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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0년간 우리안에 쌓여온 에픽하이, <에픽하이 20 더 무비> 타블로, 투컷, 미쓰라
이자연 사진 최성열 2024-03-19

에픽하이가 20주년을 콘서트 실황 영화로 기념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무척 그들답다. 긴 시간 동안 버텨온 다사다난한 일들을 연대기로 쭉 나열해 하나씩 속내를 고백하기보다, 모든 걸 무대로 말하겠다는 투박함과 자신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러니까 세 멤버가 지난 20년을 거쳐온 노래를 부르는 내내 우리는 쉽게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2003년을 말하지 않아도 <평화의 날>이 그때를 상기시키고 <우산>을 들으면 비 내리는 2009년이 겹쳐 보인다. 누군가 “이피아이케이”(EPIK)! 하면 반사적으로 “Fly”를 외치는 <Fly>는 당시 국민 아이돌 동방신기를 이기고 음악방송 1위를 거머쥐었던 2005년으로 우릴 돌려보낸다. 즐겁고 경쾌하게, 친근하고 유쾌하게 사람들은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에픽하이 영향권에 노출돼왔다. 그동안 우리 안에는 어떤 에픽하이가 무의식적으로 쌓여왔을까. 어떤 시대상을 딛고 에픽하이는 대중과 교감해왔을까. 타블로, 투컷, 미쓰라 세 오랜 친구가 둘러앉아 나누는 진솔한 이야기에 자주 웃고 자주 슬퍼졌다.

- <에픽하이 20 더 무비>를 만든다는 기획을 처음 들었을 때 반응은 어땠나.

타블로 이제 에픽하이가 20대에 접어드는 순간이 오다니. 맨 처음 영화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제작사 대표님에게 했던 말은 “왜 굳이 저희를…”이었다. 유명 아이돌 친구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면 훨씬 더 큰 팬덤을 겨냥할 수 있을 텐데. 에픽하이 콘서트? 가고 싶겠지. 그런데 에픽하이의 영화? (웃음) 이런 생각이었다. (연기 톤으로) 하지만 누적 관객수 1천만명을 코앞에 둔 지금, 뜨거운 열기 속에 감사함을 느낀다. 아카데미 시상식 영어 연설도 막 준비해놨다.

투컷 “콘서트를 영화로? 이게 영상 콘텐츠로 인식이 되나?” 하는 물음이 앞섰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뜨거운 관객 반응을 보면서 살짝 거만해지기 직전이다. 요즘 책(시나리오)이 많이 들어와서 책을 읽고 있다. (좌중 폭소)

미쓰라 평생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공연장이 아닌 극장에 가는 날이 오다니. 너무 신기하고 감사하다. 일단 이렇게 영화판에 뛰어들었으니 다음 차기작을 또 준비해보려 한다. 충무로 데뷔를 마치고 다음 작품을 고르는 중이다.

- 2003년 1집을 완성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경력자의 시선으로 당시를 돌아볼 때, 지금의 자신이 봐도 대단해 보이는 지점이 있다면.

타블로 사기 당한 뒤 처음 계약한 소속사에서 앞뒤의 말이 달라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곳과 계약했더니 거기서 또 사기 문제가 발생했다. 빚과 생활고만 남은 시절이었다. 와중에 녹음비를 내기 위해 세 친구가 모두 알바를 전전하면서 지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1집이다. 먼 길을 돌아 좋은 소속사와 함께하게 됐지만 그조차도 열악했다. 요즘처럼 합리적인 계약 조건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투컷 첫 계약금 받을 때 사채업자가 와서 계약금 주는 것을 눈앞에서 직접 봤다. 그런 때였다.

타블로 험악하고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회사를 나가면 해를 가하겠다는 협박도 들어본 적 있다. 그런데 거기에 겁먹지 않고 오히려 대들었다. 그게 참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다. 어린 나이에도 아닌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니. 힘 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우리를 계속 누르려 할 때, 거기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우리의 주장을 쉽게 굽히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던 게 대단하다. 일단 에픽하이를 지키고 싶었다.

투컷 많이 서러웠다. 온갖 멸시와 핍박을 받았다. 나는 이름도 없었다. 행사에 가면 “디제이야! 디제이 분!”이라고 불렸다. 당시 장비들도 엄청 무거웠는데 그것들을 직접 끌고 다녔다. 추운 날 수레를 질질 끌고 다녔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미쓰라 그런데 뭐 어쩌겠어. 우리가 가진 건 쥐뿔도 없었는데 그거라도 해야지. (웃음) 그땐 정말 꿈밖에 없었다. 그래서 인내심도 강했다. 불편한 거 힘든 거 어려운 거 모두 참으면서 지냈다. 지금 똑같은 상황에 던져지면? 절대 못할 것 같다.

-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멤버 교체 없이 굳건하게 여기까지 왔다. 서로를 어떻게 알아보았나.

타블로 멋지게 얘기해야 하는 건가? (웃음)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 그룹 없는 남은 애들끼리 모인 건데….

미쓰라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봤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좋은 일 나쁜 일 겪어나가면서 유대관계가 깊어진 거지 1집 때까지만 해도 다 같이 알아가는 단계였다.

투컷 알아가는 단계라고 하지 말자. 사귀는 것 같잖아.

미쓰라 뭐야, 아니었어?

- 이듬해 발매한 2집에서는 <High Skool> <평화의 날> <혼자라도> 등으로 대중에게 에픽하이를 알리기 시작했다. 멤버들이 직접 프로듀싱에 참여하면서 빛을 발했는데, 이때부터 에픽하이의 독자적인 색깔이 드러났다고 생각하나.

타블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자발적으로 셀프 프로듀싱을 진행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벽에 부딪힌 상황이었다. 더이상 갈 곳이 없단 걸 알게 된 거다. 1집이 1만5천장 정도 판매됐다. 힙합 장르 안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가요계 전체로 봤을 땐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회사에 프로듀싱을 맡길 예산이 없었다. 재정적 상황을 알게 되면서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나 우리가 직접 나선 것이다. 그때부터 투컷과 나는 비트 트랙 만드는 걸 배우기 시작했고 아는 형을 통해 컴퓨터를 빌려 썼다. 친구에게 빌린 장비는 친구가 잠든 동안 쓰면서 작업했다.

투컷 맨땅에 헤딩이었다. 다음 앨범이 못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리가 직접 만들기 시작한 거다. 2집 반응이 좋으면서 작게나마 가능성을 봤다. 우리가 직접 할 수 있고 하더라도 대중의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배가 고팠다. 여전히 궁핍하고.

타블로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발전할 수 있을 거란 걸 예상했다. 사실 희열 같은 건 없었다. 그냥 힘들었다. 당시엔 SNS도 유튜브도 없던 만큼 사람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빠르게 알 수도 없었다. 어느 날 대학 축제에 갔는데 사람들이 우리 노래를 막 따라 부르더라. 그때 알았다. 우리 노래를 듣는 사람이 이만큼 있구나, 이렇게 반응을 해주는구나. 에픽하이도 셀프 프로듀싱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순간이었다.

- 2000년대 중후반은 음원만으로 흥행하기 어려워 예능 활동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시절이었다. 일단 예능 프로를 나가야만 앨범도 노래도 홍보할 수 있었다. 이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타블로 예능 프로도 음악방송도 모두 나가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소속사 대표님에게 부탁했다. 예능 한번만 나가게 해달라고. 그런데 거절당했다. 네가 가서 뭘 할 수 있겠냐는 말만 돌아왔다. 사정사정해서 결국 SBS 예능 프로 <야심만만>에 나가게 되고 그 뒤로 예능에 자주 얼굴을 비출 수 있었다. 그때 정말 욕 많이 먹었다. 힙합하는 애들이 TV에 나온다고. 힙합 배신자라는 별명도 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미쓰라 하지만 예능에 나간 이후 많은 선택을 받았다. 하루에 스케줄 7~8개까지 잡히기도 했다. 안 나가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어떤 날에는 뭘 촬영하는지도 모른 채 나가기도 했다.

투컷 그렇게까지 방송에 나가지 않았으면 <Fly>가 이만큼 잘되지 않았을 거다. 우리 그때 1년 일해서 25만원 벌었다. 촬영하는 건 예능이지만 우리에겐 생존이었다.

타블로 그때 행사 무대에 가면 뒤쪽으로 “연예인 왔다, 연예인” 하는 비아냥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셋 모두 청개구리적인 기질이 있어서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앞에선 우릴 비난하고 뒤로는 피처링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중 지금까지 음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남들을 터무니없는 이유로 비아냥거릴 시간에 앞을 보고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게 오래간다.

- 그전까지 뮤지션이 전면에 나서 앨범 판매, 자체 홍보, 포장과 유통까지 도맡은 사례는 없었다. 힙합 레이블 맵 더 소울을 통한 독립적인 경험이 에픽하이에게 무엇을 남겼나.

투컷 그때 우리에겐 두 가지가 없었다. 두려움 그리고 경험. 그래서 할 수 있던 것 같다. (웃음) 진짜 너무너무 힘들었다. 체력적으로 힘이 부쳤다. 그래도 이 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뭐든 잘한다.

타블로 맵 더 소울 직전의 에픽하이는 <Fan> <Love Love Love> <One> 등으로 아이돌에 절반 가까웠다. 그러니 지금까지 누려온 것들을 한방에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스스로 생각하고 기획해본 시간을 통해 지금 우리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사실 기성 시스템에 저항하거나 대안을 찾고 싶었던 건 아니었고, 오로지 우리가 해보고 싶어서 도전했던 건데 그때 보이지 않는 적들이 많이 생겼던 것 같다. 그러니 맵 더 소울 이후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사건이 터졌을 때 내 편이 되어주거나 보호할 힘을 가진 사람들이 날 외면했던 게 아닐까.

- 타진요 사건을 대중과 함께 통과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과 슬픔을 함께 나눈 기억이 있는지.

타블로 없다. 아예 없다. 그땐 내 편에 서주는 팬들도, 미디어도 아무도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팬들로부터 받은 박살난 CD 사진은 영영 잊을 수 없고 욕설 가득한 이메일도 자주 받았다. 슬픔을 나눠 갖기에 그때 나는 혼자였다. 스스로 찾아간 변호사 한분 정도. 나중에 일이 정리될 즈음에야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와 “그때 사실 나는 네 편이었어”라고 말해주었다. 너무 고마웠지만 이런 의문도 들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어디에 있었지?

- 이 시기를 거친 뒤 발매한 앨범 《99》는 여전히 밝고 경쾌하지만 이야기 주제나 메시지가 훨씬 심오해졌다. <Don’t Hate Me>와 <춥다> 등이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에픽하이의 슬픔과 어려움이 반영된 작업이다.

타블로 많이 성숙해졌다. 그런데 힘든 일 겪으면서 나도 많이 단단해졌다. 워낙 멘털이 튼튼해서 나는 나를 놀릴 줄 안다. 아무리 힘들어도 쉽게 지지 않고 가까운 미래를 기다리며 버텼다. 9집 수록곡 <개화>에 ‘레드카펫 깔아줘도 잊지 마라. 그게 너의 피땀으로 붉게 물든 거야’라는 가사가 있는데, 내가 실제로 이 당시 군대 전역을 앞둔 미쓰라와 투컷에게 “돌아오기만 해. 내가 이거 다 이겨내고 레드카펫 깔아놓을게”라고 말했던 것을 쓴 거다. 우리 셋이 다시 모여 <헤픈 엔딩>과 <Born Hater>로 1등 했을 때, 다시 음악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행복했다. 데뷔 이후 처음 1위 했을 때보다 더 기뻤다.

- 2010년대 중반 <쇼미더머니>를 기점으로 힙합 장르에 대한 진입장벽이 이전보다 더 낮아졌다. 힙합이 자기 고백적 이야기를 담아내기보다 자신을 과시하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지적도 있는데.

타블로 과시가 자신감을 기반한 것이라면 문제될 것이 있을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SNS를 통해 일상적으로 자기 과시를 하고 있다. SNS는 되고, 힙합은 안될 이유가 있을까.

- 특히 에픽하이는 세 친구의 관계성에 열렬히 지지받아온 그룹이다. 왜 사람들은 에픽하이의 오랜 우정에 환호할까. 이 우정의 지속성이 대중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나.

투컷 티격태격하고 죽마고우 같은 느낌을 많이 좋아하는 듯하다. 우리가 뭐 때문에 싸우는지 자주 물어본다. 주먹다짐 같은 경험들도 물어보고. (웃음) 그런데 우리는 잘 안 싸운다. 수시로 못마땅해하지만 싸울 일은 거의 없다. 뭐랄까. 이젠 상대방의 임계점을 잘 안다.

타블로 우와, 너 멋진 말 쓴다? (웃음) 우리를 통해 오랜 우정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거라면 일면 맞다. 이런 관계를 갖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실제로 우리도 우리끼리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 다른 곳에서 어른의 삶을 살다가 우리끼리 만나면 옛날 비밀 기지에 돌아오는 기분이다. 우리가 같이 사는 한 유지되지 않을까? 나이 70 먹어서도 이렇게 살지 않을까?

투컷 아우, 난 그건 반대야.

에픽하이의 시간들

2003 - 2009

2003년 에픽하이 정규 1집 《Map of the Human Soul》을 발매하기까지 다사다난한 사건을 거쳐왔다. 가진 것이라곤 오직 에너지와 철면피였던 시절. 본격적으로 에픽하이를 알린 <평화의 날>이 수록된 2집 《High Society》 이후 안정적으로 가요계에 안착했다. 2005년 발매한 3집(<Fly> <Paris>)과 2007년 4집(<Fan> <Love Love Love>)은 음반시장의 불황 속에도 각각 10만장 이상 판매됐다.

2010 - 2017

2008년 5집의 <One>으로 에픽하이의 음악방송 1위 소식이 익숙해질 즈음, 세 멤버는 돌연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울림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부터 독립해 힙합 레이블 맵 더 소울을 경영 및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픽하이 음반을 오직 홈페이지에서만 살 수 있게 하거나, 멤버들이 직접 택배를 맡아 발송하는 독립적인 시스템은 기존에 없던 운영방식이었다. 한편 이즈음 타블로 학력 위조 누명 사건이 퍼지면서 에픽하이의 가장 큰 암흑기를 맞이했다.

2018 - 2024

<쇼미더머니> <언프리티 랩스타> <고등래퍼> 등 힙합을 소재로 한 예능프로그램의 부흥과 함께 대중적인 거리감이 부쩍 가까워진 시기다. 에픽하이 멤버들에게도 개인적인 변화를 맞닥뜨리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다채로운 작업을 통하여 많은 컬래버레이션을 선보이는 것은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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