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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닉스의 <밤길>
2002-07-04

고고클럽의 전설, 되살아나다

“이때는 매일 새벽에 통행금지가 풀리고 영업이 끝나면 거의가 청진동 등의 해장국집을 거쳐 남산식물원 근방의 커피점에 모이는 게 단골 고고족과 여러 밴드들의 일과여서 새벽이면 이곳이 여러 밴드들의 집합소가 되어 서로들 만나 얘기도 나누고 쩔기도 하고 모두들 한가족같이 친하게 지냈다. 그 당시의 이태원은 히피 천국이였고 언덕 따라 양쪽에 쭉 늘어선 작은 클럽에선 여러 무명의 그룹들이 경쟁하듯 매일 밤 라이브 뮤직을 연주했다.” ‘재미음악인’ 심형섭(미국명: Tommy Shim)이 그의 홈페이지에 쓴 자서전(http://www.tomshim.com/ftstep.htm)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는 지금 시애틀에 거주하고 있다. 이유는 앞의 문장에서 “쩔기도 하고…”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 1976년 초 “연주하던 업소에 악기를 그대로 둔 채” 미국으로 쫓기듯 떠나갔기 때문. 그리고 1970년대 초 고고클럽 씬에서 ‘헤비 사이키델릭 록의 전설’로만 알고 있던 ‘그룹사운드’ 피닉스(Phoenix)의 음반이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CD로 재발매되어 그를 쫓아낸 한국 땅을 밟았다. 음반의 레이블은 ‘지구레코드’라는 한때의 제국으로부터 ‘닐바나기획’이라는 낯선 기획사(?)로 바뀌어 있다. 단, 닐바나는 ‘그 닐바나’가 아니다. 당시 회현동에 있던 고고클럽의 이름이자 이 음반을 재발매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어떤 젊은 한국 록 애호가가 설립한 것이다. ‘우드스탁’과 ‘앨터몬트’에 대해서는 빠삭해도 ‘플레이보이컵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와 ‘청평 페스티벌’은 금시초문인 사람이라면 이 음반에서 ‘들을 만한 사운드’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음반은 ‘이틀에 걸쳐 총 4시간 동안’ 녹음되었다. 게다가 멤버 몇명이 갑자기 군에 입대하는 통에 일부는 베이스 주자 원명이, 일부는 객원가수 김혁이 보컬을 맡고 있어서 이들의 진면목을 보기는 힘들다. 당시 음반산업의 관행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음반사의 간섭’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홉 번째 트랙 <밤길>은 한마디로 놀라운 곡이다. 8분에 가까운 길이와 복잡한 구성을 가진 곡으로 레코딩을 시도했다는 점 자체가 파격적이다. 도입부에서 미묘한 화성의 키보드의 불길한 음과 중반부에서 퍼즈와 와와 이펙트를 사용한 기타 솔로는 ‘압권’이나 ‘필살’이라는 오래된 인상비평 용어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 드럼, 베이스, 기타 외에도 오르간, 퍼쿠션, 관악기(플루트)가 적절히 삽입된 사운드는 ‘올디스’가 아닌 ‘클래식’의 느낌을 전달한다. 그러고나면 앞의 트랙들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좋지 않은 사운드에도 불구하고 오랜 무대에서의 경력을 통해 다져진 탄탄한 연주력은 물론이고, 몇몇 곡의 멜로디에서 당시 ‘가요’의 어법과는 상이한 ‘젊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는다면 보너스 트랙으로 삽입된 <즐깁시다>를 권한다. 산타나의 곡을 번안한 이 곡은 이들이 라이브 무대에서 어떤 음악을 연주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텍스트다. 비브라토 심한 와와 기타 연주와 파워가 넘치면서도 박자를 잘게 쪼개는 드럼 연주는 현장에 있었다면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헤비 일렉트릭 블루스’인 다른 세개의 보너스 트랙은 제한된 지면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기는 아쉬운 음악들이다.

이 재발매 CD는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희귀음반 컬렉터’를 겨냥하여 인터넷 경매 사이트 e-bay 등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하긴 일반 매장 한구석에서 먼지만 폴폴 쌓여 있으면 뭐하겠는가. 그건 이들이 갈구했던 자유가 21세기가 되어도 관대하게 수용되지 않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 자유가 어떤 것인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단, 첫 트랙 <산속에서>의 가사에 나오는 “향그러운 풀냄새”가 한대수가 노래했던 “구수한 나뭇내”(<하룻밤>)와 더불어 아직도 ‘구속 수사’의 대상이라는 현실은 분명하다.(닐바나 기획 재발매)신현준/ 대중음악평론가