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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출장이었다. 집에서 역까지 한 시간을 가야 하고 역에서 다시 세 시간 동안 고속열차를 타야 하는, 왕복으로 여덟 시간이 드는 강연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이렇게 긴 이동 시간 동안 하염없이 한 가지 일만 할 수는 없고, 책을 한참 읽다가, 굳어가는 목을 느끼며 몸을 요상한 모양으로 비틀어 기지개를 폈다가, 태블릿 컴퓨터와 키보드를 꺼내 도각도각 일을 보다가, 시끄럽게 떠드는 옆자리 사람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말도 했다가, 집에서 챙겨온 커피도 쭉쭉 마셨다가, 최후에는 유튜브를 봤다. 유튜브 알고리즘님, 오늘 저에게 무엇을 점지해줄 것인가요.
이번에 선택된 건 머리를 쓰는 온갖 예능 프로그램의 짧은 클립들이었는데, 이건 아마도 <놀라운 토요일>을 즐겨 보는 나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인 것 같다. 엄청난 추리로 가사를 잡아내는 출연진의 활약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 방탈출 같은 퍼즐을 푸는 영상들을 거쳐 남자 연예인들이 각종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쇼에 이르러 문득 깨달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머리 쓰는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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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에 나온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V>는 외계인의 대규모 지구 방문을 다룬 이야기다. 나는 <V>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초반의 외계인 등장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도입부터가 아주 멋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전세계 각 지역에 외계인의 우주선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다들 궁금해하는 가운데, 우주선은 그냥 가만히 멈춘 채로 기다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TV 앞에 모여들어 세계 각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본다. 말하자면 뜸을 들인 것이다.
이 뜸들이는 대목의 연출은 대단히 근사했다. 일단 외계인 우주선의 모습부터가 훌륭하다. 우주선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비행접시 형태의 모양이기에 구구한 설명 없이도 쉽게 외계인 우주선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그냥 옛날 장난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만 예를
[곽재식의 오늘은 SF] 정치적인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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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합본 특대호를 만들 때면 휘몰아치는 과량의 업무에 기진맥진 넋이 나간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험난한 마감의 고개를 넘으면 금세 마음이 보름달처럼 부풀어 오른다. 한주의 고생을 평소보다 통통해진 잡지의 무게로 고스란히 느낄 땐 연휴 기간 한껏 게을러지겠다고 결심 아닌 결심을 하기도 한다. 고정 지면 ‘리스트’의 특별판쯤 되는 ‘<씨네21> 기자들이 요즘 꽂혀 있는 것들의 목록’에도 썼듯 이번 추석 연휴에는 올해의 마지막 그랜드슬램인 US오픈 테니스대회나 실컷 챙겨 볼 생각이다. 라스트 댄스를 예고한 세리나 윌리엄스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지만, 기본적으로 테니스는 본선에 오른 모든 선수가 우승 가능한, 방심할 수 없는 멘탈 경기라는 점에서 흥미롭지 않은 대진이 없다. 물론 최근 20년간은 ‘어차피 우승은 페더러/나달/조코비치’로 귀결되는 역사였지만 페더러와 조코비치가 없는 올해 US오픈 왕좌는 누구의 차지가 될지 톱시드의 활약과 언더도그의 서프라이즈를 기대하며 뉴욕과의
[이주현 편집장]추석엔 OO할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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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는 것도 직업이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남긴 글을 보고 그들의 생각을 읽어내는 ‘마인드 마이닝’을 직업으로 가진 나는, 강연자로서 ‘말하고’ 작가로서 ‘쓰는’ 것보다 ‘읽는’ 직업을 더 먼저 갖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워낙 활자 중독인데다 직업상 관점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어야 하기에 자연스레 읽을거리가 서재와 노트북에 쌓이게 된다. 공부하다 발견한 좋은 책들을 하나둘씩 주변에 알리다보니 방송이나 유튜브에 출연하면 책 추천을 해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는다. 그렇게 알린 책 중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얻은 것들이 나오자 판이 커지게 되었다. 출간 전 추천사를 써달라고 출판사들이 보내오는 책들부터, 한번 읽어보라며 보내주는 책들까지 차곡차곡 쌓여 벽면을 가득 채운 책꽂이로 어림도 없게 되었다.
그간 밀린 책을 포함해 이번주에만 7권의 추천사를 출판사에 보냈다. 대부분 인간 삶의 이해를 데이터로 풀어낸 책들이었는데, 추천사를 써야 하니 반강제적으로 주제 중심
[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읽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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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중에 티셔츠를 가장 좋아한다. “평소에 거의 기념 티셔츠만 입고 다닌다”라고 언급한 밴드 멤버들의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기념 티셔츠가 많다. 그것도 사실 최근에는 많이 절제해서 구입하지 않으려 한 결과지만. 예전에는 습관처럼 뭐 어디 재미있는 티셔츠 없나 하고 검색해보던 때도 있었다. 이렇게 입고 다니던 옷들은 어느 정도 입고 나면 명예의 전당으로 들어가서 더이상 손상이 되지 않게 보관하기도 하고(90년대 기업 로고를 얼굴 모양으로 재해석한 티셔츠, 헬카페 헌정 티셔츠 등), 일부는 자연스럽게 운동복이나 작업복으로 그리고 오랜만에 들른 부모님 댁의 상비용 잠옷으로 변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다시 구하기 힘들 것 같은 티셔츠(그리고 마음에 들어서 예쁘게 잘 입었던 티셔츠)는 따로 보관하는 편이지만 왠지 자주 입는 티셔츠가 사실은 내가 가장 오래 입는 옷이라는 사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내 삶의 본질은 순간에 있기보다는 일상에 있는 게 아닐까, 그러면 목이 늘어지더라도 좋아하
[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티셔츠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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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얼굴 뵙고 인사드리네요.” “저희 구면이에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인사드렸었는데… 괜찮습니다. 많이들 절 못 알아보더라고요.” A평론가에게 실례를 했다. 그는 이번주 <놉>의 크리틱에서 “인간의 눈은 기계의 눈보다 신뢰성이 낮다”고 썼는데, 나의 눈도 그리고 기억도 멋대로의 생략에 신뢰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A평론가 옆에 앉은 B평론가와는 연락만 주고받았지 정말로 초면이었다. 타 지역에서 일하다 올해 서울로 근무지를 옮긴 B평론가는 직장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욕적으로 영화관과 OTT를 누비고 있었다. <헤어질 결심>을 5~6번쯤 보았고 각본집까지 반복해 읽었다는 그는 정작 <헤어질 결심>으로는 비평을 쓰지 않았다. B평론가의 노트북에는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미완의 글들이 상당수 저장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올해 군대를 가게 되면 평론 활동을 잠정 은퇴해야 할 것 같다는 C평론가, 요즘 글이 잘 안 써진다는 D평론가, 20자평 쓰는 게 참
[이주현 편집장] 영화가 있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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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자신이 졸업한 학교를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현재 재학생 수를 보면 저출생, 고령화 추세를 실감할 수 있다는 글이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었다. 나도 내가 졸업한 중학교를 검색해보았다. 나의 모교는 경상남도 소도시 외곽에 있던 여자중학교로, 90년대 후반 당시 한반에 50여명을 꽉 채워 학년당 13학급이었다. 어림잡아 역산해보면 당시 전교생이 2천명 정도였다. 검색 결과 나오는 지금 전교생은 110명이었다. 학년당 2학급, 30명 내외. 2학년은 30명도 되지 않았다. 2천명이 110명이 되다니! 정말, 인구 감소를 실감하게 하는 숫자였다.
지난해 한국의 전체 합계출생률은 0.81, 서울 지역 출생률은 0.64였다. 저출생, 고령화와 그에 따른 사회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정책이 시도된 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출생률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2020년부터는 평균수명 연장에 따른 사망률 감소 효과보다 출생률 저하의 효과가 더 커서, 처음으로 인구의 자연감소 현상도 발생했
[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차별과 배제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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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는 주기적으로 특강을 열었다. 작가, 배우, 가수, 방송인 등 각계의 유명인사들이 초청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꽤 운 좋은 경험이었다. 한번은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 저자인 일본의 유명 작가 나카타니 아키히로가 초대됐다. 정신이 산만했던 내가 그날따라 통역사까지 붙은 강연을 집중해서 들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어쩌면 흔한 자기계발서에 나올 법한 내용이었겠지만 나처럼 어린 친구들의 사고를 확장해줄 만한 조언들도 분명 있었다. 예를 들어 ‘노래를 감상할 때 악기 하나하나를 따로 반복해서 들어보라’는 팁은 훗날 음악을 하게 될 나에게 나름 실용적인 원 포인트 레슨이었다. 또 하나 뇌리에 박혔던 이야기는 ‘매일 영화를 세편씩 보라’는 말이었다. 창작자로서 시야를 넓혀준다는 맥락의 조언이었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당시 나와 친구들은 강연 이후 한동안 그 말에 꽂혀 있었는데 정말로 하루에 영화 세편씩 보기 프로젝트를 강행했다. 그것은 마
[딥플로우의 딥포커스] ‘트레이닝 데이’가 힙합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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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를 연달아 보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고, 실제로 두 영화를 비교한 글도 이곳저곳에 이미 많이 올라와 있겠지만, 나는 <헤어질 결심>과 <현기증>이 닮은 점이 많은 영화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현기증>은 널리 걸작으로 평가받는 1958년작 미국영화로 형사 역할을 하는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몰래 감시하다가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는 내용을 다룬다. 여기까지만 해도 바로 보이듯이 <현기증>과 <헤어질 결심>은 이야기의 기본 구도가 같다. 관객이 비교적 그 심경을 쉽게 알 수 있는 남자주인공이 수수께끼가 많은 여자주인공의 진실을 서서히 파헤쳐나간다는 줄거리 흐름도 같다. 이야기 중반에 남녀주인공이 못 만나게 되는 전환점이 있다는 점도 같고, 하다 못해 범죄영화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면서도 동시에 뛰어난 개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유명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점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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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오늘은 SF] 마침내 빽 투 더 퓨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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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이번주 종영했다. 드라마가 슬슬 입소문을 타고 매화 시청률이 배로 뛰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고래 이야기를 하고 회전문과 김밥 이야기를 하고 우영우식 인사법을 귀엽게 모방할 때에도 나는 실눈을 뜨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드라마를 정주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며 작품의 진심을 의심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가 주인공’이라는 설정에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남다른 재능을 가진 자폐인 캐릭터를 귀엽고 사랑스럽게 포장하는 것은 뻔하고 얄팍한 수법인 데다 오히려 극소수의 천재 자폐인을 특별한 존재로 대상화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더불어 비장애인 배우의 장애인 연기를 불안하게 지켜볼 때가 많은데 어설픈 재현과 과장된 표현은 그 자체로 희화화의 위험을 안고 있다.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장애인 캐릭터는 연민의 대상이거나 현실과 유리된 판타지한 존재로 편협하게 묘사되는 경우도 많아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이주현 편집장] ‘안돼’라고 말하지 않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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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기자의 SNS에서 “나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문장을 처음 보았다. 웃기기도 했지만, 충격적이기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기도문 영문을 찾아봤다. “but deliver us from evil”, 여기에서 말하는 ‘악’이 ‘evil’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원래의 문장은 ‘우리’, 복수로 되어 있지만 ‘but’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서 들어간 ‘다만’을 ‘나만’으로 전환하면서 기도의 대상이 단수가 되었다. 언어유희로는 최고의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다’라는 글자 하나를 ‘나’로 바꾸면서 이렇게 기가 막힌 구조적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니! 아마 다른 언어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일일 것 같다. 그렇지만 사실 “나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 문장이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 중 하나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원래 제목은 “the tyranny of merit”이다. 메리토크라시라는 단어는 많은 철학 용어가 그렇듯이, 정말
[우석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나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런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