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할리우드의 한국인 배우 오순택의 연기인생 40년
2002-06-07

“그래요‥‥변방의 배우로 40년 살았지요‥‥”

지난 40년간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한국인 배우 오순택, 현재 연극원 초빙교수로 한국에 와 있는 그를 만나 이국땅에서 이국의 언어로 연기해야 했던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카메라의 중심에 있지 못했지만 인생의 중심을 잃지 않았던 어떤 노배우의 삶을 돌아본다.편집자주

오순택씨는 이방인이다. 지난 40여년간 미국에서 활동한 한국인 배우를, 그의 조국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오순택씨는 이방인이다. 1959년 단돈 15달러를 들고 LA공항에 도착한 그에게 할리우드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조명이 비치지 않는 구석자리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기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그건 오순택이라는 한국 이름을 기억해달라는 무언의 시위이자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는 지난해 가을부터 연극원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올해 일흔이다.

낯선 이름이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어디선가 봤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로 나온 에서 오순택씨는 007을 돕는 영국 정보부의 홍콩요원으로 등장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뮬란>에선 뮬란의 아버지 역으로 목소리를 빌려줬고 <에어울프> <맥가이버> <쿵후> <마르코 폴로> 등 국내 방영됐던 미국의 TV시리즈에서도 동양인 조연으로 빈번히 출연했다. TV나 영화에서 이름을 떨칠 배역을 맡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흑인과 백인의 키스조차 금기였던 시대에 피부색이 노란 남자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그의 국적은 사라졌다. 할리우드에서 오순택은 중국, 일본, 한국, 홍콩 등 몇 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동양인 배우일 뿐이었다. 강의가 끝난 뒤 연극원의 교수실을 찾았을 때 그는 그간 출연작의 사진이 들어 있는 CD 한장을 먼저 건넨다. 프린트된 사진마다 출연작의 제목을 명기하며 “혹시 사진을 쓸 일이 있다면 이 CD를 사용하고 돌려달라”고 말한다. 결코 카메라의 중심에 설 수 없었던 배우, 하지만 CD에 담긴 사진의 중심엔 그가 있다. 그건 40년을 할리우드에서 꺾이지 않고 살아남은 어떤 의지의 흔적이다.

‘단성대학’ 학생 오순택, 영화에 홀려 미국행

오순택씨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59년. 그는 “영화에 홀려 홀홀단신 LA행 비행기에 올라탔다”고 말한다. 전쟁의 폐허가 복구되지 못한 50년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던 그에게 영화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황홀한 세상을 보여줬다. “집에서 넌 연대 다니는 게 아니라 단성대학에 다닌다고 할 정도였죠. 단성사에서 영화를 보는데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때 영화들이 참 많이 들어왔어요. 존 포드의 서부극, 장 콕토의 영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 비토리오 데 시카의 <구두닦이> 등 숱한 영화를 봤죠.” 스크린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던 시절, 그는 영화를 보면서 영어를 익혔다. “어디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영화를 할 수 있는지 몰랐지만 일단 미국에 가야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한 곳은 UCLA 영화과. 졸업할 무렵 교수들은 연기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며 오순택씨에게 런던이나 뉴욕의 연기학교로 갈 것을 권했다. 교수의 말만 믿고 버스를 타고 사흘 밤낮을 달려 도착한 뉴욕, 졸업생 중에 그레고리 펙과 스티브 매퀸이 있다는 네이버후드 연극학교에서 1년을 버틴 그는 이듬해 UCLA로 돌아갔다. 하루에 2∼3시간밖에 못 자면서 아르바이트를 했건만 뉴욕의 엄청난 물가에 학비까지 감당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UCLA 대학원 과정에 들어가려니까 네이버후드 연극학교에서 다시 연락이 왔어요.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줄 테니 학교를 계속다니라는 거예요. 대학원 등록만 해놓고 뉴욕으로 다시 갔죠.”

뉴욕의 연극학교와 UCLA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는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배우 몇명이 주축이 된 LA의 작은 극단에 들어갔다. 영화나 TV에서 단역 출연을 계속하던 그가 주목받은 계기는 이 극단에서 무대에 올린 <라쇼몽>.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로 알려진 뒤 백인 배우들을 써서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렸던 <라쇼몽>을 동양인으로 구성된 LA의 작은 극단이 다시 무대에 부활시킨 것이다. 당시 <버라이어티> <할리우드 리포터> 등이 이런 사실을 전하면서 오순택씨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배우의 경력이 진전하려면 천사를 만나야 해요. 제겐 뉴욕의 연극학교에서 장학금을 주며 도와줬던 앰버시필름의 사장과 에 캐스팅하면서 마음대로 일할 수 있는 노동허가를 얻어준

그는 60년대 중반 시작된 직업배우의 길이 비교적 순탄하게 풀렸다고 말한다. 2차대전 당시 일본과 싸우는 이야기들이 무수히 제작됐기에 동양인 배우로서 출연작이 끊길 염려는 별로 없었다. 영어 잘하고 연기력 있는 동양인을 찾던 당시 할리우드로선 오순택씨처럼 탄탄한 배우코스를 밟은 인물이 반가웠을 법하다. “동양인에게 주어지는 배역이 뻔하죠. 정원사, 세탁소 주인, 슈퍼마켓 주인, 그런 게 대부분인데 안 한다고 했어요. 출연제의를 받았을 때도 그런 역이면 안 하겠다고 했어요. 미련한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먹고살기 위해 그런 역을 한다는 데 저항감이 있었죠.” 조엘 슈마허의 영화 <폴링 다운>에 출연하지 않은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각본을 보니까 한국인 슈퍼마켓 주인이에요. 그런데 마이클 더글러스가 난동을 피우는데 겁나서 그냥 숨어 있는 거예요. 전 그럴 수 없다고 봐요. 어떤 백인이 들어와서 자기 전 재산을 때려부수고 있는데 카운터 뒤에 숨어 있을 사람이 있을까요? 동양인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보지 않는 거죠.”

연기생활을 이어가는 것만도 힘겨운 할리우드에서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피트니스센터를 운영하며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준 아내와 “내년엔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기 때문. “한국을 떠날 때 미국에 정착하러 간 게 아니었어요. 영화를 배워 돌아가리라 생각했고 내년엔 간다, 내년에 간다 하다가 40년이 지났어요.”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하면 <폴링 다운>에 출연하는 편이 옳았을지 모른다고 덧붙인다. “설익은 자존심이었을지도 몰라요. 오히려 출연해서 이 부분을 고쳐달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았나 싶네요. 동양인을 캐리커처로,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그리지 맙시다, 라고 주장했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게 작품의 질도 높이는 길일 테니까요.” 하지만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지금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쨌든 동양인을 천편일률적으로 그리는 미국영화에 오순택씨처럼 직접적인 반감을 느끼긴 힘들 것이다.

한국영화 성장은 나의 힘

미국에서 배우생활을 하면서 그가 느낀 설움엔 약소민족의 한도 들어 있다. “일본의 힘이 커지면서 더이상 일본인 역을 못하게 됐어요. 일본에서 압력을 넣은 거죠. 미니시리즈 <마르코 폴로>를 할 때는 쿠빌라이 칸의 아들로 캐스팅됐다 밀려났는데, 제작비 일부를 일본에서 대니까 일본배우가 나와야 한다는 거였죠. 요즘엔 성룡, 오우삼, 주윤발 등 홍콩의 영화인력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데 중국어를 못하니까 캐스팅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비로소 외국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한국영화의 존재를 그는 진심으로 환영한다. “80년대 나름대로 한국영화가 국제적인 인지도를 얻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죠. 능력있는 감독이 미국에 와서 작업하기를 기대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계속 이것저것 노력하다 지쳐서 그만뒀어요. 80년대엔 한국에 자주 왔었는데 그뒤론 10년간 한국에 얼씬도 안 했죠.” 그래도 그의 마음에서 조국이 지워진 적은 없다. 1978년부터 LA에서 재미한국인의 삶을 풍자한 마당놀이를 계속하고 있으며 LA폭동 이후엔 매년 한 차례씩 한국인, 멕시칸, 스페니시, 흑인이 함께 어울리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그는 지금 한국영화의 비약적 발전에 큰 기대를 품고 있다. 지금 소망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정열을 느낄 만한 프로젝트를 만나 인종적인 구애를 받지않고 연기할 수 있다면”이라고 답한다. 오랜 세월 이국땅에서 변방의 삶을 연기해야 했던 그의 눈에 얼핏 물기가 보이는 것도 같다. 사방이 흐릿해진 저녁, 인터뷰를 마치고 고즈넉한 연극원 캠퍼스를 걸어나오면서 그는 연기를 하든가 교수를 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될 것 같은데 고민이라고 말한다. 그가 선뜻 학교에 눌러앉지 않는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40년 걸려 연기를 공부해왔는데, 그걸 강의실이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 그게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무상한 세월이 스쳐간 그의 얼굴이 아직 영화광 소년의 표정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주요 출연작

TV시리즈 (1968)

영화 (1974)

TV시리즈 <돌아온 찰리 팬>(1979)

영화 <파이널 카운트다운>(1980)

TV시리즈 <마르코 폴로>(1980)

영화 <데쓰위시4>(1987)

TV시리즈 <쿵후>(1993)

영화 <베벌리힐즈 닌자>(1997)

영화 <뮬란>(1998)▶ 할리우드의 한국인 배우 오순택의 연기인생 40년

▶ 연극원 연기실습실을 찾아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