결지로 향하던 유지는 서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거기서 행성처럼 생긴 괴이한 구체를 맞닥뜨린다.
<헝거>는 다중 차원, 평행 우주, 도플갱어, 괴물체 등 공상 과학의 모티브를 다수 차용한다. 막바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SF를 배경으로 한 계급 갈등을 그리는가 싶은데, 그 이후에는 유지의 성장통을 포함한 다양한 갈래의
[리뷰] 좀 거창한 성장담 '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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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천재 피아니스트 코세이(야마자키 겐토)는 모종의 트라우마로 인해 피아노를 치지 못한 채 모노 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코세이는 운명처럼 동갑내기 여학생 카오리(히로세 스즈)를 알게 된다.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성격의 카오리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코세이는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세상을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우정과 사랑, 음악과 꿈이 두 사람 사이를 봄바람처럼 오가는 사이, 코세이의 어두운 과거가 점차 드러나고 카오리 또한 예기치 못한 일들을 겪는다.
아라카와 나오시의 동명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4월은 너의 거짓말>은 벚꽃 핀 4월의 풍경이 꽤 잘 어울리는 학원 로맨스물이다.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남자와 따뜻하고 씩씩한 여자가 만나 다채로운 감정을 나누는 과정을 순정만화 톤으로 그려낸다. 2016년에 제작되었으나 뒤늦게 국내 개봉하는 영화로, 주연배우 히로세 스즈와 야마자키 겐토의 보다 앳된 모습을 확인할
[리뷰] 싱그럽고 싱거운 학원 로맨스 '4월은 너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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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무더운 어느 여름밤, 에어컨 수리공 왕쉐밍(펑위옌)은 차를 몰아 애인이 있는 영화관으로 향한다. 잠시 방심한 사이에 그는 누군가를 치고, 당황한 나머지 뺑소니를 친다. 차에 치어 죽은 사람은 후이팡(장애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전단지를 만들어 남편을 찾는 데 열중한다. 왕쉐밍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왕쉐밍은 자수를 결심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만다. 대신에 그는 후이팡에게 직접 사실을 고백하고자 에어컨 수리를 빌미로 그녀에게 접근한다.
<열대왕사>는 한여름 밤에 일어난 뺑소니 사고의 전말을 더듬어가는 범죄 스릴러 영화다. 익숙한 서사지만 연출은 새롭다. 우선 왕가위 영화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는 영화가 담아낸 무더운 한여름과 살인 사건에 연루된 주인공의 찜찜한 죄책감과 맞물려 한껏 분위기를 살린다. 또한 뺑소니 사고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더듬어가
[리뷰] '열대왕사' 한 사건을 두고 망각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남과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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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라(천우희)는 방송사 YBC를 대표하는 앵커다. 방송국 간판 프로그램인 ‘9시 뉴스’의 진행을 맡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고, 직장 내 평판이 좋으며,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 세라에겐 매일 밤 부담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피드백을 주는 인물이 있다. 세라의 엄마 소정(이혜영)이다. 소정은 세라의 현재 입지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염려하며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는데, 이는 세라의 결혼 생활에까지 악영향을 끼친다. 그러던 어느 날 세라는 한 여성의 제보 전화를 받게 된다. 제보자는 자신과 자신의 딸을 오래전부터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고 지금 그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말하지만, 세라는 이를 장난 전화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그런데 다음날 실제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세라는 특종을 통해 확실한 눈도장을 찍으라는 엄마의 조언에 따라 직접 사건 현장을 찾는다.
<앵커>는 ‘모녀 사망 사건’을 둘러싼 비밀을 직접 파헤치던 한 앵커가 그 과정에서 자신의 트라우
[리뷰] 내가 낸 NG가 아니더라도 내가 클로징해야 한다는 비극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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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준희(이혜영)는 오랜 슬럼프에 빠져 현재 글을 쓰지 못하는 상태다. 어느 날 그녀는 한참이나 연락이 끊긴 후배를 찾아 서울 근교의 작은 책방에 들른다. 후배의 서점에서 잠시 커피를 마시며, 그녀는 서점 직원에게 수화를 배운다. 처음 배운 수화는 다소 생경하지만, 막상 그 뜻을 습득하니 의미가 잘 전달되는 것 같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준희는 근처의 전망대를 방문한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그곳에서 알고 지내던 영화감독 부부와 재회한다. 세 사람은 함께 타워 아래의 공원을 걷기로 한다. 하지만 막상 산책로에 도착하자 문제가 발생한다. 우연히 만난 영화배우 길수(김민희)와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영화감독과 준희 사이에 언성이 높아진 것이다. 결국 부부는 떠나고 준희와 길수 두 사람만 남는다. 의외로 둘은 금세 친해진다. 이윽고 준희가 길수에게 함께 단편영화를 찍고 싶다고 제안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급진전된다.
홍상수의 27번째 장편 <소설가의 영화>는 이전
[리뷰] 특수효과 없이 마법을 보여주는 홍상수의 렌즈들 '소설가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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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방영, OTT 공개작을 가리지 않고 학교 폭력의 잔혹한 재연이 넘친다. 반드시 나온다고 장담할 만큼 반복되는 연출도 있다. 발치에 있는 상대를 제압하는 가해자와 짓밟히는 피해자 두 사람의 시야를 오가는 시점숏이다. 피해자의 공포를 극대화해 전달하려는 의도가 가해자의 전능감을 증폭시킬 때, 이 연출은 피해자와 가해자 어느 쪽에 봉사하는 걸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자들의 죽음을 막아 본래 수명대로 살게 하는 일을 맡은 저승 대기업 ‘주마등’ 위기관리팀의 이야기인 MBC <내일>의 첫 에피소드 ‘낙화’도 학교 폭력을 다룬다. 원작 웹툰에서 고등학생이었던 노은비(조인)는 29살의 방송 작가가 되었고 은비를 괴롭히던 같은 반 김혜원(김채은)은 학폭 가해자를 응징하는 인기 웹툰의 작가로 은비가 맡은 방송에서 재회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이 학폭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건넨다면서 다시 예전의 폭력을 행사하는 지독한 기만이 은비를 벼랑 끝으로 몰고, 사람 살리는 저승사자 구
[홈시네마] 폭력의 재연을 고민함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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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30살의 서점 직원 글로리아(스테파니아 토르토렐라)는 교양과 친절을 두루 갖추었지만, 연애에서만큼은 영 젬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마다 울려 퍼지는 윗집 커플의 신음 소리를 참다못해 새집으로 이사온 그녀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기기묘묘한 존재, 다름 아닌 유령과 사랑을 나누며 난생처음 성적 즐거움을 만끽한다. 글로리아와 동침한 이의 정체는 얼마 전 죽은 남자 집주인 단테(페데리코 게라)의 유령으로, 우여곡절 끝에 단테 유령과의 야릇한 연애를 시작한 글로리아는 동료 샌드라(네난 펠레누어)도 놀랄 만큼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변한다. 그러나 설렘의 시간도 잠시, 예기치 않은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나면서 글로리아는 사랑의 힘으로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마주한다.
우루과이의 남녀 감독 마우로 사르세르와 마르셀라 마타가 공동 연출을 맡은 <고스팅 글로리아>는 유령과 사랑에 빠진 서점 직원의 ‘웃픈’ 연애담을 그린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리뷰] 귀여운 상상과 익숙한 엔딩 '고스팅 글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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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우리 곁에서 일어난 일을 글로 엮는 데 참여했다.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사실 그대로를 엮은 것이다.” 부활절 시즌에 맞춰 신약 성경에 담긴 핵심적인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낸 영화가 개봉한다. <그리스도 디 오리진>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등을 위시한 기존 기독교 소재 영화들이 서양에서 영어 대사로 제작된 것과 달리 실제 예수의 탄생지로 알려진 이스라엘 갈릴리 고지 남부의 나사렛을 중심으로 로케이션을 정했다. 불가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3개국이 제작에 참여해 주요 촬영지로 등장하며, 대사 역시 예수가 실제 사용한 원어(아랍어, 히브리어)로 채워넣었다. 로마 시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성모 마리아로부터 예수가 태어나고, 12제자를 만나 그들과 함께 사역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에 위기를 느낀 로마가 그에게 십자가 처형을 내리고, 예수가 3일 만에 부활하기까지 신약의
[리뷰] 수업 시간에 틀어주는 ‘예수의 생애 ’교양 비디오, '그리스도 디 오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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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겨울 서부전선. 모스크바 상공에 있는 파일럿 니콜라이(표트르 표도로프)는 독일군 전투기 틈에서 혹독한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급박한 상황 가운데 탑승한 항공기가 독일군의 폭격으로 불시착하고, 그는 진격해오는 독일군의 총알을 피하던 중 큰 폭발에 휩싸여 쓰러진다. 니콜라이가 전사했다고 생각한 쇼타는 그를 강가에 띄워 보낸다. 얼마 후 깨어난 니콜라이는 외딴숲에 홀로 남아 언제 맞닥뜨릴지 모를 전쟁의 위협과 혹한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전쟁으로 생이별을 해야 했던 연인 올가(안나 페스코바)가 기다리고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파일럿: 배틀 포 서바이벌>은 전쟁의 역사를 배경으로 삼지만 당대의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쟁터에 홀로 남겨진 인물이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마주하는 고통과 고독을 따라가는 편이다. 언제 급습할지 모를 적군과 야생동물의
[리뷰] 안전한 만큼 낯익은 길만 골라가는 경우 '파일럿: 배틀 포 서바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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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사는 정말임 여사(김영옥)는 누구에게도 말발이 뒤지지 않는 정정한 할머니다. 베개 밑에 식칼을 두고 잘 정도로 ‘옛날 사람’인 그는 외아들 종욱(김영민)과 며느리 유진(김혜나)의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 지낸다. 하지만 자신감도 잠시, 종욱이 대구에 오기로 한 날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 말임은 골절상을 입는다. 이 일로 말임은 갑자기 섬망 증세를 보이고, 그런 어머니가 걱정된 종욱은 요양보호사 미선(박성연)에게 말임을 돌보게 한다. 하지만 말임은 능청스럽고 살가운 미선이 어딘가 못마땅하다. 돈을 들여가며 집에 사람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 불편한 말임은 자꾸만 미선을 내쫓으려 한다.
박경목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인 <말임씨를 부탁해>는 여러모로 익숙한 방식의 가족 드라마다. 영화는 고령화사회에 당면한 부양과 보험 등 실질적인 문제를 짚는 한편, 미선을 통해 가족의 색다른 존재 방식도 선보인다. 집에 설치된 홈 카메라,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다단계 의료기
[리뷰] '말임씨를 부탁해' 신파의 눈물보다 능청스러운 웃음이 약이 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