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2002-07-04

그들의 경지, 우리의 먼길

걸작이다. 모자를 벗어라! 이만하면 가히 전 인류적 스케일의 주제다. 그러면서도 고도의 만화적 테크닉이 발휘되어 재미가 있다. 초현실주의 시인 필립 수포의 자동기술을 방불케 하는 거대진폭의 상상력이다. 더구나 이 영화는 무한탐욕의 폭식성을 자랑하는 일본의, 나아가 세계의 자본주의적 신경증을 밑으로부터 정신분석해내고 있기까지 하다. 영화는 탐욕과 집착에 관한 생태학적, 동화적 보고서이다. 800만 정령들이 노는 거대한 목욕탕. 먹을 것, 놀 것, 여자, 금, 모든 쾌락이 있는 그곳에는 틀림없이 일제 전범의 혼도 놀고 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 미야자키는 일종의 역사적 속죄를 수행한다. 그래서 전 인류적 스케일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시선은 줄곧 열살짜리 깡마른 소녀의 것이라니! 미야자키 하야오는 위대하다.

음악은 그의 단짝 히사이시 조가 맡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소개할 때 이미 그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영화적으로 볼 때에는 <바람계곡…>보다 이번 작품이 좀더 나아간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음악적인 개성은 <바람계곡…>이 더 진하다. 이번 영화의 음악도 가끔씩 히사이시 특유의 월드뮤직 느낌을 주는 감수성이 드러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요소가 강하다.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동원하여 좀더 풍부한 느낌을 강조했다. 가끔씩 등장하는 일본 민속음악에서 따왔음직한 화성들은 예전보다도 훨씬 더 요소로서만 작용한다. 물론 일본의 전통적인 온천장 문화를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더 일본음악에 가깝지만, 그것도 장면과의 일체감을 주는 한에서만 그렇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민속음악적 요소들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예전보다 줄었다. 뭐 그래서 아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련된 것으로 치면 예전보다 점수를 더 줘야 할 것 같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원래가 철저히 영화음악적이다. 영화를 앞서가지 않고 쫓아가는 음악, 스스로의 개성보다는 분위기 유도에 더 신경을 쓰는 음악이다. O.S.T를 들어보면, 이번에도 역시 테마에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어딘지 약간은 싱겁고 촌스러운 듯하지만 순진한 느낌을 잃지 않는 그 멜로디. 아마도 히사이시 조의 팬들이 좋아하는 대목이 거기일 것이다. 통속적 호소력을 잃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쉽고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순진함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음악은 보통 사람들의 감수성을 은근히 자극하는 면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 평범함이 좀더 진지하게 깊이를 이루는 단계가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한다. 히사이시 조가 거기까지 이르렀다는 뜻은 아니다.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룬 우리는 ‘자고 깨어나니 세계적 수준’인 어떤 실력이 과연 우리 소유인지 스스로도 확인할 길이 없는 채로 축제의 밤을 보내곤 했다. 내심 일본이 16강에서 떨어진 것을 고소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림도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인류 전체를 품는 문화적 포용력을 예술로 걷어올리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아직 지독히 먼길을 더 달려야 한다. 성기완/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