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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존엄, 지켜가고 있나요? <글루미 선데이>
2002-06-05

1.일요일 오후입니다.

느지막이 일어나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며 박찬호 야구중계 보다가 엊그제 먹다 남은 피자 몇 조각으로 점심을 대충 때우고…. 지금은 세탁기 돌아가는 윙윙거림을 뒤로 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되도록 베란다 창문을 크게 열고 세탁과 탈수가 반복되는 소리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깜박 잊고 있다보면, 빨래는 엉켜 있는 그대로 세탁통 안에서 말라갈지도 모르니까요. 사실 당신 말처럼 이 영화의 형식적 재미나 스타일의 독특함을 칭찬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상투적인 설정이나 감상적인 이야기의 흐름 등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많은 영화라는 생각이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핵심은 이성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진실함의 의미와 사회적 또는 역사적 인간으로서 보여지는 실존의 의미를 동일하게 바라보며 호소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글루미 선데이>라는 음악이 그처럼 많은 자살자를 배출한 건, 인간의 존엄과 존중이 무너지는 순간의 고통과 그 고통이 부여하는 암흑과도 같은 상태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영화에서 유대인인 주인공 자보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순간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감독은 남녀 사이의 애정의 본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역사적, 사회적 의미의 인간관계의 본질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인간의 존엄이 존중받고 있느냐는 점, 이를테면 상대를 통해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삶을 지탱해나가는 이유이자 행복의 원천인 것이고, 이것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이유와 의지가 사라진다는 해석… 바로 그런 거 아닐까요?

<글루미 선데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목숨을 끊었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실존의 파괴와 존재의미의 상실을 자신들의 삶에서 몸소 겪었던 셈이라고 볼 수 있겠죠.

사랑과 진실함에 대한 범위와 그 수위에 대해선 당신처럼 저도, 특별한 기준이 있거나 확실한 가이드라인을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건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이 가능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그런 일들을 대부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무심한 삶의 과정일 뿐이라고 단정해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간사이고 또 어떤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자신의 삶에 무슨 파문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에…(어느 순간 이것이 또다른 삶의 희열을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파란으로 점철될 고행의 출발일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문득 가슴 설레거나 야릇한 긴장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게 아닐까요?

2. 그 영화를 선택한 건 그녀였다.

애잔한 음악, 감상적인 스타일, 센티멘털한 분위기…. 축축하게 젖은 부다페스트의 보도만큼이나 사람을 흠씬 적셔놓은 멜랑콜리한 정서는 그다지 내가 좋아하는 취향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왜 그 음악을 들으며 자살하는 걸까?”

인사동 밥집에서 수저를 들다 말고 뜨악한 표정으로 그녀가 물었다. 두 남자를 어떻게 동시에 사랑할 수 있었는지, 그 기묘한 삼각관계의 감정구도라는 것이 얼마나 기하학적이며 절묘한 것이었을지에 대해서만 연신 주절거리고 있던 나는,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이 가졌을 법한 그 단순한 질문 앞에 조금 막막해졌다.

영화의 상투성과 감상성에 대한 힐난을 못내 마저 떠들어대고서야 그녀와의 첫 영화관람은 종료됐지만, 그녀가 던진 숙제에 결국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메일을 보내면서 나는 일로나의 사랑을 받는 안드라스가 되기를 내심 기원했다. 그녀에게도 일로나만큼의 치명적인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영화를 함께 보고, 술잔을 기울이며, 스킨십의 수위조절을 고민하고, 안부전화가 심야 애정토로로 이어지던 무렵까지 그녀는 나의 일로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의 안드라스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 심지어 “일로나의 반쪽이라도 갖겠다”던 자보조차 되지 못했다. 자신의 실존을 확인받을 것으로 믿었던 상대에게서 존중받지 못하는 일이 실제 내게 일어났고 한 사람의 존엄이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을 망연히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삶과 고통에 대해 주제 넘게 지껄여댔던 상황들이 모두 내 안에서 벌어지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역설을 감당한 뒤에야, 또 다른 삶의 희열이 시작될 것으로 착각했던 그녀와의 영화 후일담은, 결국 파란으로 점철된 고행의 출발이었음을 뼈아프게 각인시키며 끝을 맺었다.

그러나 난 영화 속의 안드라스처럼 자살하지는 않았다.역시 멜랑콜리한 영화는 내 취향이 아니라는 사실만 씁쓸하게 확인하며 아직 영화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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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창길/ <질투는 나의 힘>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