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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열리는 문이 있다. 혹은 문이 열렸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건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이 그리는 세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사람이 죽는 일이 있다. 혹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의 선율이 되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선율’은 나의 표현이 아니라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표현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자신의 영화를 직접 소설화한 책 <스즈메의 문단속> ‘작가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38살 때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내가 직접 피해자가 된 건 아니었으나 그 일은 내 40대를 관통하는 일상을 지배하는 선율이 되었다. (중략) 왜. 어째서. 왜 그 사람이. 왜 내가 아니라. 이대로 끝인가. 이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계속 모르는 척하고 살 수 있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신
[비평] ‘스즈메의 문단속’, 애도의 방법으로서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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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셰린의 밴시>에는 그냥 지나치기 수상한 구석이 있다. 이곳의 인간들은 종종 너무 과격하다. 그렇지 않은가. 기어이 피를 보겠다는 남자와 지지 않고 응수하는 남자라니. 처음에는 마틴 맥도나 감독 특유의 우화적이고 연극적인 연출이라 여기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런 과격함은 영화의 마지막, 파우릭(콜린 패럴)의 결단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 파우릭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한 것일까? 단순한 복수인가, 윤리적인 응징인가. 혹은 여태 눌러놓은 서운함과 분노가 폭발한 것일까? 더 의아한 것은 그런 결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반응이다. 게다가 그 순간을 은은하게 감싸고 도는 경건한 공기라니. 이런 이상함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마틴 맥도나의 작품들을 경유해 하나의 가설에 이르렀고, 그 가정은 지금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파우릭의 결단을 설명하기 위해 쓰여질 것이다. 그것이 기행이 아니라 성스러운 의식이며, 영화의 숭고한 목적지임을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도 말할 수
[비평] ‘이니셰린의 밴시’, 재앙은 어떻게 제의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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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며 어딘지 계속 브레이크가 걸린 이유는 아마도 내가 배배 꼬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즈메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에너지로 가득한 친구다. 처음 본 남자에게 반해 이변이 일어나자마자 문제의 장소로 달려가고,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전문가의 조언을 가볍게 무시한 뒤 끝까지 소타를 책임지며 일본 열도를 종단한다.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금방 친해지며 종국엔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마을의 위기를 막아내는 스즈메는 의지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가히 초인적이다. 스즈메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두 가지로 짐작해볼 수 있다. 하나는 원래 타인의 곤란한 상황을 참지 못하는 착하고 이타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스즈메가 한명의 독립된 인격체라기보다는 그렇게 결정된 이야기 속 당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호쿠 지방 이와테현에서 이미 한번 저승의 문턱을 넘어갔던 스즈메는 돌고 돌아 이야기를 끝맺기 위해 처음부터 운명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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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스즈메의 문단속’과 ‘이니셰린의 밴시’, 긍정의 함정과 비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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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웨일>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렇다. 다만 그것은 <모비딕>이 고래에 관한 이야기라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스스로 <모비딕>을 인용하고 있는 <더 웨일>은 <모비딕>과의 관계를 통찰할 때 다양한 상징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모비딕>이 그러했듯이 <더 웨일>을 미국, 그리고 현대사회에 관한 알레고리로 볼 수도 있다. <더 웨일>을 거울처럼 반전된 <모비딕>이라고 본다면, <더 웨일>의 찰리(브렌던 프레이저)는 고래 모비딕이 아니다. 찰리는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모비딕을 잡으려는 선장 에이해브를 닮았으며,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려 하는 오디세우스와도 유사하다. 내면의 어두운 곳에서 죽음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오디세우스의 욕망이 삶보다 거대한 무엇에 대한 갈망인 것처럼, 찰리의 죽음을 향한 갈망 또한 단
[비평] ‘더 웨일’, 숭고함이 침묵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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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에 어긋나는 일이나 사람을 비난할 때 우리는 정의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것이 집단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확신은 강해지고 수정 불가한 당위가 된다. 내가 굳게 믿어온 신념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때는 늦는다. 이성과 합리가 끼어들 자리에 이미 비대한 확신이 들어앉은 다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영웅>은 얼핏 아시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꾸준히 이어온 테마를 계승하는 정도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그보다 한결 인류학적이다. 의심하지 않는 확신이 누군가의 명예를 한순간에 추락시키는 일이 SNS 시대에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으로 가보자.
지난해 가을 취재차 방문한 독일 남부의 로텐부르크. 13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이 ‘자유제국도시’로 지정한 황제 직할 도시 중 하나였다. 이후 800년에 이르는 세월 속에 숱한 전쟁을 거치면서도 로텐부르크는 성내 건물들을 고스란히 지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측 미군 지휘관이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알아보고 공습을 중단토
[비평] ‘어떤 영웅’,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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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사과집 방송국 시사 PD이자 에세이스트.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 <싫존주의자 선언> <공채형 인간> 저자.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송혜교)이 학교 폭력의 복수를 결심한 가해자는 다섯명이다. 생사 여부로 복수를 결산해보자. 두명의 남자 가해자는 모두 목숨을 잃은 반면, 세명의 여자 가해자는 살아남았다. 왜 그들은 죽지 않았을까?
가해자들 사이의 젠더라는 위계
문동은이 박연진(임지연)에게 주려고 한 것은 ‘사회적 죽음’이다. ‘너의 아주 오래된 소문’이 되는 방식으로. 오늘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라는 체육관에서의 경고는 연진이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수상할 만큼 대중적인 인물이기에 더 효과적이다. 특히 젊고 아름다운 기상 캐스터일수록, 흉흉한 소문으로 인한 추락의 낙차가 크다. 전재준(박성훈)은 공사 중인 건물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지만, 연진은 사회적 지위, 명예, 영광(glory)으로부터 추락한다. 그건 ‘여성’이 대상일
[비평] ‘더 글로리’의 복수는 가해자의 성별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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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가 끝난 시점에 되묻고 싶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에 어떤 화두를 던졌나. 동은(송혜교)을 괴롭힌 가해자들은 저마다 저주의 신탁이라도 받은 양 과시적인 형벌을 보여주지만 나는 냉동된 소희(이소이)의 시신이, 재준의 옷가게에서 숙식하다가 간신히 고시원으로 도망친 경란(안소요)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온 생을 걸어 복수를 준비해온 주인공의 치밀한 설계도가 학교 폭력의 방지와 처벌에 어떤 사회적 나비효과를 일으켰는지 조금의 묘사도 보지 못했다. 대신 내가 본 것은 저마다 여러 층위의 고통 속에 놓인 피해자들이 한데 뭉쳐지고, 저마다 양상이 다른 가해자들이 깡그리 지옥에 던져지는 광경이었다. 집단화된 증오와 단죄 속에서 한쪽은 분열했고 한쪽은 지옥에서도 지켜낸 선의와 믿음으로 연대했다. <더 글로리>의 쾌감이자 아름다움이면서, 찝찝함을 지울 수 없는 편의적 이분법이기도 한 이 거대한 피해자-가해자 구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비평] ‘더 글로리’ 속 뭉뚱그려진 피해자들과 해결되지 않은 폭력의 잔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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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복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측정 불가능한 광기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복수를 할 땐 두개의 무덤을 파라’는 말처럼 복수는 근본적으로 자기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다. 그만큼 제대로 된 복수를 달성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상 복수를 통해 보상되거나 회복되는 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효용에 눈이 멀어 복수를 갈망한다. 하나는 감정의 분출이다. 사적 영역에서 복수는 회복과 치유라기보다는 증오의 발산과 분노의 해소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복수는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랄 뿐 정확히 계산될 수 없다. 그나마 근사치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원시적인 형태의 정의,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일대일 대응이다. 이 순간 복수는 사적 감정에서 공적인 기능으로 치환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최소한의 정의. 언젠가는 대가를 치른다는 사회적 안전장치(혹은 경고)라 해도 좋겠다.
<더 글로리>의 복수는 나름 합리적으로 보인다. 들끓는 감정에 매몰되었다
[비평] ‘더 글로리’, 그 복수는 진짜 통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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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나미(천우희)는 사건에 휘말린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이하 <스마트폰>)의 후반부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범죄자 준영(임시완)을 대면한 나미는 준영에게 묻는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억울하게 피해자가 된 나미의 입장에선 생략할 수 없는 질문일 테지만, 이를 들은 준영은 코웃음을 치며 싱거운 대답을 들려줄 뿐이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거기엔 대단한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때 준영과 함께 코웃음을 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건 바로 화면 밖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다. 이미 오프닝에서 모든 이야기의 시작을 목격한 우리는, 나미의 질문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이유를 아는 것이 나미의 상황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억울함에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은 주인공이 오히려 더 위태로워지는 것을 다른 영화에서 본 적도
[비평]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와 ‘서치2’, 카메라를 맡겼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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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예술을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는가? 세계적인 지휘자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에게 물어보자.
<뉴요커>의 애덤 고프닉과 함께하는 대담에서 리디아는 두 사상을 소개한다. 첫째는 음악을 연구하다 만난 시피보 코나보 부족의 가르침이다. 그들은 노래를 만든 영혼과 같은 편에 있는 사람만이 노래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둘째는 스승 번스타인이 가르친 유대교의 개념 ‘테슈바’와 ‘카바나’다. 테슈바는 회개, 귀환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카바나는 방향성, 집중, 의도다. 기도하는 이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신성한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깨끗한 의식을 확립하는 과정이다. 리디아는 거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창작가의 의도와 삶, 심지어 영혼까지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 4악장
<TAR 타르>의 중심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있다. 클래식 세계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비평] ‘TAR 타르’, 불편해야 했던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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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지난해 칸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되어 호평받았고 영화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 <인디와이어>가 선정한 2022년 최고의 영화 1위에 뽑혔다. <씨네21>에서도 물론 다수의 평자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캠코더에 보존된 유년기의 기록을 매개로 아버지와 동행한 오래된 휴가의 기억을 불러내는 이 영화에 쏟아진 전세계의 찬사는 보편적 합의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작은 비디오카메라 렌즈 앞에 놓인 대상에 이토록 몰입하게 만드는 시선의 힘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는 소감을 남긴 클레르 드니 감독의 말처럼, <애프터썬>은 내밀한 기억을 통해 뒤늦게 체감되는 감정과 그것에 접속하게 하는 영화적 회상의 매혹을 짚는 환대 섞인 감상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종류의 불만을 품고 있는 편이다. <애
[비평] ‘애프터썬’, 형식이라는 강박관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