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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차기의 즐거움
2002-07-03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월드컵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라는 질문은 억지로 만든 물음인 것처럼 들린다. 이 세상에는 물음이 성립되지 않는 질문도 많다.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는 질문이 헛되이도 물음표(?)를 달고 있다.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곰곰이 따져봐야 할 일이지만, 월드컵으로 국가 브랜드가 올라가고 스타 플레이어들의 몸값이 50억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해도 그 축복의 권역에 속하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나는 잘 모르겠다.

월드컵이건 골목컵이건 다 그만두고서라도,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공을 차는 일의 즐거움이다. 월드컵이 지나간 뒤에라도 이 축복은 영원히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축구공은 다만 구형(球型)일뿐, 아무런 조형성을 지니지 못하지만,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역동적으로 살아 있는 문화재이다. 축구공은 사람과 사람끼리 서로 발로 차는 공이다. 그래서 축구공은 야구공이나 농구공이나 배드민턴의 셔틀콕보다 훨씬 더 인간의 몸쪽으로 친숙하다. 새벽에 동네 운동장에서 공을 찰 때, 내 앞으로 굴러온 공은 그 공을 찬 사람의 생명의 질감을 포함하고 있다. 공은 그 생명의 질감으로 구르고 솟는다.

내가 그 공을 받아서 다시 차보낼 때 나는 타인의 생명의 질감을 나의 생명의 힘으로 제어하면서 전혀 새로운 각도와 질감을 만들어낸다. 공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내 생명의 힘으로 튕겨져나간 공은 내 발을 떠나는 순간 나의 것이 아니다. 그 공은 나의 힘으로 굴러가는 만인의 것이다. 내 앞으로 굴러오는 공은, 공마다 그 질감이 다르다. 빠른 공이 있고 느린 공이 있고 도는 공이 있고 돌지 않는 공이 있으며, 높히 차기에 알맞은 공이 있고 낮게 차기에 알맞은 공이 있어서 그 질감의 다양성을 공을 안 차본 사람들에게 이루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내 앞으로 날아온 공을 왼발로 멈춰세우고 공이 완전히 정지한 상태에서 오른발로 차낼 때, 그 공은 나로부터 발원하는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날아들어오는 공을 움직이는 상태에서 걷어찰 때, 사람들의 생명의 힘은 공 속에서 부딪치고 뒤섞여 새로운 방향으로 튕겨져나간다. 사람들의 힘은 뒤섞이고 튕겨지면서, 밀고 밀리는 궤적을 그리며 골키퍼 앞으로 육박한다.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던 골키퍼가 공을 길게 차내면, 그 공의 착지점이 다시 만인의 출발점이다. 나의 것과 만인의 것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공은 명멸한다.

공차기는 구석기 이래로 지면 위를 뛰어왔던 인간의 다리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공차기는 승부의 놀이이고 추억의 놀이이다. 그 추억의 맨 밑바닥에는 아마도 기억할 수 없이 아득한 시절의 전쟁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공은 싸움을 놀이로 바꾸어준다. 그것이 구형(球型)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축복이다. 축구공이 세모뿔이나 육면체였다면 공차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공을 찰 때, 나에게는 이 구형이 생의 신비처럼 느껴진다. 내가 차낸 공이, 나의 힘으로 날아가는 그 공이 나와 타인 사이에서 완벽한 객관의 자리를 굴러가는 사태가 나에게는 생의 신비이다.

문명의 대부분은 직립보행에 힘입은 것이지만, 다리와 발은 여전히 시원성(始原性)의 충동을 간직하고 있다. 직립보행 이후에도 다리와 발은 여전히 지표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다리와 발을 움직여 공을 찰 때, 나는 내가 내 지층시대 선조의 후예임을 안다.

월드컵 기간 중에 <매그넘 풋볼>(Magnum Football)이라는 축구사진책을 읽었다. 아프리카의 오두막집 앞에서, 페루의 오래된 문명의 폐허 위에서, 콜롬보의 빈민가에서, 침략군의 탱크 앞에서, 그리고 이 세계의 수많은 불행한 골목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썰물의 갯벌에서 해가 저물도록 아이는 혼자서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리우데자네이로의 야자수 위로 높이 솟아오른 공도 있었다. 목발을 짚은 절름발이 아이들에게도 ‘찬다’는 동작은 단념할 수 없는 몸의 갈망이었고, 공은 억압될 수 없는 생명의 표상으로 쓰러진 문명의 폐허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그때, 공과 인간의 관계는 서로 길들여지면서 서로 저항하는 것인데, 이 저항과 길들여짐의 반복 속에서 몸은 자유를 느낀다. 그래서 공을 찰 때, 우리는 이 만질 수 없는 세계를 떠나서, 만질 수 있고 찰 수 있으며, 인간에게 저항하면서 인간의 저항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공처럼, 몸처럼 정당하게 움직여지는 세상을.

월드컵의 아우성이 지나간 뒤에도 새벽의 마을운동장에 모여 공을 차는 소년들은 아름답다. 새벽의 비린 안개 속으로 솟아오르는 공은, 새로운 공이다. 이제 나이먹고 또 힘이 부쳐서 새벽공을 찰 수가 없다. 억지로 하다가 무릎뼈를 다친 적도 있었다. 다만 글을 쓰면서 공을 그리워할 뿐이다. 김훈/ 소설가·<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