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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를 잃고 손가락질 받으며 독재자의 곁을 지킨 사람. 1970년대 말, 과테말라 독재 정권 내무부의 언론 담당으로 일했던 기자 엘리아스 바라오나의 삶은 그렇게 영원히 오명으로 남을 뻔 했다. 반정부 언론을 탄압하는 역할을 주도했던 그는 시간이 흐른 뒤 사실은 스파이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엘리아스 바라오나의 진짜 임무는 내무부의 정보를 빼돌려 민주화 인사들을 살해 모의에서 구해내고, 반군의 게릴라 활동을 돕는 일이었다. 첫 장편영화를 만든 아나이스 타라세나 감독은 추방되어 망명 생활을 한 아버지의 회고를 듣고 자라온 밀레니얼 세대로, 조국의 침통한 현대사를 건조하고도 유려한 한 편의 시적 다큐멘터리로 엮었다. 아직 아버지에게 이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그는, 시상식이 끝난 밤 떨리고 격양된 목소리로 과테말라의 땅에 스며든 수많은 핏방울들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전 군부 독재자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정부 이전에도 과테말라는 독재 정권이 지배한 역사를 반복적으로 거쳐왔다.
JeonjuIFF #10호[수상작 인터뷰] <스파이의 침묵> 아나이스 타라세나 감독, 과테말라 독재의 역사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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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는 정밀하고 조용한 언어로 혁명의 시간을 그리는 영화다. 1870년대 스위스, 쥬하 산맥 아래의 시계 공장에도 산업화의 물결이 닿는다. 손수 시간을 빚어내는 섬세한 노동자 일군들은 자긍심 뒷면에서 노동 환경과 조건에 대한 의심을 키우기 시작한다. 지도 제작자이자 여행자인 러시아인 표트르가 시계공장의 무정부주의자들과 동행하는 동안 영화는 시계공장과 자본주의의 공고한 시스템 아래 결코 포섭되지 않는 것들을 응시한다. 그것은 매우 인간적인 관계와 감정의 세밀한 흐름이며, 또 소리없이 끓어오르는 자각의 순간들이다. <도즈 후 아 파인>(2017) 이후 두 번째 장편영화를 만든 스위스의 감독 시릴 쇼이블린은 목가적 정치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며 관객을 사유하게 만든다.
왜 과거로, 19세기 시계공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는가.
내 바람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영화적 통로를 찾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과거를 재현한다는 것은 일종
JeonjuIFF #10호 [수상작 인터뷰]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 시릴 쇼이블린 감독, 목가적인 정치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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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오잔, 열아홉 라마잔은 도쿄에 정착한 터키 쿠르드족 난민이다. 터키의 인종 탄압을 피해 도쿄 교외에 자리잡은 쿠르드족 난민들은 1990년대 이후로 꾸준히 증가해 현재 2천 명을 웃돌지만 정부는 여전히 이들에게 난민 비자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고국의 전시 상황에 참여하지 못해 갈등하는 오잔과 난민 신분을 인정받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픈 라마잔. 비록 욕망의 세부는 다르지만 이들은 일본 사회가 지워버린 그림자 지대 안에서 함께 신음하며 버틴다. 일본의 다큐멘터리스트이자 TV 프로그램 프로듀서인 휴가 후미아리 감독은 단편영화에서부터 쿠르드족 난민 문제에 주목해, 첫 장편 <도쿄의 쿠르드족>에서 청년 쿠르드족들의 억압적인 현실을 생생히 포착했다. 2015년 격화된 시리아 내전 상황으로부터 마음 속 불씨를 틔운 그는, 일본이 어째서 난민들에게 “안전하고 평화롭지만 동시에 매우 무기력하고 침잠된 장소”일 수밖에 없는지를 파헤쳐 나간다.
장편영화 <도쿄의쿠르드족
JeonjuIFF #10호 [수상작 인터뷰] <도쿄의 쿠르드족> 휴가 후미아리 감독, 무엇이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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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에 땅 굳는다. 달리 말해, 땅이 굳으려면 비가 와야 한다. <내가 누워있을 때>의 선아, 지수, 보미는 비를 흠뻑 맞는 인물들이다. 지수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사촌 언니인 선아네에 얹혀살고 있다. 선아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사촌 동생과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에 시달린다. 짊어진 무게 탓에 선아는 회사 선배와의 부적절한 관계와 주변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일을 포기하지 못한다. 지수의 친구 보미는 전 애인의 무책임한 태도와 몹쓸 짓으로 인해 소중한 아이를 잃었고, 이로 인한 환각·환청에 시달리고 있다. 이처럼 순탄치 않은 삶을 영위하는 선아, 지수, 보미가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목적지는 지수 부모의 산소. 하늘도 무심하지, 차 사고가 나는 것도 모자라 카센터 직원이 그녀들을 얕잡아 보며 위협하기에 이른다. 좁은 모텔방으로 피신한 셋은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마음을 연 이들이 서로의 과거를 따뜻이 보듬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땅이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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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juIFF #9호 [인터뷰] '내가 누워있을 때' 최정문 감독, 결국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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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와 입이 본드로 막힌 채 잔혹하게 살해된 남성. 그 유력한 용의자로 사망한 남성의 아내 성윤아(유다인)가 체포된다. 남편 앞으로 든 보험이 동기로 제시되고, 살해 계획을 적은 다이어리가 증거로 제출되며 사건은 평이하게 마무리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국선변호사 이정민(강민혁)이 윤아의 변호를 맡으며 사건은 급전직하한다. 정직한 눈빛을 지닌 정민이 윤아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게 어떤 건지, 그 사건을 만나기 전까진 알지 못했다.” 영화 초반부에 흘러나오는 정민의 내레이션이 은근슬쩍 일러주는 사건의 전말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반전과 함께 밝혀진다. 범인(凡人)의 편견에 실낱같은 균열을 내는 작품. <폭로>의 홍용호 감독을 만나 영화 제작의 비하인드를 들어봤다.
- 법조계 출신이라 들었다. 영화 연출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 변호사 출신이고, 지금도 변호사인 상태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
JeonjuIFF #9호 [인터뷰] ‘폭로’ 홍용호 감독, 법정 미스테리에 녹여낸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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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타임> Full Time
에리크 그라벨/프랑스/2021년/87분/폐막작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쥘리는 누구보다 늦게 잠들고 일찍 눈뜬다. 두 아이를 이웃집에 맡긴 뒤 새벽같이 나서야만 파리 시내에 있는 직장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쥘리는 본래 마켓 리서처로 일했으나 4년 전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으며 실직자가 됐고 현재는 고급 호텔의 룸메이드로 일한다. 그런 그에게 가고 싶던 회사의 면접 기회가 주어진다. 꿈에 부풀어 최선을 다해 면접을 준비하지만, 때마침 전국적으로 파업이 시작되며 대중교통 이용이 불가능해진다. 히치하이킹까지 하며 어렵게 면접에 임하는데 어쩐지 면접관의 표정이 탐탁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호텔 매니저가 면접을 위해 쥘리가 무단 조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해고될 위기에 처한다.
<풀타임>에서 쥘리는 언제나 잰걸음으로 일을 처리하고 아이들을 챙긴다. 그럼에도 일과 육아를 완벽히 챙기기란 쉽지 않고, 어렵사리 일궈놓은 삶의
JeonjuIFF #9호 [추천작] 에리크 그라벨 감독, '풀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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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영화. <애프터워터>를 감상한 이들이라면 대체로 공감할 의견이다. 불친절하다 못해 어떠한 추측도 거부하는 이야기의 진행이 내내 골머리를 앓게 만든다. 동시에 <애프터워터>는 쉬운 영화다. 스크린, 스피커에 흐르는 자연과 생명의 생동감에 흠뻑 취하다 보면 우리는 가장 단순한 영화적 즐거움이 무엇이었는지 절감하게 된다. 이런 양면성은 다네 콤렌 감독의 성격과도 같다. 그는 일종의 난해함에 박식한 영화·현대 미술 전공자이자, <쥬라기 공원>에 열광하던 할리우드 키드였다. 또 영화란 결국 이미지와 사운드가 전부라고 단언하는 영화 근본주의자이자, 촬영 및 상영 체계의 변화에 따라 영화의 미래를 유연하게 고민하는 현대주의자이기도 하다. 이토록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매력 때문일까. 벌써 3번째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그를 만나 영화론을 직접 들었다.
<애프터워터>가 전주시네마프로젝트를 통해 제작, 공개됐다. 과정과 소감이 궁금하다.
처
JeonjuIFF #8호 [인터뷰] <애프터워터> 다네 콤렌 감독, 흐르는 영화, 흐르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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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꿈꾸는 소녀>
박혁지/한국/2022년/111분/전주시네마프로젝트
부모의 이혼 후 첩첩산중에 사는 무당 할머니 경원에게 맡겨진 1998년생 수진은 어린 시절부터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 타고난 능력을 부정하면 몸이 아팠기에 사람들에게 예언하는 일을 진즉부터 숙명으로 받아들였지만, <시간을 꿈꾸는 소녀>의 카메라가 약 7년간 그의 곁에 머무는 동안엔 다시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대학 진학, 그리고 캠퍼스 생활이 무당의 책무를 위협한 터였다. 장군신 앞에서 서울로 떠나는 손녀의 안녕을 빌며 애틋하게 눈물 흘렸던 할머니는, 어느새 주말에도 신령을 모시는 일에 소홀해진 손녀에게 선택의 순간이 당도했음을 냉정히 알린다. 그렇게 “살길을 찾는” 기로 앞에서 다큐멘터리는 수진의 요청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3년 후 재개된다.
샤머니즘이라는 매혹적 주제, 무속 세계의 강렬한 비주얼에 심취한 일군의 영화들이 있지만 <시간을 꿈꾸는 소녀>는 꾸밈없고 적나라
JeonjuIFF #8호 [추천작] 박혁지 감독, '시간을 꿈꾸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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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시내가 사라졌다>의 세계에선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용하다. 헤어진 남자친구, 밥줄이 끊긴 엄마를 도둑 촬영해 유튜버로 재기하려는 장하다(이주영)의 삶도, 콘서트를 앞두고 잠적한 전설의 가수 윤시내를 찾기 위해 전국 순회에 나선 이미테이션 가수 순이(오민애)도, 다 자기만의 진심과 이유, 그리고 슬픔 속에서 산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첫 장편영화를 만든 김진화 감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열렬한 유튜브 사용자다. 그곳에서 취향과 관심사를 그러모을 뿐 아니라 캐스팅에 필요한 정보도 얻는다. 1970~90년대를 모두 아우르는 방만한 대중문화 코드의 소유자인 그는 모든 것이 복잡하게 뒤섞이고 또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 미디어의 혼돈 속에서 묘한 공존의 감각에 주목했다. 김진화 감독의 영화는 배우 이주영, 오민애, 노재원의 앙상블을 필두로 이상하고 엉망진창이어서 비로소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전주국제영화제 시상식이 열린 5월4일 밤, ‘연시내’가 되어 ‘이제는 벗어나고 싶어’를 외
JeonjuIFF #8호 [인터뷰] <윤시내가 사라졌다> 김진화 감독, 엉망이어도 좋은 자기만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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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내 영화를 100만명이 보는 일은 영원히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 1만명, 해외 100개국에서 또 1만명씩 보면, 결국엔 100만 정도가 모일 거라 보고 그 정도면 꽤 보람이 있는 게 아닌가, 하면서 영화를 만든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인터뷰 초입에 농담처럼 꺼낸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면,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큐어>를 보기 위해 모인 관객들이 정확히 그 범주의 대상자들일 것이다. 게다가 2022년의 전주에선 그 중심에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임명된 연상호 감독이 영화의 동료를 자처하고 나섰다. 도쿄의 평범한 군상들이 벌이는 연쇄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 다카베(야큐쇼 쇼지)의 불안을 담아낸 <큐어>(1997)는 25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팬, 그리고 아시아 영화감독들에게 으스스한 최면 작용을 뻗치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옥>을 제작 중에 <큐어>를 귀중한 영감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연상호 감독과 <부
JeonjuIFF #7호 [인터뷰] '큐어' 구로사와 기요시 X 올해의 프로그래머 연상호, 여전히 장르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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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다. 알수록 미궁처럼 빠져드는 알프스 모텔엔 도우(이중옥)와 몸이 편치 않은 노모가 생활한다. 화 한 번 내지 않고 모텔을 관리하며 살뜰히 엄마를 모시던 도우는, 어느 날 밤 엄마가 실종된 모텔에서 눈을 뜬다. 엄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정체불명의 손님만 모텔을 들락거린다. 실종자는 하나 둘 늘어나는데 진실을 알려 들수록 오히려 사건은 수렁 속에 빠진다. 임상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파로호>는 진실과 환상의 경계를 교묘히 무너뜨리며, 관객으로 하여금 끝없는 추리를 펼치게 하는 작품이다. 도우의 엄마는 어디로 증발했고 손님의 정체는 무엇이며, 진실은 모텔의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임상수 감독은 “그 모호함을 끝까지 유지하고 싶었다”고 강조한다.
- 10년 전에 쓴 단편이 <파로호>의 단초가 됐다고.
= 모텔을 운영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장편 아이템을 고려할
JeonjuIFF #7호 [인터뷰] '파로호' 임상수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