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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촬영할 때는 언제나 기술적인 문제에 몰두한다.” - 필리프 가렐
<물안에서>의 성모(신석호)는 단편영화를 만들기 위해 촬영감독인 성국(하성국), 배우로 출연하는 후배 남희(김승윤)와 함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닌다. 만들려는 영화의 배우이자 연출자이기도 한 성모는 어느 골목에 남희를 세우고 몇 발짝 걸어보게 한다. 그는 남희가 골목을 걷는 모습을 보면서 “장소와 인물이 어울리는지” 관찰하고 이곳을 촬영장소로 결정한다. 다른 장면에서 세 사람은 이미 비슷한 골목 몇 개를 지나쳐 왔지만, 성모는 그곳이 아니라 이 골목을 선택한다. 아직 무엇을 찍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성모는 구체적인 지역에서 장소를 찾고 그 자리에 인물을 배치하는 것에서부터 장면을 구상한다. 영화의 윤곽을 떠올리기 위해 지역과 장소와 배우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전제는 물론 홍상수의 변함 없는 원칙이다(“난 모델이 필요한 사람이다. 구체적인 지역, 장소, 배우…”).
홍상수의 영화에 영화감독과 배우
[비평] '물안에서'를 중심으로 본 촬영장, 리허설, 워크숍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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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이 받은 혹평 중에는 이병헌 감독의 장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극한직업>(2018), <바람 바람 바람>(2017) 등 전작에서 선보인 시원한 유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확실히 웃음 측면에서 <드림>은 전작들과 결이 다른데,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병헌표 웃음’이 줄었다는 것이다.
집의 부재가 가져온 변화
이병헌표 웃음은 뭘까. 그의 인물들은 뻔뻔한 소리를 또박또박 쉴 새 없이 떠들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주로 불리할 때) 어이없는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때때로 고함에 상욕까지 시원하게 쏟아낸다. 그들은 속물스럽지만 귀엽다. 그러나 이병헌 코미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조적인 유머’다. 그들은 자신의 한심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 대해 물색없이 떠든다. 상황의 엿같음을 폭로하면서도 별일 아니라는 듯 능청을 떤다. <드림>에서 소민(아이유)이 “페이가 열정을 못 따라와서 열정을 페이에 맞췄다”고
[비평] 그럼에도 '드림'을 긍정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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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복수극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구한 역사를 건너 복수극은 끊임없이 만들어져 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여전히 유효한 환상임을 시사하듯 복수극 안에는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이 담긴다. 복수극의 세계에서 피해와 가해는 선명히 구분되며, 가해자는 피해자에 의해 잘못에 합당한 벌을 뒤늦게 받는 것으로 끝맺는다. 권선징악의 단순한 클리셰가 반복되는 이유는 복수가 지닌 마력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복수가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일단락되더라도 복수가 끝나는 법은 없다. 복수의 칼날이 대상을 정확히 관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복수는 늘 불충분하거나 차고 넘친다. 이는 복수의 특징이기 전에 복수극의 특징이다. 복수가 손쉽게 완료될 수 있다면 서사는 진전될 수 없다. 복수극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복수를 지연시키고 상처를 대물림하면서 복수가 끝나지 않도록 만든다. 복수극의 생존 본능은 개인이 품은 복수의 욕망을 초과한다.
복수극은 복수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늘 어느 정도
[비평] '피기', 우리에게 복수극은 무엇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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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윅4>는 게임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급기야 1인칭 시점 운운하는 반응까지 나온다. 몇몇 신에서 내가 놓친 시점숏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하드코어 헨리>처럼 1인칭 시점이 강조된 영화가 아니다. 3시간 가까이 총을 쏘는 주인공의 몸을 내가 보고 있는데 무슨 시점숏이란 말인가. 그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도 마찬가지다. 게임에 들어왔다고 착각할 수는 있다. 여기서도 인물이 게임적 상황을 돌파하는 걸 바라볼 따름이지 내가 캐릭터의 시점이 되어 장애물을 통과하지는 않는다. <존 윅4>에서 게임을 표방한 부분은 제8구역의 한 건물에서 벌어지는 액션 시퀀스인데, 여기서 카메라는 지상에서 유리돼 계단을 따라 부상하며 부감숏으로 인물의 동선을 일목요연하게 따라가며 보여준다. 거대한 설계도 위로 인물이 안무하듯 총을 쏘는 장면은 전형적인 객관적인 숏이다.
<존 윅4>가 게임 같은
[비평] ‘존 윅4’ 아름다운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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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찬사가 민망하게도 <존 윅4>의 액션은 다소 조악하고 어설프고 가볍다. 솔직한 불평을 늘어놓자면 아무리 봐도 1편만 못하다. <존 윅>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는 무겁고 피로하고 둔탁해서 통증까지 느껴지는 듯한(약간의 과장을 보태 존 윅이란 존재의 존재론적 고통을 형상화한 듯한) 묵직함인데 4편에선 가볍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초반 오사카 콘티넨털 시퀀스는 용서가 힘들 정도인데, 이 유치원생 안무 같은 오리엔탈 코스프레 액션에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면 그나마 초반에 나왔다는 점이다. 점점 괜찮아지는 시퀀스들과 대망의 피날레 덕분에 170분의 앞쪽의 불쾌한 기억이 상당히 희미해진다.
오사카 시퀀스의 민망함의 절정은 존 윅의 가벼운 쌍절곤 액션이다. 총알도 튕겨내는 방탄복을 입은 강력한 적들이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작대기질 몇번에 나가떨어진다. 간혹 꿈틀거리면서도 기절한 척하고 있는 것까지 보이는데, 의도된 연출인지 무성의한 결과인지 헷갈릴 정도다. 이
[비평] ‘존 윅4’, “죽고자 하는 자 살고 살고자 하는 자 죽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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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에서>를 보는 내내 떠올렸던 것은 초점 없는 이미지를 이렇게나 신중하게 응시하는 경험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었다. 비경제적 이미지, 시행착오, 상영 환경에 대한 불신을 촉발하는 화면, 그리고 이 모든 혐의들과 평행선을 그리면서 그저 재생되고 있을 뿐인 영화. 그러나 이 글은 초점이 나간 채로 촬영되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물안에서>가 개봉될 수 있는 영화의 조건(그런 게 있다면)을 파격적으로 변절했다거나, 영화를 어렵게 만든다는 식으로 과장하는 반응들과는 거리를 두기로 한다.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이런 질문이다. 왜 하필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가 이렇게 촬영되어야 했을까. 스스로의 삶을 영화를 향해 굴절시키는 홍상수 감독의 작업 방식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거의 매 영화를 빼놓지 않고 출현하는 사건이지만 정작 영화 제작 현장은 영화를 둘러싼 반응들 속에서 불투명하게 남아 있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물안에서>에는 촬영 현장이 등장한
[비평] ‘물안에서’, 결정되지 않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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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와 영만이 어머니 이미경 배우에게 메시지를 올렸다. 카카오톡 PC 버전 앞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는다. 뭐라고 쓸까. 꽤 길고 정중하게 썼다가 지운다. 조금 짧고 경쾌하게 썼다가 다시 지운다. 보내진 메시지는 그 중간 어디쯤이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어머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거꾸로 위로받고 있지 뭐예요. 4월16일이 또 지나고 세상은 다시 조용해질지 모르지만, 잊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이 제 주변에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도 영만이를 살아내고 계신 어머님, 매일 응원합니다….” 이제는 스스럼없이 전화드려도 편하게 받아주실 텐데, 뭐라 말해야 할지 쉽지가 않다. 유가족과 직접 연락하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의 심정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함께 애도하고 싶지만 마음뿐이어서 자책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참사를 목도한 수많은 이들이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해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이 사건의 영문을 모르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과 맞
[비평] 4월 제주 바다처럼 찬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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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비평은 마치 내게 평론은 여기서 끝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슬램덩크>)가 개봉 후 흥행을 이어간다는 소식에 시큰둥했던 건 사실이다. ‘29년이 지난 이제 와서 굳이 왜?’ 하는 마음이 앞섰고, 흥행은 일부 추억에 젖은 <슬램덩크> 열혈 팬들이 보여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끝까지 보지 않았을 것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칼럼에서 <슬램덩크> 흥행의 이유를 분석한다(‘강유정의 영화로 세상 읽기’-“중요한 건 변하지 않은 마음”, 2023년 2월10일자). 거의 최초로 문화를 주체적으로 향유하던 이른바 X세대가 향수를 바탕으로 젊은 시절 즐겼던 문화 콘텐츠를 소환했고, 아래 세대에게 전파했다는 것. 또 이런 현상은 <탑건: 매버릭> 때부터 기미가 보였고, 그 배경에 부조리하고 힘겨운 현실이 있다는 점까지. 훗날 오늘의
[비평] 당신의 전성기는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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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존 포드일까?’를 질문하는 대신 ‘왜 존 포드의 가르침을 새미가 실천하는 장면은 없을까?’를 묻고 싶었다.
필름 카메라는 한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기에, 시선의 반대편에는 언제나 누락된 것들이 남겨진다. 영화를 보는 체험도 비슷할 것이다. 어느 한 장면에 깊게 몰입한 관객은 영화에 담긴 다른 것들을 놓치곤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도입부에서 어린 시절의 새미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그들이 함께 보는 <지상 최대의 쇼>에서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는 장애물과 부딪히고 탈선해 다른 객차를 모두 부순다. 어린 소년을 한순간에 사로잡고 소년에게 잊지 못할 경험으로 각인되는 것은, 새미의 부모가 장담한 서커스와 광대와 곡예사가 나오는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경로를 벗어나 폭주하는 기차가 주변에 있는 것들을 파괴하는 장면이다.
이 순간은 역설적이다. 영화가 전하는 강렬하고 원초적인 체험은 어린아이 새미를 순식간에 스크
[비평] ‘파벨만스’, 카메라 너머의 불온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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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얼굴을 내도록 지켜보면서도 마음이 이리 비어버려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아도 <소울메이트>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긴 어렵다. 원작인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2016)의 잔상이 아른거리고, 서사적 결함이 눈에 밟힌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빽빽하고도 헐겁다. 두 친구의 진한 우정과 다사다난한 인생사를 빼곡히 채운 이야기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끝에 온전히 드러나는데, 그 뒷맛이 씁쓸하다. 종국에 드러나는 서사의 평이함 때문인지 이야기가 주가 된다기보다는 반전이 안기는 충격이 핵심인 것 같고, 반격을 가하는 스토리텔링에 강한 집착마저 보인다는 인상이 남는다. 물론 서사의 기본 구조는 원작에서 빌려온 것이며, 서사 전달에 긴장감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매도될 일은 아니다. 다소 투박하지만 야심만만한 구조 안에서 감성 짙은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도 감상자에 따라서는 다양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반응을
[비평] '소울메이트', 여성 서사와 모성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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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의 자전성은 스필버그 자신의 것만은 아니다.
자전성은 그의 다채로운 영화 목록만큼이나 혼종적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아마도) 최초의 자전적 영화. 자전성은 <파벨만스>에 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자전성은 털어놓지 못한 어린 시절의 비밀이 밝혀진다거나 새삼스럽게 무언가를 고백하는 데 있지 않다. <파벨만스>는 어디까지나 영화와 인생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접점을 그려온 감독이 펼친 영화-자서전이다. 그리하여 자전성은 스필버그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영화를 보며 자라온 세대, 혹은 누구의 무엇이든 영화를 보며 자란 이들을 아우른다. 영화는 스필버그에 의해 쓰인 일종의 공동 자서전과도 같다. 세계적인 감독에게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고 창의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이다. 다만 <파벨만스>를 보면 이를 뒤바꿔 말하고 싶어진다.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개인적인 것이다.
이 특별한 자전 영화의 출발점은 집이나
[비평] '파벨만스', 영화가 말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