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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필요>. 자꾸 다시 읽어보게 된다. 어쩌면 의도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필요’도 사실 어색하다. ‘요구’가 좀더 어울리지만 가장 적당한 건 영어 단어 ‘니즈’(Needs)다. 어느새 한글보다 익숙한 이 외래어에서 프랑스 대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모습이 엿보인다. 영화 속 그녀의 모습에 대다수의 관객은 아낌없는 환대를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어색함을 남긴다. 모종의 이질감이 <여행자의 필요>가 지닌 감각의 덩어리다. 홍상수 감독은 근린공원을 비롯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흔해 빠진 풍경 속에 이방인 이자벨 위페르를 배치하고 익숙지 않은 감정 들을 끌어올린다. 그의 방식은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 이리스의 프랑스어 수업 방식과 흡사하다. 그녀의 수업은 수강생에게 상처를 내는 방식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첫 번째 수업에 등장한다.
수강생(김승윤)은 손에 났던 상처에 새살이 돋은 것을 이리스에게 말한다. 얼핏 보면 잉여
[비평] 소통의 과정, 소통의 방식, '여행자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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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턴트맨>의 기본 설정은 따지고 보면 말이 안 된다. 대역 배우 혹은 무명 배우가 스타를 질투하는 이야기는 별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만, 대역 배우를 질투한 스타라니. 캐스팅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설정은 육체의 우위를 은밀하게 복권하는 데가 있다. 위험한 액션을 소화하는 신체 능력의 강조는 ‘몸’에 관한 전반적인 관심이 상승한 문화적 배경과 연결할 수 있다. 시기마다 몸은 새로운 의제를 떠안는데, 오늘날 몸은 진정성에 관한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호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는 것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수록 ‘진짜’에 관한 요구와 가치는 더불어 상승했다. 이에 따라 이미지, 특히 몸의 이미지는 그에 걸맞은 능력을 증명하도록 요구받는다. 가령 ‘완벽한 피지컬을 찾는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성별, 나이를 초월한 신체 대결을 펼치는 예능프로그램 <피지컬: 100>은 지구력을 갖췄을 것으로 보이는 단
[비평] 몸이라 쓰고 진정성이라 읽는다, '스턴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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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나는 한 대입 학원에서 자율학습을 감독하는 일을 했다. 한국 입시 산업의 핵심에 위치한 그곳에서 나는 매시간 학생들의 핸드폰 제출 여부를 체크했고, 학생이 자습실에서 졸거나 인터넷강의 이외의 용도로 태블릿을 사용하면 경고 조치를 취했다. 그곳은 남녀의 자습실이 구분된 것은 물론 식당에서도 이성간의 대화를 방지하도록 구역이 분할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공부를 제외한 일체의 교류가 금기시된 그곳의 매뉴얼을 학생들이 반기는 것은 물론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부담 또한 내게 위탁된다는 점이었다. 가령 자습실에서 대화가 금지돼 있으므로 학생들은 옆자리 학생이 소음을 내도 직접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는 대신, 내게 주의를 주라고 요청했다. 그외의 상황에서도 학생은 오직 공부에 충실한다는 자기계발의 윤리를 체화한 채 여타의 모든 사회적 관계가 유발하는 부담과 책임으로부터 면책됐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 <모르는 이야기>를 논하는 지면을 다소 뜬
[비평] 지킬 건 환상만 남은 세대의 반짝이는 비명, <모르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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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에서 몇 차례 언급했듯 ‘매끄러움’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상징적 현상이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전세계 시민들을 동일한 인터페이스로 끌어들인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수십억 인구의 손가락이 비슷비슷하게 움직인다. 전세계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글로벌 기업의 설계는 매끈한 사용자 경험을 향해 최적화한다. 손가락 밑 터치스크린 기기들의 모양새는 비슷해지다 못해 제조사를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피처폰은 물론 스마트폰 초기 시절만 해도 제각각이던 휴대전화기 디자인은 매끄러움의 극단으로 수렴하고 있다. 세계 어느 도시에 가든 글로벌 직영 커피숍과 프랜차이즈 매장이 늘고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가게 분위기나 음식 맛을 탐색할 필요는 없다. 거침없이 입장해 스스럼없이 주문하면 예상된 서비스가 제공된다. 매끈해져가는 이용자 패턴 앞에서 국경도, 문화도, 개인의 특성도 경계를 지운다. 매끈함은 시각·촉각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 환경이 강제하
[비평] 매끈한 것들, ‘<범죄도시> 현상’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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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매체와 포맷이 범람하는 시대에 과연 우리는 이미지를 감각하고 있는가. ‘박홍열의 촬영 미학: 물질로 영화 읽기’는 서사에 가려 보이지 않는 영화 속 물질들로 영화 읽기를 시도한다. 빛, 색, 질감, 렌즈 등 촬영 도구들로 영화를 감각하며, 이미지를 감각하기 위해선 응시와 관조의 시간이 필요하다. 서사와 담론을 벗어난 이미지들 사이에서 영화 속 무수한 물질들이 만들어가는 또 다른 의미들의 세계를 만나본다.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는 롱테이크가 많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롱테이크는 기존 영화와 다른 위치에 있다. 이 영화의 많은 롱테이크 화면은 이미지를 수축된 습관으로 만들고 그 습관들을 배반하기 위한 기제로서 작용한다. 카메라의 지각으로서만 포착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롱테이크로 보여주고, 한컷 안에 낯섦과 익숙해지는 낯섦을 다시 낯설게 하기 위해 렌즈의 광학적 성질을 활용한다. 컷과 컷을 광각렌즈와 망원렌즈의 물리적 성질과 컷의 길이로 충돌시킨다. 대상을
[박홍열의 촬영 미학: 물질로 영화 읽기] 카메라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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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의 한 장면, 마야와 아사코는 사진전에 입장하려 하지만 전시회 직원은 입장이 마감됐다며 저지한다. 마야는 아직 전시 시간이 남았다며 따지고, 직원은 규정을 들먹이며 실랑이가 오간다. 그 순간 료헤이가 끼어든다. “앗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희 이 전시 보려고 교토에서 왔거든요. 일찍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고속버스라는 게 늦을 때도 있잖아요. 부탁드립니다! 자 너희도 공손히 부탁드려!” 일행이 고개를 90도로 숙이면, 다음 장면에서 그들은 전시회장에 입장해 있다. 서사적으로 사소하지만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사람에 대한 기대와 명랑한 적극성을 잃지 않는 저런 태도를 현실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봤더라? 경직된 관료적 형식주의에 속박된 우리는 내심 저런 순간을 염원해왔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인간적 존엄성을 발휘하는 용기 있는 순간들. 지난 몇년간 하마구치의 영화가 열광적 호응을 얻은 현상은 이런 순간이 알알이 맺혀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평] 윤리를 넘어 기교의 영역에 도달한 자기객관화 능력,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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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긋나는 지점, 그러니까 일반적인 영화라면 동기화된 내러티브에 매끄럽게 통합되어 있을 것들이 서로 어긋나는 순간을 의도적으로 돌출시킨다. 카메라는 자의식적으로 움직이다 멈추고, 음악이 갑작스럽게 중단된 자리를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대신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중지된 듯한 순간이 관객의 감각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절하고 충돌하는 것들이 하나의 작품 안에 공존할 때 빚어내는 미학적 매력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미학적 시도가 음악감독 이시바시 에이코의 라이브 공연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기획된 영화라는 태생적 특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또는 균형을 유지하는가)하는가, 라는 영화의 주제를 돌출시키는 방식과 공명한다는 점이다.
이음매, 매끄럽지 않은 표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단절되어 있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돌출시킨다.
[비평] 미학적 형식과 영화적 주제가 공명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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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의 무덤에서 훔친 여신상에 대한 경매가 진행되고 있던 스파르타코(알바 로르바케르)의 배에서 아르투(조시 오코너)는 여신상의 해체된 머리 부분을 갑작스럽게 바다로 던져버린다. “살아 있는 자들이 보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탈리아(카롤 두아르트)의 말을 실현시키듯 두상은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의 시야로부터 멀어지면서 바다로 잠긴다. 밑바닥에 닿은 두상이 흙먼지를 일으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거기에 몽타주되는 것은 베니아미나(일레 야라 비아넬로)의 얼굴 클로즈업이다.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것은 또한 에우리디케의 얼굴이었을까. 하데스로부터 에우리디케를 돌려받기 위한 여행이 끝나갈 무렵 오르페우스는 주어진 규칙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다. 로마의 시인들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또는 그를 둘러싼 죽음에 압도되어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시인 체사레 파베세는 이 신화에 대해 다른 견해를
[비평] 전락하는 자의 꿈, <키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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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논란(?)이 되었을 장면부터 말해보자. 아홉 번째 에피소드에서 외계 기계를 서로 차지하려고 최선만(류승룡)과 고백중(안재홍), 유인원 박사(유승목)와 그의 조카 유태만(정승길), 그리고 ‘백정 닭강정’에서 일하는 외계인 4명의 세 무리가 대치한다. 이때 외계인 4명은 지구인에게 겁을 줄 요량으로 지구인이 가장 무서워할 만한 네 가지를 몸으로 연기한다. 잘 알고 있듯 미사일, 핵,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사슴, 세계적인 인기 그룹 BTS가 그것이다. 진보한 과학기술과 정신세계를 구축했을 외계 존재가 정말 지구인을 이해하지 못해 그러한 발상으로 어처구니없는 몸짓과 말을 보여준 일은 터무니없고 실소를 자아내지만 작품과 인물은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이 한명 한명 진지하게 말 그대로 공연을 벌인다. 이 장면이 놀랍다면 감독의 지난 연출 스타일이 언어유희와 슬랩스틱코미디가 주를 이뤘던 데서 한뼘 더 비켜나 생경함을 주었기 때문이다. 유치원 장기 자랑에서나 볼 법한 이 장면은
[비평] 이병헌 코미디의 특이점, 불화와 화합 사이, <닭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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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을 인간화하는 존재다. 영화라는 매체에 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얼굴로서의 스크린, 눈으로서의 카메라와 같은 개별 비유만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와 영화를 통째로 부딪쳐 이론화한 시도도 있다. 토마스 엘제서와 말테 하게너에 의한 이러한 시도는 영화의 물질성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현상이 영화와 신체가 맺어온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유보적 질문으로 끝맺는다. <로봇 드림>과 <가여운 것들>에서 두드러진, 질료로서의 몸을 마주하며 저자가 미완으로 남겨둔 질문을 이어보고 싶어졌다. <로봇 드림>에서 분해되고 재조립되는 고철의 몸과 <가여운 것들>의 두뇌 이식 수술 이후 퇴행한 성인 여성의 몸은 극단에서 서로를 향한다. 단단한 철을 표현했음이 분명하나 실제로는 점과 선으로 이뤄진 그림에 불과한 몸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에 가닿는 동안, 실존하는 배우의 몸은 로봇의 몸을 희구하며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려
[비평] 불구와 불굴의 프랑켄슈타인, <로봇 드림>과 <가여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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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을 보며, 이상했다. 영화는 시종 벨라(에마 스톤)를 화려하게 비추지만, 진짜 보여주려는 건 따로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뭔가가 더 있다는 묘한 기분. 영화의 숨겨진 이면을 보기 위해, 한 여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영화의 초반, 벨라의 사랑스러운 순수는 돋보인다. 그런데 벨라의 순수함을 좀 유심히 뜯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순수는 물들지 않은 공백의 상태. 그러니까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벨라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즉각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녀에게 없는 것은 과거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있는 자신만의 역사가 벨라에겐 없다. 그러므로 지식과 교양도 없다. 세상을 모른다. 이것은 <가여운 것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으로 작동한다. 벨라는 좌충우돌하며 세상을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코미디와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표면에 드러난 벨라의 공백이다.
매력적인 몸을 가진 성녀, 벨라
하지만 그게 다인가?
[비평] 반복된 것이 본질에 가깝다, <가여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