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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놀랍도록 닮았다. 비슷한 시기에 당도한 <플래시>와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하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다중우주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식은 신기할 정도로 비슷해 보인다. 두 영화는 모두 이야기의 고정좌표를 만드는 걸로 멀티버스가 초래한 혼란을 수습한다. 사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했던 다수의 영화에서 타임 패러독스를 해결하는 대표적인 방식이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꿀 수 없는 사건도 있다는 고정값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요컨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운명론.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이야기란 A에서 B로 이동하는 궤적의 기록이다. 시작점과 종료점이 있는 한 그 사이에서 어떤 복잡한 과정을 경유하더라도 하나의 이야기는 완료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의 문을 닫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바로 문제의 멀티버스 때문이다.
운명론과 자유의지
마블 시네마틱 유니
[비평] 멀티버스, 히어로영화를 망치기 위해 온 구원자, ‘플래시’와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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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당시 대학생 한지원은 <코피루왁>이라는 24분(!) 분량의 단편(!)애니메이션을 발표했다. 비유와 상징, 함축 등의 기존 독립 단편애니메이션의 미학에서 벗어나 드라마 연출의 정공법을 택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담뿍 담아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10대 후반 주인공들은 주저 없이 질주했다. 넘치는 에너지와 탄탄한 기본기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작품이었다. 기본기와 연출력은 그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추진력일 뿐이라는 듯, 2013년 <학교 가는 길>은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는 간극을 한껏 벌리면서 한지원만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각인시켰다. 반려견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한지원의 작품들 속 청춘이 겪는 현실 사회의 풍경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것일지니. 학교와 가정이라는 (안정적이면서도 억압적인) 울타리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막연한 기대를 꿈꾸지만, 정작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 그러고는 쉼표도 없이, 대학원 준비생의 고민을 다룬
[비평] ‘그 여름’, 지극히 마술적인, 또한 사실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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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더이상 집이라고만 부를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것이 개인의 경제적 성공에 따른 신분이 드러나는 지표이고, 또한 그 경제적 가치를 재생산하기 위한 투기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공통의 감각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투사되는 선망과 원한은 동시대의 문화적 감정구조에 있어 핵심이다. 지난해 가장 문제적 작품이었던 <안나>와 <작은 아씨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투쟁적 계급의 개념은 유효하지 않으며 그 자리를 회복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자연화된 ‘신분’이 차지한다. 주어진 신분의 극복이 중심 모티프로 작용하는 두 시리즈 모두에서, 아파트는 그에 따른 갈등 상황을 첨예하게 만드는 서사적 장치로 사용된다. <안나>에서 정체가 탄로날 위기에 처한 안나(수지)는 가짜 신분으로 통행증을 얻은 셈인 자신의 아파트 건물에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숨어 다닌다. <작은 아씨들>의 인주(김고은)가 다가올 어떤 위험도 감수하기로 마음먹
[비평] ‘드림팰리스’, 욕망의 성취도, 연대도 실패한 자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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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현상 요약부터. <도둑들>(2012, 이하 개봉·공개일 기준)이 마카오로 간 것은 어떤 신호였을 수 있다. <마스터>(2016)의 밀항선은 필리핀으로 향했다. <협상>(2018)은 태국. 이후 흐름은 한층 줄기차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도 태국을 택했고 <범죄도시2>(2022)는 베트남, <늑대사냥>(2022)에서 잠시 필리핀에 들른 뒤 넷플릭스의 <야차>(2022)와 <수리남>(2022)은 각각 중국 선양과 수리남으로 떠났다. 디즈니+의 <카지노>(2022~23)에서 한번 더 필리핀, 내년 예정된 <범죄도시4> 역시 필리핀이다. 이전의 한국 범죄액션에선 찾아보기 어려웠던 경향이다. 이에 비하면 <범죄도시3>(2023)가 잠시 일본을 찾은 건 얼핏 낯익고도 손쉬운 선택으로 보인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보자. <황해>(2010)의 무시무시
[비평] ‘범죄도시3’, 그분이 동남아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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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결말에서 이 영화는 안데르센 원작의 비극이 지닌 공허함을 단호하게 포기하는데, 아마도 30년 전의 문화적 분위기가 동화 속 ‘불가능한 사랑’을 옹호하지 않았기에 관객 다수가 이 애니메이션의 제안을 환영했던 것 같다. 동화란 원래 구전되거나 문서화되며 상황에 맞게 변화되는 특징을 가진 장르다. 따라서 영화화 과정에서 원형의 일부가 훼손되거나 변형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일부 비평가들의 언급처럼, 과거 디즈니의 영상화 작업은 안데르센 특유의 ‘뒤틀린 욕망’이 지닌 환영을 타파해낸 성과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성공했다. 그리고 의도주의 비평의 관점에서, 이러한 개작의 문제는 도덕적으로 텍스트의 합리성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원주의적 해석이 관심을 받으면서 작품 스스로의 ‘지각가능성’ 여부가 창작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실사화된 <인
[비평] ‘인어공주’, 가장 숭고한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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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정면에서 얼굴을 바라본다. <토리와 로키타>의 첫 장면은 역설적이다. 난민 체류증 발급 심사를 받는 로키타의 얼굴이 화면 가운데 있지만, 그녀는 프레임의 중심부에 머무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로키타는 환대받지 못하는 난민으로 도착해 있고, 이곳에 그녀를 위한 장소 역시 마련되지 않았다. “기억이 안 나니?” 이민국 직원이 건네는 질문은 그래서 로키타의 얼굴에 불투명한 가장을 덧댄다. 로키타는 체류증을 발급받기 위해 거짓된 말로 능숙하게 답변해야 한다. 질문은 계속된다. “학교 근처 호수 이름은 생각나니?” “중학교 교장은 남자였니 여자였니?” 하지만 로키타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내지 못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공황발작 약을 먹는다. 그제야 흔들리던 카메라가 수평으로 움직여 로키타의 얼굴을 외면하고 발급 심사가 중단된다. 서사적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숏의 표면에서도 로키타는 임시적인 체류와 감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감독인 다르덴 형제는 단호하게 말한다. &
[비평] ‘토리와 로키타’, 불가능한 만남을 주선하는 영화적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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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에는 조명이 깜빡거리고, 남자는 나이 든 여성 동료에게서 약을 받는다. 꺼질 듯하던 전기가 드디어 제대로 들어오고 여성이 화면 왼편으로 나가면, 거기에는 한밤중 노대의 풍경이 담겨 있다. <카일리 블루스>는 <지구 최후의 밤>과 달리 대부분 낮을 배경으로 촬영되었지만 도입부는 밤의 서늘하고 음산한 공기를 충분히 각인한다. 빛을 기다리면서 정작 밤으로 향하는 연로한 여성의 걸음을 따라가며 시작하는 영화는 이처럼 유장한 패닝으로 연결된 흐름 안에 여러 차례의 역설을 배치한다. “오늘이 무슨 날이에요?”, “그냥 평일이야”라는 모호한 뉘앙스의 대화, 혹은 ‘하루에 세번’을 약 복용 주기가 아니라 정전의 횟수로 알아들은 천성(진영충)의 오해, 문과 밤과 빛과 불…. 영화는 단일한 숏 안에서 혼잡하고도 역설적인 정보를 거의 남용하듯 선보인다.
데니스 림은 비간의 롱테이크에 관해 “한숏 안에 쌓이는 강도를 우리가 아는 형태로서 현실의 보호벽이 파열되기 직전 그 한계
[비평] '카일리 블루스', 나의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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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실사애니메이션 <인어공주>가 공개 전부터 논란에 직면했다. 원작 애니메이션의 설정을 깨고 주인공 에리얼 역에 흑인 배우를 기용하면서 이에 대한 저항이 인 거다. 저항의 원인을 원작 파괴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눙칠 수도 있겠지만, 동시대 반영을 통한 변화는 리메이크의 본성이라는 점에서, <인어공주>에 대한 반감은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는 ‘화이트 워싱’에 대한 비판의 반작용으로 ‘블랙 워싱’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흑인 배우 기용을 둘러싼 거센 저항은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판타지 세계의 어선을 빠르게 현실 세계의 항구로 복귀시켰다.
현실의 무거움을 안고 실사화된 <인어공주> 서사를 마주했을 때, 바다 아래와 위, 두 세계 사이에 선 에리얼의 갈등은 현실을 정확히 복사한 것처럼 보였다. 인간에게 판타지는 수면 아래에 있지만, 에리얼에게 판타지의 세계는 곧 우리의 현실인 수면 바깥의 세계다. 트라이튼은 바깥 세계의 위험을 강
[비평] '인어공주'와 '토리와 로키타', 영화와 현실의 관계 재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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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이하 <가오갤3>)가 주는 감동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같은 수사적인 표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가오갤3>의 감동을 설명하는 것에는 말 그대로 물리적인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퀼(크리스 프랫)이 우주에서 돌처럼 굳어가다 아담(윌 폴터)에 의해 극적으로 살아나는 장면이 더 뜨겁게 느껴지는 까닭을 (전편을 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에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던 욘두(마이클 루커)의 모습까지 덧붙여 이야기해야 할 텐데, 문제는 그걸로도 여전히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욘두와 퀼의 길고 긴 사연을 추가로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것이 반드시 설명되어야만, 극 후반 사랑으로 감화되는 아담이라는 캐릭터의 상징성이 제대로 전달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비평]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언어화하기 곤란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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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솔직해지자. 인류는 안다. 신자유주의의 엔진을 장착한 자본주의호(號)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 지 오래라는 걸. 균열 신호는 20세기에만 여러 차례 있었다. 2008년에 이르러 더이상 경고가 아닌 무거운 증상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가 나타났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경제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은 정직한 경제학자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미국은 말할 것 없고 20세기에 설계된 유럽 복지국가 모델 역시 곳곳에서 물이 샜다. 신자유주의에 국경이란 없으니 그 폐해가 북유럽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았다. 불평등은 구조적인 데 비해 복지는 임시방편적이었다. 국민을 통합하는 순기능보다 수혜자와 시혜자로 가르는 역기능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그러는 와중에 유튜브를 포함한 소셜미디어 기업과 이를 구현하는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이 세계를 호령하게 됐다. 알고리즘은 사람들의 생각을 갈랐다. 2022년 현재 전세계 10대 부자 중 7명이 소셜미디어와 온라인쇼핑 등 디지털
[비평] ‘슬픔의 삼각형’, 신(新)유한계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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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년들이 맞닥뜨리는 세계의 균열을 극도로 섬세하게 그려내면서도, 끝내 여린 소년의 죄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마는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루카스 돈트의 <클로즈>를 반복해 보며 체념하듯 되뇌었다. 영화를 거듭해 보아도 매 장면에 대한 감응은 다르게 반향하지 않았고, 이 가련하고도 가혹한 영화를 끌어안고픈 마음과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양가적인 감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마음에 걸려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장면은 감상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클로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그 생명력의 근원을 날카롭고도 사려 깊은 시선과, 개인의 얼굴에 무섭도록 집중하면서도 사회상을 영민하게 반영하는 지능적인 면모에서, 단순하게는 관객과 인물을 밀착시키는 강력한 동화력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소년의 세상이 흔들리기 때문만이 아니다. 영화 후반부부터 서사가 도식적으로 구조화되고, 소년이 연약
[비평] ‘클로즈’, 상실이 자아내는 큰 구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