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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앞에 김밥마을이란 분식집이 있었다. 8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아주 작은 집이었다. 나이 예순쯤 되는 주인 아줌마가 아침 일찍 나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큰 찜통에 멸치와 무, 파 등등을 넣어 그날 쓸 멸치국물을 끓이는 일이었다. 빈속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구수한 냄새로 허기를 자극하는 그 국물이 서울 최고의 국물이라고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그 국물로 만든 2800원짜리 잔치국수는 진정 장인의 작품이었다. 김밥마을은 대안의 식당이었다.한달 전쯤 김밥마을이 사라졌다. 망한 게 아니라 그 옆에 네배쯤 되는 큰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간판도 시골나라로 바뀌었다. 나는 그 집에 잘 가지 않는다. 아줌마는 더이상 그 국물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아구찜, 닭도리탕, 돌솥밥 같은 ‘복잡한’ 음식을 만드는 데 몰두하고 있다. 딱히 맛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그건 다른 곳에서도 먹을 수 있다. 김밥마을 시절의 그 국물이 돌아오지 않는 한 나는 앞으로도 그 집에 잘 안 가
국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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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마징가의 꿈
[정훈이 만화] 마징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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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으로 묶여지는 글들의 대부분은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가 불러일으킨 심리적 파장에 대해서 주로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많은 영화비평은 대개 영화의 구조가 아니라, 영화의 효과를 말한다. 오로지 효과만을 말할 때, 그런 비평은 한때 인상비평으로 불렸다.그런 비평이 좋은 비평이 안 되라는 법은 없다. 인상비평이란 말은 한동안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낡은 비평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됐지만, 여전히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독자에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 내가 느꼈던 것을 어떻게 이렇게 잘 집어내 정확하게 표현했을까, 하는 즐거움을 주는 글은 좋은 비평이다. 따지고보면 감상도 비평도 결국 영화와의 대화이며 궁극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결국 구조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영화들이 있다. 홍상수의 영화가 그런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대중영화들의 구조는 일정한 규칙과 관습에 따라 만들어지며, 비평이 그걸 매번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구조와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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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달마야 놀자> 도끼파, 산에 가다
[정훈이 만화] <달마야 놀자> 도끼파, 산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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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지를 들추다가 이인제씨가 god 공연장을 찾아 마이크를 잡고 “god가 세계를 제패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는 기사에 눈이 멈췄다. 그 기사의 제목은 ‘연예인을 공략하라’였다.기분이 나빴다. 뒤이은 내용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이인제 고문의 god 콘서트장 방문에 가장 놀란 곳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진영이었다. god는 이 총재가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해 ‘찜’해 놓았던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많은 배우, 가수, 개그맨의 이름과 이른바 대권후보 정치인들의 줄잇기로 채워져 있었다.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나는 이인제씨나 이회창씨가 평소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고 특정한 기호나 소신을 밝혔다는 소식을 한번도 접한 적이 없다. 국회에서 <친구> 폭력성 시비가 일었을 때, 혹은 이재수의 ‘컴배콤’ 논란이 터졌을 때 대권후보들이 어떤 소신을 밝혔다는 소식을 접한 적도 없다. 그런데 이 무슨 수작들인가.나는 대중문화를 알고 그것에 매혹된 정치인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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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명랑소녀 성공기> 명랑 운동회 소녀
[정훈이 만화] <명랑소녀 성공기> 명랑 운동회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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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린다. 정신사납다. 다 까먹었다.’이번주에 개봉하는 <촉산전>에 대한 영화평론가 박평식씨의 20자 평이다. <씨네21> 기자 가운데 다수도 비슷한 의견이다. 그런데 그런 영화를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소개하다니, 라고 의아해하실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영화세상에는 이구동성 혹은 만장일치의 호평 또는 혹평을 받는 영화도 있고, 찬반이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영화도 있다. 당연하게도, 후자에 속하는 영화들이 훨씬 흥미롭다. 발견의 기쁨을 선사하는 영화들은 바로 장점을 자기 속에 깊이 감추고 있어 쉽게 눈에 띠지 않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촉산전>을 보고난 날 밤 김봉석과 나는 서로 입에 거품을 물고 찬사를 주고 받았다. 우리 둘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던 터라 우리는 더욱 신이 났다. 영화에 대해 말하고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순간의 쾌감은 그것이 아무리 얄팍한 것이라고 해도 포기하기 힘들다.우리의 판단이 과연 절대적으로 옳은가. 그
어떤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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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남기남, 마법사 중의 돌?
[정훈이 만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남기남, 마법사 중의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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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부터 ‘이창’을 쓰기 시작한 조선희 전편집장이 항의문을 보내왔다. 16군데를 고치다니, 왜 그랬는가. 왜 ‘쥐도 개도’를 ‘개나 소나’로 고쳤는가. 그런 내용이었다. 구두점 하나도 이리 찍어보고 저리 찍어보면서 제자리를 찾아주려고 고심하는 글쟁이에게 그건 너무 정당한 항변이었다. 첫 장편을 아직 출간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제 소설가다.우리 인터넷 사이트에 <씨네21>에 실린 글 중에 어법이 맞지 않는 대목을 골라 지적한 글이 몇편 올랐다. 한사람이 썼는데, 틀린 지적이 없다. 아마 그도 소설가일지 모른다.이번호 특집 거리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든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든 박찬욱 감독은 감독이기 이전에 글쟁이였고 예리한 평론가였다. 그의 저서 <비디오드롬…>은 1990년대 초반 영화광들이 탐독한 책이었다. 지금은 감독만 한다. 박찬욱, 김지운, 민규동, 장진 감독은 글로 먹고 사는 왠만한 사람들보다 글을 더 잘 쓴다. 실제로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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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겨울연가> 혹시 내가 준상이?
[정훈이 만화] <겨울연가> 혹시 내가 준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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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년전쯤 공중파 TV로 <우묵배미의 사랑>을 다시 보다가 혼자서 한참 씩씩거렸다. 이번주 ‘내 인생의 영화’로 이 작품을 고른 김해곤씨만큼 열렬하지 않을진 몰라도, <우묵배미의 사랑>은 내 20대의 마지막 구비에서 오랜 술친구처럼 찾아와 마른 지푸라기같던 마음을 어루만져준 속깊은 영화였다.지금도 배일도와 민공례의 못나고 궁상맞은 기차여행을 떠올리면, 그 시절, 너무 젊어 피하지 못한 상처와 조로한 비겁이 놓아버린 소망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잠시 청승을 떨게 된다. 멀리 떠나와 여관방에서 공례와 처음 살을 맞댄 배일도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특히 잊을 수가 없다. 정사장면이 그렇게 슬플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고, 그 뒤론 어떤 영화의 정사장면에서도 그런 절절함을 느끼지 못했다.문제는 TV에서 방영한 <우묵배미의 사랑>엔 그 정사 장면이 삭제돼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어처구니 없고 분통 터져서 처음엔 허, 허, 하는 소리만 새나왔다. 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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