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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2002-06-12

김훈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서민 흉내를 내고 다녀서 그런지, 구청장이나 군수, 구의원이나 군의원을 하는 사람들도 너도나도 서민 흉내를 내고 있다. 어렸을 적에 못 먹고 못 살고 지지리도 고생한 궁상을 무슨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떠벌리고 다닌다. 서민이란 본래 돈도 백도 없이 뼛골 빠지게 고생해서 겨우겨우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뜻일 게다.

선거 때가 되니까 이 ‘서민’이 갑자기 성골(聖骨) 대접을 받고 있다. 멀정한 사람이 쓰레기 하치장에 가서 썩은 음식물 찌꺼기를 뒤적거리는 시늉도 하고 재래시장 생선가게에 가서 비린내 나는 생선을 맨손으로 주물러 보이기도 한다. 서로 자기만이 진짜 서민이고 상대방은 서민의 탈을 뒤집어쓴 귀족이라고 욕해대고 있다. 쓰레기를 뒤진다고 서민이 아니고 쌍소리를 잘한다고 서민은 아닐 것이다.

서민이 선이고 귀족이 악인 것도 아니다. 가난뱅이가 선이고 돈 많은 놈이 악인 것도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다. 진보가 선이고 보수가 악인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반대도 아니다. 부자가 부자의 악덕에서 헤어나기 어렵듯이 가난뱅이에게도 가난뱅이의 악덕은 있다. 또 부자의 미덕이 있듯이, 가난뱅이의 미덕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전면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쌍소리를 찍찍 해대거나 쓰레기통을 쑤시고 다니면서 그것이 마치 귀족적 엄숙주의를 까부수는 발랄함이나 낮은 자세의 삶에 대한 포용력인 것처럼 떠벌리는 꼴은 추악하다. 그렇게 뼛골 속부터 서민이고 서민이 그렇게 좋으면 서민으로 꾸역꾸역 일이나 하고 살면 되지, 대통령은 왜 하겠다는 것인가.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고통의 몫을 골고루 나누어서 짊어져야 한다는 정치구호는 아름답다. ‘고통분담’은 IMF 위기를 통과하는 슬로건으로써 나무랄 데 없이 정의로웠다. 그러나 고통의 분담이란 사실상 가능한 것인가. 고통은 누구를 막론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아마도 고통을 분담해본 역사적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사회가 갑자기 위기에 처해서 고통의 분담을 실천하고, 그 실천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IMF 위기는 오히려 고통 전담의 방식으로 전개돼왔고 빈부의 격차는 벌어져서, 서민은 세습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월드컵을 치르는 도시에서 밥벌이 터를 빼앗긴 노점상들은 연일 시위를 벌리며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 거리에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맨손으로 생선을 주무르며 서민을 등을 두드리고 돌아다니니, 우스운 일이다. 그때의 ‘서민’들은 정치권력자의 지배에 저항하지 않도록 길들여진 ‘양민’쯤으로 보였다.

역대 대통령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저 지경이 되어서 돈을 훑어먹고 고랑을 차고 감방에 들어갔다. 이것은 말하자면 천민들이 하는 짓거리이다.

대통령과 그 주변에, 귀족의 명예심과 강건함이란 약에 쓰려도 없었기 때문에 그 말로가 이처럼 극악한 천민주의의 비열함 속에서 끝나게 된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은 고귀한 것이며 삼엄하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기본적 명예심이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서민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서민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은 바로 그 지도자의 천민근성이다.

서민의 등을 두드려서 서민의 표를 어느 정도 몰아갈 수는 있겠지만, 그 표가 서민의 고통을 경감시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전세금이 오르고 점포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그날그날 벌어서 겨우 먹고살 수 있었던 ‘서민’들이 그보다 더 하층으로 추락하고 있다. 아무런 죄도 없고, 책임져야 할 일도 없지만 그들은 사회구조의 제물이 되어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 사회의 가난이란 단순한 물질적 결핍이 아니다. 이 사회에서 가난이란 차별이며 모멸이다. 지금,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이 서민의 흉내를 내가며 표를 달라고 애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진짜 서민’이니 ‘가짜 서민’이니 하고 싸우는 꼴은 그야말로 천민적이고 그 싸움 속에서 정치 전체의 천민근성은 확산되어가고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왜 스스로 높은 귀족의 정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쓰레기통 근처를 얼씬거리는 것인가. 쌍소리를 해대거나 대중의 표를 합산해서 정치권력을 세우는 제도 아래서 선거는 그런 양상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지도자는 대중이 하자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대중 전체의 뜻을 홀로 거역하면서 그 반대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귀족정신을 모조리 쳐부수어야 서민의 낙원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지도자가 귀족의 명예심을 잃을 때 서민의 지옥은 시작된다. ‘서민’은 귀족의 반대말이 아니다. 김훈/ 소설가·<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