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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하며 상반된 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충실히 거장의 경전 구절에 복무한다. 그래서 모호하다. 음악 팬들은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는 25살 레너드 번스타인(브래들리 쿠퍼)의 모습에 가슴이 뛰다가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브로드웨이 하이라이트와 베를린장벽 붕괴 기념 음악회 등 중요한 순간이 축소된 영화를 당황스럽게 바라본다. 번스타인이 1973년 케임브리지 일리 대성당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말러 교향곡 2장 롱테이크 신 정도를 제외하면 클래식 애호가들의 구미를 당기는 장면은 거의 없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연극 혹은 뮤지컬처럼 느껴진다. 극의 주인공은 번스타인 혼자가 아니다. 번스타인과 그의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캐리 멀리건)의 부부 관계가 핵심이다. 매튜 리바티크가 촬영하고 미셸 테소로가 편집한
[비평] 거장의 어깨 옆에서,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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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상업영화라도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취하는 영화는 과거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형식적 고민 없이 성립되기 어렵다. 대다수의 상업영화에서 그러한 형식은 주로 이야기의 시점을 표명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역사가 소시민의 일상을 통해 비치는지, 의사 결정권을 가진 자들의 권력 다툼으로 묘사되는지, 혹은 시민과 공권력의 부딪힘을 통해 촉발되는 이야기인지에 따라 영화가 수행하는 재현에 대한 충실도가 달라진다. 물론 여기 언급한 사례들이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영화가 구할 수 있는 시점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역사와 픽션을 접속시키는 데 필요한 형식적 절차에 대한 고민을 서사적 시점의 문제로 치환하는 경향이 있고, 영화의 초반부에 결정된 시점은 관객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이태신과 전두광
<서울의 봄>은 명백히 두 번째 사례에 해당한다. 즉, 정권을 둘러싼 군대 조직 내부의 권력 다툼과 파열을 충실히 중계하는 영화다. 영화
[비평] 사유하지 않는 시대의 징후 - <서울의 봄>이 요청하는 관습적 보기를 의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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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큰따옴표 안에 있는 말은 모두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의 대사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글을 마감하고 있는 12월19일, 오늘자 일간지를 펼친다. 북한은 고체연료 ICBM을 또 쐈다. 한미 핵작전 훈련 예고와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부산항 입항에 따른 리액션 성격이다. 남북간 힘겨루기는 냉전에서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태세로까지 치닫고 있다. 강대강 구도는 일단 시작되면 어느 한쪽에서 그만두고 싶어도 멈추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진짜 위기는 “이 모든 걸 조종하는 자가 없다는 것”일지 모른다. 많은 경우 재난은 집단의 산물이다. 통제 없는 강대강 구도는 미시 세계에서도 펼쳐진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종류도 다양한 인플루엔자 유행에 이어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이 창궐했다. 코로나19 이후 항생제 투약 급증에 따라 슈퍼박테리아가 내성을 키운 탓이라는 분석이다.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항생제는 “옳은 일이니까” 처방했겠지만 “결국 우리
[비평] 재난사회와 그 적들,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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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이랜드>는 하이더르(알리 준조)가 유령 역할을 맡아 흰 천을 뒤집어쓴 채 조카들과 유령놀이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소 범박하지만 흰 천에서 영화관의 스크린을 떠올려볼 수 있다면, (극)영화 또한 배우들에게 개별 역할을 부여하여 작동되는 일종의 역할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이랜드> 속 인물들은 그 어떤 극의 배우들보다도 더 엄격한 사회적, 가족적, 관습적 역할극에 복무해야 하는 처지다. 문제는 그 역할극이 지극히 경직된 채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화면비가 강조하듯 그들은 억압과 속박, 구속과 굴레로 유지되는 역할극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파키스탄 아만(살만 파르자다) 집안의 차남 하이더르는 어느 날 백업 댄서 일자리를 얻는다. 미용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열정과 자부심을 지닌 하이더르의 아내 뭄타즈(라스티 파루프)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취업 선언과 함께 강제로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때 뭄타즈의
[비평] 속박의 역할극이 막을 내리면, ‘조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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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엔딩 장면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에세이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읽은 한 문장이 떠올랐다. 그는 <하나>의 각본 초고에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한다”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두 소년이 활짝 웃으며 내달리는 모습이 ‘풍성한 삶’ 그 자체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두 소년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벅차오를 수 있다니, 참 신기한 경험 아닌가. 두 소년은 어떻게 이 풍성한 삶 속으로 풍덩 하고 빠져들 수 있었을까? 그 수많은 괴물들을 물리치고 말이다.
괴물이라는 재난, 재난이라는 괴물
화재와 함께 시작하는 <괴물>은 불타는 건물 위로 ‘괴물’이라는 영화 타이틀을 새긴다.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는 동일한 사건이 각 인물의 시점으로 되돌아왔음을 알리는 하나의 지표다. 그리고 각 인물의 관점에서 진행된 동일한 사건의 끝을 알리는 태풍이라는 재난이 또 하나의 지표로 자리한
[비평] 마음의 재난에서 벗어난 풍성한 삶,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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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프레디의 피자가게>는 11월15일 개봉 이후 현재(11월21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일 관객수 1위를 이어가며 약 37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물론 최근 극장가가 침체에 빠진 상황인 만큼 절대 수치는 높지 않다. 다만 <씨네21> 1432호 기획 기사 ‘마블은 길을 잃었나’가 확인해주었듯 <더 마블스>가 맥을 못 추는 건 이해가 가는 구석이 있는 것과 달리, 절대적 인지도가 부족한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흥행 1위를 이어가는 현상은 분명 주목을 요한다. 이건 북미에서 더욱 눈에 띄는 상황으로 영화는 10월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1위는 물론 제작사 블룸하우스 역대 오프닝 1위를 기록했다. <더 마블스>가 흥행 부진에 빠진 것도 비슷한 양상이다. 이쯤에서 궁금하다. 대체 이 작품의 무엇이 까다로워진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었을까.
게임이 영화가 된다는 건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건 게임을
[비평] 영화 위에 관객, 김성찬 평론가의 <프레디의 피자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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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에 관한 호평은 대부분 이 영화가 수행하는 애도의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4·16 세월호 참사를 다루면서 착취적 묘사를 배제하고 섬세하고 시적인 터치로 두 인물의 되돌릴 수 없는 하루를 그려냈다는 견해가 자주 보인다. <너와 나>를 환대하는 이런 평가의 언어는 영화의 연출자인 조현철이 반복해서 언급한 “참사를 영화적 스펙터클로 이용하는 데 윤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는 말과 맞물리며 영화가 선택한 은유적이고 우회적인 구조를 정당화한다. 나는 조현철이 꺼내든 그 말의 진심을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이 무엇도 설명하지 않는 공허한 진술이며, 다소 과격하게 반문하자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정작 영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그는 ‘영화적 스펙터클’이 무엇인지도, ‘윤리적 거부감’이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 관한 적잖은 비평은 이와 같은 연출자의 ‘의도’를 의심 없이 받아들여, 영화가 성취했다고 가장한
[비평] <너와 나>와 한국 독립영화라는 문제, <너와 나>, <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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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얼마나 인상적인지와는 별개로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노래는 대부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노래는 호흡을 가다듬는 휴지부이거나 공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치트키이거나 팬서비스다. 노래가 중심이 되는 뮤지컬 영화라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래는 서사나 감정의 보충재이거나 관객에게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백에 가까운 혼잣말이다. 혹은 단체 군무를 위해 마련된 반주곡이다. 어느 쪽이든 감정전달이나 분위기 환기를 위한 친근한 매개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논의할 영화 속 인물들이 노래하는 장면 역시 크게는 영화 속 다른 노래 장면과 비슷한 한계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분명 이들 영화에서 노래가 기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과잉의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그저 인상적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힘든 끈적함을 남긴다.
<키리에의 노래>는 버스킹하는 키리에의 노래를 영화 상영 환경에 맞춰 정제하기를 거절하고 현장음에 가까운 사운드로 들려준다. 이는 관객을 현장에
[비평]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앵그리 애니> <키리에의 노래>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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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진행한 ‘독립영화 쇼케이스’에 비평으로 참여한 나는 <괴인> 안에 한국영화 속 인물들이 관류한다고 평하며 명장들의 영화와 연결지었다. 특히 이창동의 <버닝>과 봉준호의 <기생충>을 결합한 형태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유는 인물 구성과 특정 세대의 감각 그리고 건축의 형태와 계급성이 <괴인>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웃음을 유발하는 특정 상황과 대화에서 홍상수의 영화 같다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는데 이후에 <괴인>에 대해 곱씹을수록 그 인상은 사라졌고 구체적으로 단 하나의 작품만이 떠올랐다. 그것은 홍상수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다. 따라서 <괴인>을 두고 “계보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영화”라고 평한 것은 반 정도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계보학적으로 추적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눈에 띄지 않는 새로운 영화다.
불안이 건져올린 비일상성
다
[비평] ‘괴인’에 녹아든 시대 감각, <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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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후반부, 나츠코를 찾아 탑 안의 세계로 떠나온 마히토는 마침내 히미의 도움을 받아 나츠코가 잠들어 있는 산실에 도착한다. 마히토는 나츠코를 깨워 데려가려 하지만 눈을 엘 듯 춤을 추는 종잇조각이 둘의 접촉을 가로막고, “나츠코 엄마!”라고 외친 마히토는 의식을 잃는다. 종잇조각의 우윳빛 색감이 산실의 적막한 어둠과 대조를 이루는 이 장면은, 마히토가 전쟁의 화마 속에서 어머니를 상실하던 도입부의 장면과 포개어지며 시적 서정을 새기고 간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런데, 작화의 매혹을 잠시 차치하고 곱씹어본다면 이 장면의 감흥은 얼마간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 마히토는 이세계에 잠입하기 전까지 별다른 접점도 없던 나츠코를 왜 돌연 엄마라고 부르는 걸까? 마찬가지 이유로 마히토에게 별 감정이 없을 나츠코는 왜 그의 애절한 외침에 “너 같은 건 정말 싫어!”라고 쏘아붙이는 걸까? 마히토가 탑에 잠입하기 전까지인 1부의 세계에서 가족이라고 말하기
[비평] 미야자키 하야오의 우정, 그리고 식탁의 소멸에 관하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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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단짝은 매일 함께 16번 시내버스에 탔다. 이어폰 한쪽씩을 나눠 끼고 피노키오의 노래 <사랑과 우정 사이>를 듣곤 했다.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그날도 함께 등교하던 중이었다. 잠깐, 오늘 미술 시간 있는데, 스케치북을 놓고 왔어. 친구를 버스에 먼저 태워보내고 준비물을 챙겨 허둥지둥 택시를 잡아탔다. 하지만 매일 오가던 한강 다리는 더이상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아니었다. 수진은 그렇게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은 채 세상에 남았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를 소재로 한 정윤철 감독의 단편 <기념촬영> 이야기다. 수진이 살아남은 건 스케치북을 깜빡했다는 이유뿐이었다. 올림픽을 치르느라 무리한 기간에 완공된 성수대교는 강남 팽창에 따른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더디고 오랜 조사 끝에 당국이 밝혔다. 처벌은 공사 실무자에게만 내려졌다. 그로부터 20년 뒤. 멈추지 않은 어른들의 탐욕은 진도 앞바다에서 30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2023년
[비평] 참사의 시간, 영화의 시간, ‘너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