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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꽤나 근사하게 만들어진 한국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주된 긍정적 평가는 영화가 깔끔하다는 것이다. 스릴러, 공포, 오컬트, 코미디와 같은 장르의 클리셰를 활용하면서도 지저분하게 뒤섞지 않았다는 것은 영화의 성취를 설명하는 정확한 진술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는 것만큼이나 의심에 말을 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비록 그 절차가 다소 부정확한 단언과 과장을 동원한다 해도 말이다. 더군다나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볼 때 좀처럼 서스펜스의 안쪽으로 빠져들지 못하는 편이다. <잠>이 몰입의 충실함을 관객의 역량으로 불러들이는 영화라면, 나는 전적으로 실패한 관객이다.
밀고 당기는 스펙터클의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떠올린 것은 영화와는 다소 무관한 징후들이었다. 신혼부부의 불안과 몽유병이라는 불확정적 상태의 중첩으로 극을 이끌던 스릴러가 빙의, 무속과 같은 요소들을 불러들일 때, 장르를 확장하고 변주하는 개성만큼이나 영화가 기어코 한국형 오컬트라는 장내에서 호명되
[비평] 잠과 청결,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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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어파이어>의 후반부,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출판사 대표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의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온 나디아(파울라 베어)는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에게 외친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보여?” 몸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말하던 헬무트가 사실은 암 환자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떠나가는 나디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온은 두눈을 감싸고 탄식한다. 되짚어보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운전 중인 펠릭스(랭스턴 위벨)가 자동차 고장을 감지하며 비슷한 말을 건넸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그러나 창밖을 향해 눈을 감고 있던 레온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는 세계를 보고 듣지 않는다.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어파이어>를 휴가의 영화라고 말한다. 물론 이 영화는 여름휴가를 보내는 네 남녀의 우연적인 만남을 다루고 있으며, 그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과
[비평] 주인 없는 영화, ‘어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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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이치로의 소설 <한 남자>를 읽고 남긴 독서 메모를 보니, “다소 설명적이고 논평적”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 때문이었을까? 이시카와 게이 감독의 <한 남자>는 소설과 전혀 다른 질감의 영화로 다가왔다. 원작 소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소설의 사변적 설명을 이토록 매력적인 ‘영화적 행간’으로 연출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비 오는 오후 문구점의 리에(안도 사쿠라)의 눈물, 낯선 손님의 등장과 멈추는 눈물, 그리고 정전으로 리에의 마음만큼이나 어두워진 문구점을 환히 밝혀주던 불빛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실질적인) 첫 장면을 떠올려보라. 이 장면만으로도 이시카와 게이가 소설의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적으로 압축하고, 형태 변환하는지 느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낙인 찍힌 자들의 뒷모습
‘타니구치 다이스케’라는 이름이 죽은 남편(구보타 마사타카)의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부인과 시아주버님(인 줄 알았건
[비평] ‘한 남자’,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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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불가능에 도전한다. 영화는 스탈린의 ‘피의 대숙청’ 시기라 불리는 1938년을 배경으로 한다. 반역 세력을 색출해 처형하는 일을 진행하는 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NKVD) 소속 볼코노고프 대위(유리 보리소프)는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피해자 유가족들을 방문한다. 가해자인 그가 과연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영화는 볼코노고프의 발걸음을 통해 아직도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스탈린 시대의 감춰진 역사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선다. 나탈리야 메르쿨로바, 알렉세이 추포프 부부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역사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을 차용한 ‘환상적 우화’에 가깝다고설명한다. 때론 완벽한 고증을 거친 역사적 재현보다 우화적 재현이 역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틈새를 만든다.
도망에서 구원으로
영화에 이러한 틈새를 만드는 두번의 추락이 있다. 볼코노고프는 출근길에 직속상관인 그보즈데프 소령(알렉산드르 야첸코)의
[비평] 두번의 추락에 대하여,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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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에서 참기 힘든 순간은 극 중 유튜버나 BJ의 방송 장면이 등장할 때다. 인터넷 개인 방송이나 광고 영상은 보고 싶지 않을 경우 스킵하거나 음소거 버튼을 누를 수 있지만, 작품에 삽입된 방송 장면은 서사 전개에서 결정적인 정보를 노출할 때가 많기에 관람을 포기할 작정이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참고 넘기기 마련이다. 개인 방송 장면에서 느낀 곤란함은 파운드푸티지 방식의 장르영화를 볼 때와 유사한, 강조된 리얼리티에 의한 곤란함이다. 리얼함을 겨냥하는 장르 안에서 사실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오히려 사실성과 멀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드라마 <마스크걸>의 주인공 김모미(이한별)는 밤에는 ‘마스크걸’이라는 이름의 BJ로 이중생활을 하는 회사원이다. 검은 머리에 무채색 정장 차림의 모미는 퇴근 이후에는 두눈을 제외하고 온 얼굴을 덮는 반짝이는 마스크에 밝은색 가발을 쓰고,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강조되는 짧은 원피스를 입은 마스크걸이 된다. 그는 손담비의 <
[비평] 이미지 시대의 복화술, ‘마스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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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게 시련을 안기면 드라마가 되고 집단에 재앙을 내리면 재난영화가 된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인물에게 위기를 주어 그들의 선택을 지켜보게 하는 동안에 어떤 카메라는 그 얼굴을 주시한다. 두편의 한국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보호자>를 연이어 보고 하나의 글에서 다루기로 한 이유는 많은 점이 상이한 두 영화에서 도드라진 공통점으로 얼굴의 클로즈업을 보았기 때문이다. 분절된 신체 이미지에서 시작된 얼굴의 클로즈업은 현대 상업영화에서는 또 다른 영화적 장소로서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기보다는 얼굴의 향연에 가깝게 전시되는 듯하다. 상업영화에 스타의 얼굴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얼굴의 클로즈업이 그저 영화의 부품처럼 장면의 최소 단위 기능만 수행하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은 아쉬운 현실이다. 반대 지점에서 접근한다면 근접한 얼굴숏은 어떤 기능만큼은 충실하게 이행한다는 것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호자>에서는 무엇과의 사이를 벌
[비평] 카메라 너머의 얼굴들, ‘보호자’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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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정치가 없다. 그래서 정치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명화(박보영)가 묻는다. “여기 살아도 돼요?” 이 공간에서 거주해도 되냐,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어도 괜찮냐는 이중의 의미를 실은 질문에 누군가 답한다. “살아 있으면 그냥 사는 거지. 뭘 물어.” 명화는 사는 데 필요한 건 자격과 조건이 아니라는 선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흰 쌀밥을 꼭 움켜쥔다. 마치 종교화처럼 쉽고 간명한 상징과 우화의 이미지. 중세 암흑시대 교회 프레스코화에 가까운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메시지. 정정해야겠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정치가 없는 게 아니라 메시지 전달에 실패한다. 이어 그 실패의 자리에 어떤 호소보다 강력한 동일시가 이뤄진다. 다름 아닌 영탁(이병헌)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통해서 말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굴리는 시뮬레이션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에서 또 다른 유토피아로 이동하는 이야기다.
[비평] ‘콘크리트 유토피아’, 우리는 영탁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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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이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나 지지부진한 이유는 영화를 감싼 가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 뉘앙스 때문이다. 실제로 비판이 무색할 정도로 거친 보수적 정서가 영화를 두르고 있다. 이 영화를 ‘국뽕영화’라고 정리하고 넘어가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한데 <더 문>은 거시적 이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모호한 균열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 균열이 이 작품을 재평가받게 할 요소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균열을 살펴봄으로써 동시대 이미지에 관한 몇 가지 논점을 환기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더 문>의 흥행 실패가 의미심장한 이유는 더이상 국가주의가 흥행 코드로서도 유효하게 수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텐트폴 영화의 국가지상주의는 호소력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김병규 평론가는 2010년대를 건너오며 한국영화에서 법정과 같은 국민 통합의 장소(<변호인> <아이 캔 스피크>)가 소멸하고, 법 바깥의 폐허가 무대화
[비평] ‘더 문’의 빈틈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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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의 주인공은 구산영(김태리)이다. 그는 가장 많은 러닝타임을 부여받으며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 산영이 과연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산영이 가난에서 자유로워지고 싶고,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으며,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산영의 어릴 적 꿈은 뭐였는지, 그가 즐겨 듣는 음악은 뭔지, 유산을 물려받은 지금은 뭘 하고 싶은지 같은 건 알지 못한다.
사정은 함께 극을 이끌고 가는 염해상(오정세)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어머니(박효주)를 악귀의 손에 잃은 뒤부터 계속 귓것들을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다는 사실, 그래서 악귀를 쫓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외의 욕망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산영과 해상 모두 12회 내내 ‘악귀를 잡아서 봉인하고 주변 사람들을 지킨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하
[비평] 구조를 겨냥했으나 해결하고자 하지 않는, ‘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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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애플이 혼합현실 헤드셋 ‘비전프로’를 발표하자 삼성전자의 한 내부 관계자는 동료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정도 기술은 우리에게도 있어요. 아직 제품 출시를 안 했을 뿐이죠.” 애플의 신제품이 그다지 혁신적인 물건은 못 된다는 투였다. 그렇다면 애플과 삼성의 차이는 뭘까. 간단하다. 애플은 했고 삼성은 못했다는 거다. 비전프로는 애플이 개인 컴퓨팅 환경의 미래를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담은 제품이다. 머리에 쓰면 최대 30m 크기의 가상 화면에 입체영상과 증강현실, 상호 반응 콘텐츠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글을 쓴 채로 주변 사람이나 사물을 볼 수 있고 우주 한복판이든 숲속 호숫가든 가상의 이용자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다. 기존의 헤드셋 기기들과는 몰입감에서 다른 단계로 나아갔다는 게 체험자들의 전언이다. 내가 주목한 이 기기의 특징은 보다 사소한(?) 데 있다. 비전프로는 사용자의 시선을 추적해 앱을 선택하고 이를 맨손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향후 고글
[비평] 할리우드 팔로워, ‘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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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한국, 홍콩, 일본의 영화를 일별하는 순간 드는 의문 하나. 왜 이토록 많은 신체장애인들이 등장하고 있는가?”
- 이영재, <아시아적 신체>
“‘한국’ 액션영화들은 (이미 서구 액션이 일본의 문맥에 맞추어 번역된) 일본 활극과 ‘제임스 본드’ 시리즈, 홍콩 액션들로 붐비는 문화 횡단의 콘택트 존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식민, 반(半)식민, 그리고 포스트 식민의 콘택트들이 만들어낸 복합적 형상이다.”
- 김소영, <근대의 원초경>
류승완의 <밀수>는 불구가 된 몸들로 가득하다. 해녀들을 이끄는 선장인 진숙 아버지(최종원)의 한쪽 다리가 그물에 묶인 채 어선에 빨려 들어가 죽는 사고를 기점으로 이 영화의 화면에는 다양한 신체장애의 형상이 침입하기 시작한다. 오른팔에 갈고리를 의수로 단 장도리의 졸개, 한쪽 눈에 안대를 쓴 권 상사의 부하,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잃은 억척이 부부에 이르기까지…. <밀수>가 그려낸 70
[비평] ‘밀수’의 잘려나간 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