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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진짜 중세 <스트롱 홀드>
2002-06-12

컴퓨터 게임

중세 하면 역시 기사다. 반짝반짝한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전장을 질주하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두근두근하다. 로맨스 소설의 50% 이상이 중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멋지게 망토를 펄럭이며 용과 싸우는 기사 이야기는 장르 불문하고 가장 사랑받는 판타지 게임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멋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장까지 열심히 달려갔지만 갑옷 무게에 말이 지쳐 정작 싸울 때는 맨땅에서 칼을 휘두르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폼나게 전투에 돌입했다가 운이 나빠 말에서 떨어지면 역시 갑옷 무게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상대편 말구종들의 단검에 목숨을 잃는다. 투석기나 기타 공성 도구는 가난한 영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성을 함락시킬 도구는 오직 튼튼한 팔다리뿐이었다. 머리에 판자를 이고 성벽 위에서 빗발처럼 쏟아지는 돌멩이나 끓는 기름을 견딘다. 통나무로 성문을 뚫거나 성벽 기초까지 파내려 무너뜨리거나, 아니면 수십명이 동시에 성벽에 사다리를 걸쳐 그중 단 한명이라도 떠밀리지 않고 무사히 성벽을 점거하기를 바란다. 공성전에서는 용맹보다는 인내가 필요했다.

게임이 고증에 충실하다면 정말 시시할 것이다. 이런 꼬물꼬물 궁상맞은 모습보다는 칼 한번 휘두르면 천둥 번개가 치고 요정의 방패로 드래곤이 뿜는 불꽃을 튕겨내는 게 훨씬 낫다. 기사와 귀부인이 나오는 로맨스 소설에서 굳이 입냄새 발냄새를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정면으로 뒤집는 게임을 만났다. ‘인포그램’의 <스트롱홀드>다.

게이머는 중세 유럽의 영주다.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적과 공성전을 벌여야 한다. 시스템이 꽤 잘 만들어져 있어서 공성전 자체가 단순한 전략 시뮬레이션 이상의 재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성을 쌓고 지키는 과정에 대한 남다른 묘사다. 오프닝부터 심상치 않다. 한 무리의 용감한 기사들이 적의 성으로 질주한다. 성문이 열려 있는 틈을 타서 몰래 잠입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문은 닫혀버린다. 황망해하는 기사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끓는 기름, 그리고 캄캄해진다.

성을 쌓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땅 파고 나무 베서 뚝딱뚝딱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난한 영주 밑에 역시 가난한 농민들이 궁상맞게 화톳불가에 쪼그리고 있다. 성은 무슨 성, 우선은 뱃구레 채우는 문제가 급하다. 가진 것은 도끼 한 자루뿐, 나무를 베고 사냥을 하면서 그럭저럭 급한 문제를 해결한다. 어느 정도 자원이 모인 뒤에야 성을 지을 수 있다. 성이래봤자 대단한 건 아니고 통나무를 땅에 꽂아 허술하게 만든 목책이지만 늑대의 습격에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먹을 게 모자라거나 치안 상태가 너무 나빠지면 사람들은 썰물같이 빠져나가 버린다.

목책을 어느 정도 쳤으면 궁수를 뽑는다. 가난한 영주 주제에 많이는 못 키운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적이 쳐들어온다. 목책이 얼마나 허술한지 막무가내로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려 한다. 하지만 궁수 두셋만으로도 목책에 의지해 쉽게 물리칠 수 있다. 많은 병력을 모아 벌이는 대규모 전투, 돌로 쌓은 튼튼한 성과 해자, 도개교는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풍부한 자원을 확보한 뒤에야 가능하다. 그렇게 되기까지 농민들은 얼마나 오랜 세월 묵묵히 일을 했을까? 영주들은 어떤 기발한 수단으로 매일같이 고혈을 짜내고 또 짜냈을까? 꼼꼼하게 고증해본다면 <스트롱홀드> 역시 중세의 전쟁과 삶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선인 것은 분명하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